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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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밥에 인조 고기밥, 속도전 떡을 식탁 위에 잔뜩 늘어놓고 양강도 혜산의 질척거리고 비좁은 골목을 되살리는 건 향수병이라고 해도 도둑처럼 숨어 있는 적개심과 울분에 갇혀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억울한 마음을 눈치챌 때마다 뭐랄까? 안타깝고 안쓰럽고 화딱지가 나.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따져볼 엄두는 전혀 없고 결코 보상받을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들은 나를 숨 막히게 해.
당신들 삶은 당신들이 결정해야 해요. 그게 맞지 않나요? 멜라니가 말하자 김철수는 탐스러운 가슴골 훔쳐보는 끈적끈적한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가 있었어. 자연재해나 굶주림보다 무서운 게 사람인 동네예요. 타인을 믿는 순간 철저하게 망가지는 동네… 하나같이 속마음과 겉마음을 나누어 상황에 따라 드러내지만 속마음은 함부로 절대로 꺼내지 못해요.
그런 동네를 여행했지 살아보진 않았잖아요? 김철수의 설득은 아무 소용없었어. 멜라니의 관점에서 비록 평양 여행 경험이 전부이긴 하지만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에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 한참 고개 갸웃거리던 멜라니는 다소 따분한 표정을 지었어. 결코 손에 잡을 수 없는 달나라 토끼 얘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김철수는 발가벗은 멜라니 몸매를 상상하는 걸까.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엷은 만족감이 깃드는 웃음을 지었어. 이 불협화음! 꼴까닥 생침 삼켰어. 동물원에 가봤지요? 우리에 갇힌 호랑이나 기린 혹은 코뿔소나 침팬지를 보면서 즐거워하지 않았나요? 평양 여행은 동물원 구경이랑 다를 바 없어요. 김철수 말에 멜라니는 놀랍다는 듯 두 눈 동그랗게 뜨고 What? Way? 말까지 더듬었어. 말은 결코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고 경험은 싫든 좋든 깊은 상처를 남기니까, 말이 결코 가까이 다가서거나 도달할 수 없는.
재미있는 건 멜라니도 김철수가 딱히 싫은 눈치는 아니었어. 경험이 달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 논쟁이나 토론하는 걸 은근히 즐기는 편이거든. 그걸 통해서 좀 더 확장된 시야를 갖는다고 믿는 편이니까. 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단지 이해하는 척할 뿐이지, 그게 편리하니까. 결론은 항상 없어. 멜라니도 김철수도 서로를 설득하거나 입장에 대한 양보를 받아내는 일 따위는 없었어. 저마다 자신이 구축한 생각의 공간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뿐이야….
집으로 돌아와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멜라니는 전신 거울 앞에서 세상에 홀로 살아남은 사람처럼 홀딱쇼 하더니 샤워하고 나서도 또 한바탕 생쇼를 했어, 생각은 보이지 않으니까. 익숙한 나는 알프레드가 누워 자던 소파에 웅크린 채 커피 홀짝거렸어. 도무지 현실감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멜라니의 벌거벗은 몸짓이 헛것처럼 보였어. 어깨 부딪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너희들을 생각했을까?
내게 굳이 작별 인사할 필요가 없었던 알프레드를 생각했을까? 모르겠어. 내 안에서 쓰여지지 않은 시(詩)들이 아우성치는 걸까, 그날 밤은 잠을 잘 수 없었어. 창가에 서서 어두운 거리를 내려다보았어.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대부분 권총 허리춤에 감춘 건달이거나 홈리스야. 가끔씩 왔다 갔다 하는 경찰은 결코 차에서 내리지 않아, 어둠이 내리면. 도어카메라 앞에서 수상하게 움직이면 영락없이 노숙자야. 하늘 아래 누울 방 한 칸 없이 세상을 산다는 건 정말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이겠지.
