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응옥찐

캘리포니아 그녀 20화

by 이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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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든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 있겠어…?"


김선미는 오히려 되묻는 인철수의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 앞에서 입술 굳게 다물었다.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내밀한 사정을 속속들이 짐작할 수 없거니와 참견이나 훈수가 자칫 숱한 오해를 불러오지 않던가. 피할 수 없는 사랑이거나 혹은 충동적인 필요에 따른 철부지 불장난이었거나 상관없이 판단하고 정의하는 게 무턱대고 선을 넘는 위험한 짓일 수도 있었다. 인철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전히 캘리포니아 그녀에 대한 애정이 살아 있는 터였다.


"어두운 객석을 뚫어져라 강렬하게 쏘아보는 눈빛에서 불현듯 호송버스 유리창에 얼굴 붙박은 청남색 낡은 죄수복의 눈빛을 발견해. 우리는 그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어야 했어. 이익과 상관없이 저항하고 항거하는 것은 젊은 날의 특권이기도 해. 하지만 모두 그렇진 않지. 까칠한 햇살 속 청학리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눈빛에 서로 등진 역할이 슬펐지. 세상에 나쁜 젊음은 없어. 단지 이익을 좇을 뿐이야…. "


김선미는 완벽하게 자기 옹호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거꾸로 속내를 털어놓음으로써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내보이는 것 같은 횡설수설에 짜증이 슬며시 약간 치밀어 올랐다, 푸념이나 넋두리를 받아주는 느낌 때문이었다. 막강 해병 김용덕과 마주쳤더라면 한바탕 거친 몸싸움을 푸닥거리로 했을지도 몰랐다, 참회이거나 자기변명이거나 입장이 어느 쪽이든.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무엇 하나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일주일쯤 지나 마지막 공연이 끝난 뒤였다. 한 달 동안 이어졌던 강행군이 끝나 모두 후련하고 또 섭섭한 마음에 쉽사리 헤어지지 못했다. 연습까지 더하면 거의 반년을 동고동락했으니 아쉬움은 얼굴에서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대사 몇 마디뿐이었던 김선미도 뿌듯했다. 연습할 때는 청소며 잔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았다. 막내이기도 했지만 매우 훌륭한 연극에 참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렜다.


"오늘은 고도 씨가 오지 못합니다…, 오늘은 고도 씨가…."


혼자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는 인철수를 발견한 것은 쫑파티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몇몇은 이미 자리를 떴고 시간이 지날수록 빈자리가 점점 눈에 들어와 파장 분위기가 완연했다.


"오늘 왔었어? 미리 얘기라도 하지."


김선미는 딱히 편리를 봐줄 수 없으면서도 자신의 대사를 중얼거리는 인철수가 반가웠다.


"그렇지? 결론은 항상 없거나 숨겨져 있지? 어둠이 내릴 때까지 아무리 안간힘 쓰며 기다려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걸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은 알고 있었겠지? 알고 있으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걸 숙명이라고 하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음이라 해야 하나?"


"무슨 얘기야?"


김선미는 인철수가 연극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눈빛과 버스 정류장에서 맞닥뜨렸던 눈빛이 얼마나 비슷한가에 대해 충격 먹은 경험을 말할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어떤 일은 금방 잊혀지고 어떤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발목을 붙잡아. 자꾸 뒷걸음질 치게 만들어. 질서 정연했던 살아온 내력들이 한순간 엉망으로 뒤엉켜. 고도가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소년이 고도가 아닐까? 호송버스에 갇힌 죄수복보다 더한 것들에 나는 갇혀 있던 것은 아닐까…."


김선미는 도무지 갈피 잡을 수 없는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난감했다. 연습 장면을 숱하게 보았고 몇몇 배우와 인터뷰도 했으니 딱히 공연을 보기 위해 왔다고 여기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속내 풀어놓을 상대가 김선미 자신뿐이라고 믿기도 마땅치 않았다.


"기사는 캔슬당했어. 편집장은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하더군. 고도는 영원히 오지 않아야 한다는 쪽이거든. 모습을 감추고 이미 왔다는 해석은 희망을 깨부수는 짓이라고…, 기다리고 참는 게 오히려 이치에 맞다는 거야. 사람은 뻔히 알면서도 실수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도 또 실수하고 잘못하고. 까짓거, 안 오면 찾아가면 되지 않냐? 반복하는 실수와 잘못이 지겹지도 않나?"


