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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May 24. 2016

먹는 여자

유서와 고구마

초저녁 몇 시쯤에 잠이 들었는지는 아람은 확실히 몰랐다. 8시나 9시였을 것이다. 이 시간 쯤되면 아람은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 잠을 못 자게 방해를 하면 몬스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잠 못 들고 칭얼대는 우희와 우정을 따돌리고 침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쓰러졌던 것이다. 그리고 자정이 되어 눈은 저절로 떠졌다. 쪽 잠이다. 요 며칠 간 우희와 우정이 감기로 고생하느라 옆에서 체온을 유지시켜주느라 새벽에 계속 깼던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어 버렸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일어나 인터넷 유아 용품 사이트를 찾았다. 아이들이 침대를 새로 사주면 잠을 잘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층 침대, 원목 침대 한 참을 들여보다가 비싸서 소파 베드로 검색을 했다가 불편할 것 같아 에어 베드를 검색하고는 공기 넣기 힘들 것 같아 때려치우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식모. 아무리 생각해도 아람의 직업은 식모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자아 비관이 들었다. 귀엽게 설거지를 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아람은 아직도 낯설었다. 방바닥을 물걸레로 훔치는 모습도 어색했다.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늙어 보이지 않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아 온갖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열심히 닦고 치우고 노력을 해도 우희가 장난감을 놀고 나거나 우정이 이유식을 먹고 나거나 우현이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와 옷을 벗는 순간 집은 삽시간에 다시 엉망이 돼버린다는 걸 경험하고 나면 우울증이 오곤 했다. 다른 무언가를 할 수는 없을까? 아람은 잡코리아를 들어갔다. 몇 군데 클릭을 해서 자격요건을 훑어봤지만 갈만한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유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아람은 들었다. 아람은 세상에 태어나 해야 할 일을 했고 이제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한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희와 우정이를 세상으로 나오게 하 것, 이것은 최선의 길이었고 이 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없을 것이므로 그러니 유서를 써보자 싶었던 것이다.

막상 쓰려고 하니 나눠 줄 재산이 얼마 되질 않았다. 좋은 말을 해주고 싶어도 애들이 너무 어렸다. 아람은 눈시울이 젖었고 기운이 빠진 채로 소파에서 선잠이 들었다. 희미하게 손바닥 한 가운데 아문 상처 살이 하얗게 올라온 손이 보였다. 아람은 예수님의 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져보았다. 핏기가 없고 얆은 손마디는 굽어 있었다. 아람이 손을 잡고 가운데를 세게 눌러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람의 손에도 감각이 느껴지더니 다시 피가 돌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나니 창 밖에는 솨아아 비가 오고 있었다. 아람은 창문을 열어 빗소리를 들었다.  

라면이 당겼다. 전현무가 안성탕면을 먹는 광고 생각이 났다.

"에이취"

우희가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리자 아람은 방으로 쫓아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비 오는 새벽에 라면을 먹으면 습기와 온도 때문에 MSG 농도가 배가 될 테지만 아람은 라면의 유혹을 뿌리쳤다. 왠지 유서를 쓰지는 못했지만 시체가 될 때 되더라도 어글리 하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낮에 쪄 놓은 고구마 껍질을 까서 한 입 베어 먹으니 쫀득한 촉감과 함께 단맛도 매한가지로 배가되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아람은 미모를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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