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한 발 총알

캘리포니아 그녀 19화

by 이순직

55


청학리로 가는 길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눈에 익은 풍경들이 등 뒤로 밀려날 때마다 박철수를 면회하러 가는 마음과 다르게 망설임이 자꾸 되살아났다.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지만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했다.


그녀는 입술 굳게 앙다물었다. 일주일 넘게 탈반에도 강의실에도 인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휴학계 내고 홍보실 사람들과 짧은 인사 나누고 아무도 없는 문창반에 들러 '잘들 살아라, 나는 간다'라며 문창 일지에 몇 마디 쓰고 교문 나설 때까지만 해도 청학리에 갈 생각은 없었다. 의정부 교도소에 갈 때마다 차창 밖으로 눈에 익힌 청학리는 막상 버스에서 내리자 더없이 낯설었다. 제법 반듯한 길과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 벗어나 산으로 뻗은 길을 걷다가도 되돌아갈까, 몇 번이나 망설였다.


때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떠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터인데 굳이 작별 인사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말뚝 박듯 마침표 찍어야 한다는 생각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한때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었든 혹은 만만한 장난감이었든 상관없이 매듭은 확실히 끊고 싶었다. 그녀는 야트막한 고갯길 위에 올라서서 산기슭 끝자락에 드문드문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지붕 몇 개를 내려다보았다.


발길 돌려 되돌아갈 망설임 끝에 천천히 고갯길을 내려갔다. 군용 트럭 짐칸에 아무렇게나 앉은 병사 몇 명이 손가락 입에 넣어 삑삑 소리를 내질렀다. 흙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라 햇살 속에서 반짝였다. 이런 집이었나…, 금방이라도 꼬꾸라질 듯 집은 위태로웠다. 대문도 없는 마당에 오도카니 서서 등짝 간지럽히는 햇살이 성가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집안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없었다. 누구 없어요? 그녀는 도무지 사람 살 것 같지 않은 위태로운 집이 풍기는 기괴함에 짓눌러 낮게 말했다. 햇살은 따가웠다. 아무도 없나요? 그녀 목소리가 햇살처럼 마당에 떨어져 흩어졌다.


"너냐…?"


꼬질꼬질 떼가 두꺼운 한지(韓紙) 여닫이문이 슬그머니 열리더니 인철수 얼굴이 나타났다. 엉망으로 취한 말투와 초점 없는 표정에 그녀는 한 발짝 뒤로 움찔 물러섰다.


"간다고…, 왔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당에 쏟아진 햇살이 어지럽게 흩어지더니 저희끼리 뭉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맴맴 돌았다. 어지러웠다.


"들어와라, 서 있으려고 온 거 아니잖아?"


그녀는 천천히 토굴 같은 방으로 걸어갔다. 대낮인데도 창문조차 없는 방은 케케묵은 어둠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인철수는 훌러덩 옷을 벗었다. 닫히다 만 여닫이문으로 햇살이 서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앉자 인철수는 와락 달려들었다. 거울은 어디에도 없었다. 옷은 포장지처럼 찢어졌다. 배신감과 헛헛함이 뒤엉킨 인철수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그녀는 힘껏 밀쳐내고 올라탔다. 인철수는 갓 잡아 올린 고등어처럼 꿈틀거렸다.


"마지막이니까…, 맘대로 갖고 놀아라…."


"짐작은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네."


장욱진은 못내 씁쓸한 엷은 웃음을 지었다. 김용덕은 괜히 닦달했다는 뒤늦은 후회에 고개 돌려 거리를 내다보았다. 구름장은 아까보다 훨씬 낮게 내려앉아 거리는 온통 을씨년스러웠다. 밀리지도 않은 일들을 앞당겨 한꺼번에 몰아서 하듯이 산다는 느낌은 들었어. 늘 바쁘고 정확했잖아? 어쩌면 이제는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몰라. 우리야 뭐 늘 들러리잖아? 시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온갖 똥폼 잡는.