인철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선미는 단순한 직장인 스트레스로 여겼다. 위태롭게 걷는 걸음이 다소 불안했지만 무사히 택시를 타자 안심했다. 고개 돌려 극단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지난 반년의 발자국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출입구와 골목이 두 눈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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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관계였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으니 지나온 날들은 항상 안갯속에 있어."


"과연 그럴까? 기억의 장난이 아니고?"


"늪일지도 모르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늪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거야."


우리는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는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함에 휩싸여 입술 굳게 다물었다. 어떤 말로 망자를 기억하든 저마다 선택이지만 이미 망자라는 사실은 요지부동이어서 기쁨보다 깊은 슬픔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운동장 구석에 무리 지어 하회탈춤 배우던 뜨거운 햇살 아래의 풍경을 금방 떠올릴 수 있지만 제아무리 손 뻗어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했다. 각시, 양반, 초랭이, 부네, 이매 따위의 탈을 쓰고 입으로 내뱉는 장구 소리에 앉았다 일어서며 두 팔 휘두르는 탈춤 사위 속에서 캘리포니아 그녀는 인철수에게서 무슨 모습을 찾아냈는지 짐작할 수 없으나 우리는 노동보다 힘겨운 동작들을 가까스로 이어가며 입에서 단내를 뿜어냈다.


여름 방학 한 달 동안 이어졌던 그 지독한 혹사의 경험은 그저 놀이꾼에 지나지 않다고 여겼던 탈반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계급 사회에서 나름 살아남기 위한 백성들의 해학과 치열한 몸부림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신랑 놈은 단판 이후로 연락 오냐?"


벽돌처럼 단단한 침묵이 몹시 거추장스러운지 김용덕은 짐짓 짓궂은 표정까지 지었다.


"미친놈 아니야? 여기서 그 얘긴 왜 나와?"


장욱진은 벌컥 화를 냈다. 김용덕은 실실 웃었다.


"번호 바꾸기 전에 뻔질나게 전화 왔었어. 지금은 안 와. 이사했지만 같은 동네라 늘 조심해. 실제로 예전에 살

던 집 근처 골목을 서성거리는 걸 몇 번 봤어."


김선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 씩씩거리는 장욱진만 오히려 이상한 꼴이 되어버렸다. 김용덕은 의혹 짙은 눈빛으로 장욱진을 건너다보았다.


"첫날밤 얘기해봐라. 우린 아직이라 도움말 같은 거라도."


"이런 미친놈이!"


장욱진은 주먹으로 김용덕의 옆구리를 쳤다. 주먹은 옷을 스쳐 마찰음은 컸으나 통증은 없었다.


"나라고 뭐 남달랐겠어? 상상하듯 똑같아. 발가벗고 침대에서 서툴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씨름이었어.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왜 있잖아? 옷 벗는 순서라든가 혹은 애무. 여자는 어딜 애무해야 좋아하는지 따위들이 있을 거 아니야?"


"사람마다 다르지. 머릿속으로 아무리 한 방에 홍콩 가게 상상해도 막상 현실이 되면 싱겁기 짝이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 최대의 멋진 첫날 밤을 다들 꿈꾸라고, 자유니까."


"좀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없냐? 우리가 어디 미성년자냐? 알 거 다 알고 아직 모르는 것들은 어쩔 수 없지만."


"가령 이런 거? 침실로 들어가면 은은한 취침등이 침대 머리맡에서 나이 든 등대처럼 흐릿하고 남자는 약간 취해서 몹시 서두르는 몸짓으로 여자를 향해 달려들지만 단호한 거절 탓에 뒷걸음질 치면서 욕실로 들어가고. 어때 그다음도 얘기할까?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 남자는 대충 씻으면서 콧노래 부르고. 아마도 대단한 것을 성취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할지도 몰라. 남자가 욕실에서 나오면 여자가 들어가겠지? 아니면 여자가 먼저 샤워하거나. 암튼 샤워 끝낸 두 사람이 침대에서 황홀한 춤을 춘다? 멋대로 상상해. 하지만 현실은 아귀 맞지 않은 의자처럼 삐거덕거리지. 영화처럼 전혀 멋지지 않아. 온몸의 세포를 한꺼번에 일깨우는 떨림 같은 것은 없어. 몸은 악기가 아니야. 한바탕 씨름 뒤에 몰려오는 많은 생각 중에서 어느 것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해. 알 수 없는 무엇에게 등 떠밀렸다는 뒤늦은 판단조차도."