한 발 자칫 잘못 내디뎠다가 나도 그런 꼴을 피할 수 없을 거야, 아마도. 침대로 들어가 꼼짝하지 않고 있는 멜라니는 알프레드를 떠올리고 있을까? 알프레드가 자신의 몸을 탐험할 때 멜라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프레드 이전의 어떤 남자를 떠올렸을까? 이윽고 옹달샘을 발견한 알프레드의 흥분한 메기는 환호성을 내질렀을까? 맞아, 생각은 보이지 않아. 찰나에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 위로 빠르게 지나갈 뿐이지.
이건 절망일까 아니면 배신감일까. 애당초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교과서에 믿음이 없으니 배신감이라고 할 순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내려놓을 수 없는 끈 하나는 있잖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내려놓을 수 없는 끈, 판도라 상자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튀어 나간 희망이라는 놈. 아마도 길에서 알프레드는 만난다면 몰라볼 거야. 웃고 있다는 추측, 호기심 가득하다는 추측, 우울하다는 추측뿐이니까.
길 건너편 집 도어카메라 불빛이 반짝거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는 거야. 한밤중에 사유지 침범은 위험한 짓이야. 생각을 훔쳐 감쪽같이 바꿔치기하는 것만큼. 공용어가 없는 캘리포니아 한밤중 용감하게 사유지 침입하는 사람은 스페인어를 사용할까 광둥어를 할까, 프랑스 말을 할까? 밤이 깊어 가. 깊어가는 밤처럼 나도 깊어가는 걸까. 문득문득 아침이 두렵기도 하지만 태양이 어디 날 신경 쓰겠어? 편지에 차마 쓰지 못하는 많을 일들이 날 깊게 할까? 모르겠어, 아직은. 그럼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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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사이는 밖에서 볼 수 없어. 설령 본다고 해도 오독이야."
학사모 쓴 이들이 양어장 관상용 금붕어처럼 떼거리로 우글거렸다. 떠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같이 졸업했을 할 텐데…, 잘 지내고 있겠지? 캘리포니아에서. 김용덕은 못내 아쉬운 표정, 앨범 아무리 뒤적여도 그녀는 없었다. 공식적으로 그녀는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동기생이었다.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특히 남녀 관계가 특히 그래."
장욱진은 특유의 판단하고 확정 짓는 말투로 마침표를 찍었다. 뭔가 알고 있구나? 그렇지? 김용덕은 다그쳤다. 저만치 꽃다발 든 김선미가 다가오고 있었다.
"김용덕, 네가 얘기했잖아? 중앙 모텔."
도리어 되묻는 장욱진은 김선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난 그저 풍문을 얘기했을 뿐인데? 사실 워낙 많은 말들이 뿌리도 없어 떠다니잖아? 지금은 어디서 누구한테서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원래 소문이란 부풀리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곧잘 튀잖아? 메뚜기처럼. 김용덕은 변명처럼 억울한 표정까지 지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봤지. 모두 소문이라고 하기에도 찝찝하고 그렇다고 사실이라고 하기에도 황당하고. 암튼 우리가 알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아닌 것들이 느닷없이 튀어나와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야."
장욱진은 마당발답게 확신에 찬 목소리, 졸업도 축하하고 취업도 축하해. 김선미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장욱진은 환하게 웃었다.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야? 김용덕은 장욱진의 꽃다발을 보면서 투덜거렸다. 달랑 한 송이가 뭐냐? 저놈은 다발인데…, 멀기로 따지면 누가 더 먼데 너무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여주와 목포를 동급은커녕 오히려 역차별이야?
김용덕은 요즘 들어 부쩍 가까워진 장욱진과 김선미 사이를 놀려먹을 작정으로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중앙 모텔은 너희 둘 얘기 아니야? 김용덕은 일부러 기세등등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김선미는 의아한 듯 오히려 장욱진 보며 해명하라는 투로 눈살 찌푸렸다.
"길바닥에서 이럴 게 아니라 뒤포로 갈까?"
장욱진은 말머리를 돌렸다. 정릉골은 꽉 찼어, 보나 마나. 돈암동으로 가자. 김용덕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발길 잡아 앞장섰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장이 위태로웠다. 배 터지게 먹거리 다 먹고 챙길 것들 모조리 챙긴 왁자지껄한 잔칫집에서 도망치듯 우리는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 옮겼다.