"너무 그러지 마라. 누군들 이유 없이 살겠냐? 귀신 잡는 해병이 왜 그래?"


장욱진은 슬쩍 핀잔을 놓았다. 시는 놓더라도 광고할 거잖아? 김선미가 옆에서 거들자 김용덕은 멋쩍게 웃었다. 없는 것보다 똥폼이라도 잡고 보는 게 있어 보이겠지? 작정하고 달려들어 털어버리면 비록 먼지뿐이더라도.


"시도 써. 그까짓 게 뭐라고. 사나이 해병이잖아?"


어째 비꼬는 것 같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용덕은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캘리포니아 그녀를 가지고 있었다. 정교하게 조각 맞출수록 저마다 욕심에 불타는지도 몰랐다, 온전히 고스란히 자신만의 캘리포니아 그녀에 대한 기억을 가지려는. 시간이 빠르게 옆구리를 툭 치고 지나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56


지금도 손이 떨려.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은 아닐 거야. 어쩌면 모르는 사람인데 알던 사람으로 착각하는지도 몰라. 캘리포니아 느슨한 저녁 햇살 속에서 하늘을 찢어버리는 날카로운 총소리. 왜 작고 까만 여자애로 기억할까, 나도 모르겠어. 식당은 다운타운 끄트머리에 있어.


가질 수 없으면 파괴하는 심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남자는 늘 혼자 왔어. 주문하면서도 혼자인 걸 수줍어하는 숫기 없는 남자였어. 씻는다고 비누칠 열심히 해도 손톱 밑은 항상 거뭇한 기름때가 있었어. 어떤 때는 매우 슬픈 얼굴로 와서 너무나 슬프게 저녁을 먹고 변함없이 슬프게 식당을 나서곤 했어. 여주인은 눈치가 빨라. 온두라스, 불법체류자…, 이런 것들은 남자를 설명할 수 없어.


남자의 고향은 너무나 멀리 있어. 그곳에 있을 부모와 형제는 남자와 비슷한 얼굴일 거야. 어쩌면 남자가 유일한 수입원인지도 몰라. 남자를 캘리포니아에 보내기 위해 식구들은 지붕 낮은 판잣집에서 아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날마다 점검했을지도 몰라. 나름대로 남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을까? 눈에 익은 언덕이며 나무들이며 뜨거운 햇살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여겼을까?


작고 까만 여자애는 이미 죽어 있었어. 옆구리에서 피가 수돗물처럼 나왔어.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멀리서 봐도 숫기 없는 남자가 아니었어. 총알이 남자 머리 위로 날아다녔어. 경찰은 침착했고 곧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어. 사람들은 겁에 질려서 남자의 총에 맞지 않으려 숨었어.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어. 검은 트럭이 왔고 총잡이들이 내렸어. 웅크리고 있던 남자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났어.


마지막 한 발 남은 총알이었을까, 남자는 하늘을 향해 쐈어. 남자는 작고 까만 여자애 옆에 쓰러졌어. 수돗물처럼 피가 쏟아졌어. 총잡이들은 곧 평화로워졌어.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내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느슨한 저녁 햇살은 변함없이 간지러웠어. 포만감에 게을러진 떠돌이 수사자를 향해 걸어가는 일런드가 왜 떠올랐을까? 남자를 기억하는 고향의 언덕과 나무들과 더운 햇살은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까? 흉흉한 소문은 재빠르게 퍼졌고 남자를 죽어 마땅한 악당으로 만들고서 금방 잊혀졌어.


문화원 팀장이 프로젝트 하나 준비 중인데 같이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전화가 왔어. 팀장의 말이 스페인어처럼 들렸어. 한 남자가 죽었어요. 그는 아직 젊은 사람이었죠, 식당에도 간혹 오는. 무슨 생각으로 팀장에게 말했는지 모르겠어. 놀라셨구나? 처음이라서 그래요. 곧 익숙해질 겁니다. 팀장의 목소리는 덤덤했어. 남자가 한국인이었다고 해도 목소리는 변함없을 거야. 팀장은 식당 위치를 묻고 찾아오겠다며 전화를 끊었어.


