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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Apr 26. 2016

먹는 여자

1. 곰팡이와 피자

아람은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천천히 클리 토리우스 만지니 통통하게 부푼 마들렌처럼 부드러웠다.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하반신은 땀이 나고 손의 관절은 통증을 잊은 채 얼얼해졌다. 미세한 모세혈관으로부터의 말초적 쾌감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 아닐지 생각했다.


옆에는 막내딸이 자고 있다. 그녀는 너무도 평화롭게 자고 있는 우정을 바라보다가 볼에 쪽쪽쪽 뽀뽀를 했다. 행여나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비켜 누워 어제 읽다만 책을 펼친다. 반 페이지를 읽고 나니 허기가 느껴져 책을 덮고 부엌으로 간다.


커피 전용 주전자에 생수를 붓고 물을 끓인다. 빨간 봉지에 담긴 인도네시아 산 카마수트라 커피에서 향이 무척 난다. 아람은 얼른 필터 종이를 꺼내 커피를 내릴 준비를 하고 같이 먹을 빵도 찾아본다. 어제 먹다 남은 빵이 한가득 있다. 찰보리 호떡 하나를 냉큼 하나 입에 배어 물고 역시나 어제 마시다 만 차가운 블랙커피를 꿀꺽꿀꺽 마신다.


그리고 그 여자 생각이 났다. 얼마 전 놀이터에서 만난 하얀 피부에 키가 큰 한 애 엄마. 함께 있던 남편은 유난히 작은 키에 왜소한 체형이었다. 아빠를 닮아 동그란 눈의 아들내미가 그런대로 똑똑해 보였다. 어쩐지 아람은 그 여자의 죽 찢어진 눈이 그렇게도 성인군자, 아니 불여시처럼 느껴져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침대 방으로 간다. 아람은 자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우현 옆에 누워 목을 꼭 안으며 속삭였다. "아들, 일어나! 커피 마셔!" 아무런 말이 없다. 아람이 다시 속삭인다. "우리 돈 많이 벌면 하와이로 놀러 가자! 애들은 띄어 놓고 가자!" 그제야 우현은 코를 드르렁 곤다. 아람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책을 들고 식탁에 앉는다.


그녀에게 책이란, 그녀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쾌락이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긴 한데, 바로 음식을 먹는 일이다.  그녀는 참 잘 먹는다. 그러니까 책을 읽다가 먹고 , 먹다가 책을 읽는다.


우현이 어느 새 샤워를 마치고 맨 몸으로 아람에게 다가와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을 들여다본다. 아람은 후다닥 책을 감춘다.

"뭐 먹을 거 없어? 배고픈데!"

" 빵 있잖아, 커피도 여기"

우현은 못마땅한 듯 빵을 조금 뜯어먹더니 옷 방으로 가 옷을 걸쳐 입고 나온다. 금세 외출 준비를 마쳤다.

" 세탁기 뒤에 곰팡이가 엄청나다. 사람을 불러야겠어!"

아람은 책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난다.

" 일요일인데 어딜 가는 거야?"

우현이 대답한다. " 지금 나가 봐야 돼, 약속이 세 개나 있어!"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서 우현이 나가자 아람은 베란다로 나가 커다란 세탁기를 끙끙대며 옮기자 그 뒤에 시커멓게 피어오른 곰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리나케 인터넷으로 곰팡이 제거를 검색하니 업체 블로그 후기가 뜨고 표독스럽게 읽어 내려간다.


전화를 건다. " 방수 페인트 칠에 방수 벽지까지 발라줍니다. 가격은 90만 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람은 마트로 가서 곰팡이 제거 제품을 있는 대로 바구니에 담는다. 락스, 미스터 홈스타 스프레이, 옥시크린 가루, 코팅제, 두루마리 휴지와 마스크, 장갑 까지. 아람이 본격적으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커먼 벽을 향해 양 손으로 제품을 움켜쥐고 분사를 시작한다. 순간 훅 들어온 락스의 독성에 따가운 나머지 얼른 눈을 감는다. 사용방법에는 분사 후 1~ 2 시간 후에 닦아 내라고 적혀 있었다. 밀려오는 허기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엊그제 먼다 만 피자가 냉큼 생각이 났다.

4분. 아람은 냉동고에서  피자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다. 꽁꽁 얼었던 걸 해동시켰는데도 한쪽 귀텡이는 여전히 차갑다. 다시 한 번 돌린다.

4 조각. 아람은 소파에 앉아 정신없이 피자를 흡입하기 시작한다. 사이다도 두 컵쯤 마셨다. 어느 새 두 딸이 아림에게로 다가온다. 우희는 기침을 콜록 이고 우정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콧물 기침감기와 천식과 기관지염과 알레르기에 겨우 내 앓아 온 두 딸내미들이다.  우희와 우정은 뜨거워서 호호 불어 가며 피자를 먹는 아람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마의 4월. 이 달만 무사히 좀 넘겨보자. 아람은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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