쪼잔하게 교열이 뭐냐? 말이 기자지 그게 무슨 직업 축에 끼냐? 나처럼 발로 뛰는 광고 쪽을 한다면 모를까? 그런데 넌 겁이 많은 거냐 아니면 사회로 나가기 싫은 거냐? 왜 책상물림 하려고 해?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하던데. 김용덕은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내내 떠들었다. 하긴 학교에 남아 있으면 편지는 널 통해서 받아야겠네? 예전에 시 하나 써서 보냈는데 엄청 작살난 뒤로 보내온 편지만 읽기로 했다, 괜히 똥폼 잡다가 본전도 못 찾았어.
그런데 쟤들은 정말 수상하지 않냐? 누구나 은밀한 비밀이 있잖아? 부부 사이도 있는데. 김용덕은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바싹 붙어 서 있는 장욱진과 김선미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익숙한 차창 밖 풍경이 책장처럼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싫든 좋든 닥치잖아? 지나온 다음에야 그것이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의자에 앉자마자 장욱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 낮게 말했다. 무슨 말로 또 뭘 홀리려고 그래? 김용덕은 심드렁했다. 김선미는 괜한 어깃장 놓지 말라는 눈빛으로 김용덕을 째려보았다. 말이나 논리가 되든 되지 않든 상관없이 나름대로 지어내어 세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유독 장욱진은 마당발로 여기저기 꽂아둔 듣는 귀가 많아 정보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호기심이 돋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사랑하는 캘리포니아 그녀가 아닌가.
"우리가 무사히 졸업하는 것도 학점을 다 채워서가 아니라 그녀의 보살핌 때문이라는 판단이야. 현사반이랑 탈반이 작살날 때 문창반 비껴간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누군가는 불었을 거 아니야? 고문당하든 달콤한 유혹에 넘어갔든. 그런데 끝내 우리는 무사했잖아? 이게 가능한 일이야? 이제야 앞뒤 맞춰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던 거야. 물론 너무 황당한 정보는 거르고 걸러서 내린 결론이야. 중앙 모텔."
막장 드라마 쓰냐? 섣불리 앞서 나간 추측이야. 아무 생각 없이 말하긴 했지만 중앙 모텔은 비현실적이야. 김용덕은 펄쩍 뛰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지 아니면 막연한 바람으로 똘똘 뭉친 확신인지 알 수 없지만. 사실 누구나 보고 싶은 것들만 보고 믿고 싶은 것들만 믿는 심리적 현상을 빤히 또렷하게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자신 역시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영풍문고에서 만났을 때 인철수는 지나가는 말로 단 한 마디로 물었을 뿐인데? 김용덕은 말끝을 올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세상은 넓고 저마다 할 일은 많아. 우린 세계수(世界樹)가 아니야.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지. 욕심이야, 코미디 같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아. 수상해. 물론 캘리포니아 그녀의 언질은 내가 얘기한 것이지만 나도 인철수한테서 들은 얘기고 애당초 인철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이란 걸 알잖아?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인 양 뻐기고 으스대는 걸 좋아하잖아? 김용덕은 자기가 놓은 덫에 걸린 모양새가 되자 무턱대고 부정했다.
"인철수는 달콤했던 날들을 추억하고 싶었던 게지. 메이퀸이 되고 나서도 무슨 약점 잡혔는지 모르지만 중앙 모텔의 관계는 계속됐어. 하지만 그런 관계는 오래갈 수 없잖아? 캘리포니아로 떠난 이유도 관계를 청산하고 싶기 때문이야. 설령 사랑했더라도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거야. 기생오라비 인철수가 어디 한 여자에게 전력투구하겠냐?"
김선미, 너는 뭔가 알고 있지? 장욱진 저놈 얘기가 얼토당토않은 막장이라는 걸 증명할. 김용덕은 고개를 김선미에게 불쑥 내밀었다. 김선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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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결혼은 사랑이 5%이고 나머진 운명이야. 사람들 시선이 그렇다는 거야. 사랑이 99%이고 드문드문 후회할 착각이 1%라고 아무리 우겨본들 소용없어.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문율처럼 굳어진 결혼하는 여자에 대한 그러한 주위 인식에 숨 막힐 수밖에 없잖아? 김선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자다가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그만둬."