그 남자는 작고 까만 여자애 옆에 쓰러져서 길바닥에 장미보다 붉은 피를 쏟아내면서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의지와 상관없이 조금씩 확실하게 감기는 눈꺼풀이 얼마나 무거운지 혹시 알아요? 끊어진 전화에 입술 바짝 가까이 대고 떠들었어. 익숙해질 거라구요?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악당으로 몰려 잊혀져야 익숙해지는 거죠? 돌아가고 싶은 어릴 적 뛰어다니던 판잣집 지붕들 사이로 삐뚤삐뚤 뻗은 골목길과 숱한 언덕들, 산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들은 지금도 여전할 텐데…, 남자는 어디로 가버린 거죠?


나 역시 돌아갈 땅이 있어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남자는 왜 훌쩍 떠나버린 걸까요? 작고 까만 여자애는 자기 옆에서 남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에요. 세렝게티에는 말이죠, 젊고 튼튼한 일런드 한 마리가 있었어요. 다리 절룩거리기 전에는 어쩌면 숱한 암컷들의 유혹에 시달렸을지도 몰라요. 멋지고 튼튼한 몸매에 가지런히 하늘 향한 뿔도 볼만했거든요.


어쩌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절룩 걸음을 고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왜 수사자에게 걸어갔을까요? 전화는 이미 끊어졌어. 나도 알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소용돌이치더니 식도를 타고 올라왔어. 꺼이꺼이 울었어. 향수병 때문일까, 아침이 늘 두려운 힘겨운 날들 때문일까. 멜라니가 돌아온 것도 몰랐어. 화들짝 놀란 멜라니는 어쩔 줄 몰라 했어. 안절부절못하였어.


멜라니에게 얘기했어. 총잡이들이 벌집으로 만들어버린 남자를. 가보지 않은 온두라스 어느 후미진 외딴 마을의 언덕들과 따가운 햇살도. 멜라니는 사뭇 심각한 표정이었어. 멜라니는 남자보다 나를 더 보고 있었어. 힘들구나 너. 그럴 때는 말이야, 멀리 보지 말고 가까운 곳을 봐. 가까이 있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에 집중해. 그것도 힘들면 거울 앞에서 네 몸을 봐. 씩씩하게 젊은. 나중에 결코 돌아오지 않을 네 몸은 너무나도 확실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몸으로 마음을 치료하는 건 아주 오래된 관습이야….


57


멜라니의 위로는 귓바퀴에서 맴돌다 흩어졌어. 슬퍼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어. 목놓아 꺼이꺼이 울다 보면 슬픔도 바닥날 거라 여겼어. 내 안에 쏟아낼 서러움이 얼마나 있었던 걸까. 오랫동안 울먹이다가 알프레드가 앉았던 소파 그 자리에서 가까스로 진정했어. 무엇 때문에 슬퍼했는지 모를 정도로 머리가 멍해지면서 배고픔이 밀려왔어.


마음보다 몸이 항상 한발 앞서는 걸까. 마음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몸은 어쩜 그리도 정확하게 기억할까. 차갑게 식은 피자 조각 씹는데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 한 방울 뚝 떨어졌어, 울고 있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웃음이 나왔어. 이런 상황이 너무나 익숙했어.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 살아온 지난날들 어느 속에서 숱하게 반복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 맞아. 지나왔다며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살아온 날들이 삽시간에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거였어.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식으로 질서 정연하게 되살아나는 건 아니야. 뒤죽박죽 밀물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가 미처 눈치조차 챌 틈도 없이 가슴을 휩쓸고 사라져, 갈비뼈가 아린다고 착각할 수도 있어. 손 뻗어 잡을 수 없어. 잡히지 않는 것들이야…. 샤워 마친 멜라니가 전신 거울 앞에 섰어. 물기 머금고 마구 헝클어진 금발이 오늘따라 희극적으로 보여. 가까이에서 보면 너무나 비극적인 일들도 멀리서 보면 희극일 수밖에 없듯이. 이만, 총총총….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 외면할 수 없잖아? 마음 단단히 먹어라."


접객실로 들어가기 전에 인철수 여동생을 다독였다.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여동생은 담담했다. 캘리포니아 그녀에게 알려야 하지만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아득했다. 접객실은 드문드문 몇몇 사람들이 있을 뿐 썰렁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웠다. 구석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학생회관 복도에서 눈에 익은 후배 몇이 웅성거렸다. 영정은 희미하게 웃음 머금고 있지만 달랑 앞에 놓인 한 송이 흰 국화만큼 창백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조문하고 접객실로 들어선 김용덕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물었다.


"교통사고라는데 정확한 건 몰라. 두리뭉실하게 말하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짜식, 죽기 전에 좋은 일 좀 하고 죽지."


장욱진은 고개 끄덕이며 눈살 찌푸렸다.


"그래도 일찍 죽기엔 인물이 아깝긴 하잖아? 마지막 보내는 길에 험담은 좀 그렇지 않냐?"


김용덕은 서둘러 핀잔 놓고서 주위를 살폈다. 혹시라도 인철수를 대충 아는 후배가 들으면 충분히 오해할 말이었다. 졸업하고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탈반에 꼭 들러 후배들과 스터디했던 터라 뜻있는 선배로 통했다. 후배들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 미화되는지 관심 따위는 없었다.


더구나 이제 와서 인철수의 실체를 털어놓는다 해도 아무 의미 없었다. 오지 않을 것처럼 말하던 김선미는 오랫동안 조문했다. 접객실로 들어온 김선미는 이미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장욱진과 김용덕이 미안스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마음 한쪽 구석은 착했어…, 한 번 더 눈 질끈 감고 외면하면 금방 지나갈 텐데 왜 자살을…."


김선미는 말끝을 흐렸다. 장욱진과 김용덕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뜻밖이라는 놀라움에 쉽게 입 다물지 못했다.


"교통사고 아니야?"


"차에서 죽었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야. 주차장도 아닌 공터에 며칠째 움직이지 않아서 신고했다더라."


김선미는 어느새 울음기 가신 표정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국회의원 보좌관 노릇을 한다고 하던데? 여기저기 빨빨거리면서 잘 돌아다니잖아?"


"그건 금시초문인데?"


"그런데 왜 스스로 죽어? 말 못 할 딱한 사정이라도 있었던 건가?"


"추측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모든 이유는 침묵에 묻혔으니까. 그저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자고."


한 무리의 건장한 사내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접객실로 들어왔다. 김선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놀란 장욱진은 의아한 표정.


"왜 그래?"


"쉿! 똘이장군이잖아."


사내들 속에 정말이지 눈에 익은 똘이장군이 있었다. 어수선한 풍경에서 벗어나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례식장을 빠져나오자 골목에는 가벼운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58


"이유야 죽어버렸으니 추측만 남는 거고 사실 그렇게 떳떳하진 않았잖아?"


김용덕은 풀이 죽어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인철수는 술수에 능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동물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놈이지만 김선미는 또 다른 인철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연극할 때 자주 만났어. 아니 찾아왔다고 해야 하나? 르포 기사를 쓴다고 해서 인터뷰도 몇 번 했어. 기사는 나오지 않았어. 국회의원 보좌관이었다는 건 나도 믿기 어려워."


"하긴 우리가 신문에 기사 한 줄 날 정도로 대단한 투사도 아니고 인철수 역시 대단한 프락치도 아니었으니까. 얼굴 맞대고 속내를 듣기 전에는 대충 이름만 아는 사이일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불타는 젊은 날들을 함께 보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맞는 말이다. 망자 앞에서 산 사람은 언제나 죄인이지."