장욱진은 서둘러 입막음하려는 요령으로 투덜거렸다. 캘리포니아 그녀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돌싱의 회고담으로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판단에 장욱진은 거북한 심정을 울컥 토해냈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는 여자를 선택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운명으로 받아 들어야만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암묵적 강요가 있다는 걸 형들은 알아? 운명이라는 올가미를 씌워서 꼼짝달싹 못 하게 하고 있다는 걸? 장욱진을 비롯한 우리는 한 옥타브 높아진 김선미의 날카로운 물음에 입술 굳게 다물고 고개마저 떨구었다. 언니가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어.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보다 끝내 끊어야 하는 인연에 신경이 더 쓰였던 모양이야….
중앙 모텔을 나와 인철수보다 한 걸음 뒤에서 걸으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엉덩이에 불규칙적으로 아무렇게나 붙박여 있는 몇 개 검은 점을 별자리라고 우기는 이상한 믿음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묘하게 그럴싸하다는 짐작이 퍼뜩 들었다. 엉덩이 별자리가 앞날을 예언하고 있으며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겨내리라는 가장 강력한 표식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상한, 그러나 조금의 의심도 없는 굳은 신념 비슷한 인철수의 믿음에 자신의 마음이 갇혀버릴까, 그녀는 조심스러웠다.
무엇보다 어떤 심정에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중앙 모텔의 첫날을 받아들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 맞춰본 배꼽 높이가 두 번째는 거부감이 훨씬 줄어들고 짐승처럼 날숨과 들숨을 거칠게 내뱉는 일도 스스럼없이 익숙해져 가는지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설명할 수 없음에 대한 불안감이 무엇을 향해 조금씩 몸집 부풀려 가는지 내내 눈치채지 못했다.
날마다 조금씩 험악해져 가는 학교 풍경 역시 불안감을 부추겼다. 중앙 모텔 나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서로의 약속이 타인에 대한 기만술로 볼 수 있지만 오히려 남들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려는, 비밀이 언젠가는 행복하고 따뜻한 결말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뒤죽박죽 엉망으로 쑤셔놓은 벌집 되어버린 현사반과 탈반을 지나 문창반에 들어설 때면 안도감을 내쉬기도 했다.
메이퀸 일정이 없는 날이면 박철수 만나러 의정부 교도소에 면회 가는 일도 어쩌면 시시각각 자신을 조여 오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무사하겠지?"
아직 노을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보현봉은 늙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짭새라도 예전처럼 도표 만들어가면서 간첩으로 몰겠어? 그렇게 구라 치면 이젠 들통나기 쉽잖아?"
인철수는 걱정 하나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거렸다. 카페는 한산했다.
"가깝게 지냈으니까 면회 가봤겠네?"
"뭐하러 가. 몇 달 있다가 금방 나올 텐데."
그녀는 더없이 평화로운 표정에 놀라면서도 애써 드러내지 않았다. 박철수의 말에 따르면 프락치 같다고, 아마도 틀림없다는 확신이 자신에게는 좀처럼 실감할 수 없는 경험 너머에 있는 거라고 짐짓 외면하려 해도 막다른 골목 끝에서 걸음 멈출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난감한 노릇은 어쩔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항상 붙어 있어 어떤 행동을 할 때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며 엄청난 실수이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제각각 움직이는 걸 어렴풋이 그녀는 느꼈다. 그 괴리감이 까닭 모를 불안감을 증폭하고 있었다. 중앙 모텔이 자신을 인정사정없이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아직 몸집 키우지 않아 눈에 띄지 않는 뾰루지였다.
"캘리포니아에 갈 거야?"
"궁금해?"
"관심 없어. 그냥 물어본 거야."
인철수는 심심하고 지루한 모양인지 두 팔 크게 높이 치켜세우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카페 통유리 너머로 노을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하고 보현봉은 늙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