"처음엔 소문도 있고 해서 잔뜩 경계심 가지고 있었는데 몇 번 만나고 르포 내용과 상관없는 얘기도 나누다가 보니까 조금씩 알게 되더라. 그때 이미 안에서부터 많이 무너진 상태였어…."


김선미는 기억들 하나하나 천천히 되살리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그녀가 한국을 떠난 후 인철수는 몇 달 동안 벌건 대낮에도 엉망으로 취해 토굴 같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벌컥벌컥 여닫이문을 열어젖히며 햇살 고여 있는 마당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오빠를 위해 청학리 작은 부동산 사무실에 다니는 여동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은 정말 끔찍했다. 죽은 아버지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온 동네를 시끌벅적 들쑤셔놓았다. 공사판 막노동으로 하루에서 하루로 힘겹게 건너뛰던 아버지는 가로등도 없는 길 위에서 죽었다. 여기저기 심한 폭력에 짓이겨진 멍 자국을 빤히 눈으로 보면서도 경찰은 심근경색 병력이 있다는 돌팔이 의사의 충고에 따라 돌연사로 처리했고 동네를 쏘다니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정신줄 놓아버린 건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이십여 년 전 집 떠난 어머니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미친놈처럼 사방팔방 쏘다니던 인철수가 깨달은 것은 의외로 단순했다.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세상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하게 돌아가는가. 빼앗고 짓누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그녀가 떠난 후 엉망으로 취하면서 세상은 또 한 꺼풀 껍질 벗고 눈앞에 나타났다. 잔인한 세상의 절벽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인철수는 천천히 몸을 추슬렀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 하지 말 것, 짐승으로 살되 사람으로 보이게 할 것, 강자 앞에서 더없이 비굴해지고 약자 앞에서 더없이 강해질 것, 여자를 절대 믿지 말 것. 동네 구멍가게에서 술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맞닥뜨린 건달이 유일한 핏줄 하나뿐인 여동생을 겁박하는 것을 보고 갈비뼈 부러질 정도로 주먹다짐하고 난 뒤로 인철수는 빠르게 다시 살아보고자 하는 의욕에 불탔다.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어. 자질구레한 일들이 있었지만 탈 없이 매듭지어질 거고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어. 햇살이 살짝 따가웠을까? 모르겠어. 버스를 기다리는데 신호등 때문인지 차들은 멈춰 서 있었지. 법원 호송 차량은 가끔 보곤 했어. 청학리에서 교도소가 가깝거든. 그런데 그날따라 느낌이 쎄한 거야. 고개 들어 무심히 호송버스를 보다가 눈길이 멈췄어. 청남색 낡은 죄수복에 갇혀 있는 박철수와 눈이 마주쳤던 거야. 아마도 날 알아봤을 거야, 틀림없이. 그 눈빛이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눈빛과 얼마나 닮았던지 숨이 턱 막혔어. 손이 떨리고 어깨와 다리가 떨려왔어…."


김선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해성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장황했고 양심선언이라고 하기에는 폭로해 공격할 대상이 없었다.


"어두운 객석에 앉아 수도 없이 반복하는 리허설을 보고 있노라면 경외심마저 들어. 연극쟁이들은 얼마나 많은 타인의 삶을 살아?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하고 또 하고. 이윽고 역할과 자신의 정체성마저 뒤섞이는 걸 봤을 때 소름이 돋아. 저렇게까지 자신을 놓아버릴 수 있나…, 어떻게 가능한가…. 탈춤을 추긴 했어도 그건 탈에 숨는 거잖아? 전혀 다른 문제야…."


김선미는 어두운 객석에 앉아 고개 숙이고 있는 인철수를 가끔 힐끔거렸다. 똑같은 동작과 대사에 싫증 나서 졸고 있는 거라 여겼다. 김선미는 잔인해지고 싶었다. 아직 인철수의 밑바닥까지 가보지 않은 터였다.


"언니를 사랑은 했던 거야? 아니면 잃어버린 장난감인 거야?“

keyword
이전 18화알프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