"좀 에로틱하게 설명 못 하냐? 어째 캘리포니아 그녀 냄새가 난다?"


김용덕은 투덜거렸다. 그러나 김선미를 포함한 우리는 어떤 쓸데없는 말로든 지금을 서둘러 위로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서로에게서 이미 넘겨짚고 있었다. 세상에 가벼운 슬픔이 없으니 가벼운 헛소리로 얼버무리고 싶은 거였다,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친구를 위해.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어. 어차피 우리 삶 한 부분을 악착같이 붙잡고 늘어질 테니까. 아무리 영정 속에서 이젠 굿바이 소리친다 해도."


"마음속에 찍힌 절대 지워지지 않는 문신 같은 것일지도…."


우리는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먹먹함을 어쩌지 못해 허둥지둥거리고 있었다. 길은 곧장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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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캘리포니아 사람들과 어깨 부딪치며 살아가는 한국인은 거의 없어.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야. 베트남 사람들은 특히 식당에서 함께 일하는 응옥찐은 되돌아갈 땅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 작은 모임이나 혹은 어떤 계기가 되었든 한국인을 만난 한국인은 금방 친해지고 공감대가 형성돼. 고국에서 멀어진 거리와 반비례하게 서로에게서 끈끈한 연결 고리를 금방 찾아내 형제처럼 지내려고 하지.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야. 차이가 있다면 중국 애들은 출신 지역을 따져. 워낙 땅덩어리가 넓으니까 그렇거니 여겼지만 사실은 아니었어. 중국 속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 많은 나라가 있어. 숨어 있지만 그들끼리는 금방 찾아내는 나라들. 미국은 이민으로 세워진 나라지만 중국은 정복과 탄압으로 만들어진 나라야. 암튼 응옥찐은 돌아갈 땅이 없다고 여겨 캘리포니아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캘리포니아 사람이 되려고 해.


아마도 할아버지의 영향 탓일까? 오랜 전쟁으로 끝내 무너진 사라져 버린 조국을 끝내 배신할 수 없다는 이상한 논리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베트남 이민 3세들은 대부분 캘리포니아 사람과 결혼해. 그들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수상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 늘봄식당에 처음 왔을 때 아저씨와 여주인을 만나 가졌던 이상하고 기묘한 거리감과 비교조차 할 수 없어.


응옥찐은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면서 덤덤해했어. 내가 보기에 둘은 제법 잘 어울렸어. 가끔 나를 데리러 오는 멜라니는 식당 가족들이 신기해서 온갖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오지만 응옥찐의 남자 친구는 하루도 빠짐없이 와서 공주 모시듯 에스코트했어.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호감 느끼는 걸 누가 말려? 응옥찐도 언니들과 다르게 남자 친구와 결혼할 거라고 내게 말했으니까. 그랬던 응옥찐인데 이별 앞에서 너무나 담담한 거야. 급기야 당당하기까지 했어.


너무나 궁금해서 물었지. 응옥찐은 단 한마디 했어. 그는 베트콩이야. 응옥찐의 단호함에 말문이 막혔어. 뭐 이런 개 풀 뜯어 먹는 말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나 역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응옥찐만큼은 아니지만 막연한 경계심을 가지고 여주인과 아저씨와 김철수를 대하고 있다는 생각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어. 북쪽 한국이 전쟁으로 남쪽 한국을 집어삼켰다면 남쪽 한국 출신으로 여주인을 어떻게 대했을까 미루어 짐작해보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야. 전쟁은 너무나 잔인해.


사람이 직립하면서부터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니까. 흔히 양심이라고 말하는 도덕심이나 종교, 인권, 이성 따위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 오로지 광기만이 있지. 그는 베트콩이야…,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어? 비록 베트콩에게 져서 나라를 잃었지만 자신들은 결코 베트콩은 되지 않겠다는 걸까? 우리도 그런 때가 있지 않았어?


일제강점기 때 나라를 잃었지만 일본인이 되지 않았던 사람들. 물론 재빨리 창씨개명하면서 일본인이 된 사람들도 많아. 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사람은 일본인이 되기를 거부했지.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유부남 샘은 몰라.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봐. 데이트라고 할 수 없지만 편지를 부치면서 간혹 몇 마디 주고받다가 점심도 같이 먹은 적이 있어. 일본인이니 한국인이니 하는 것들이 왜 중요하냐고 되물어.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이민의 나라, 역사가 짧은 나라, 캘리포니아 시선이야. 만일 네가 죽은 뒤에도 증손자가 너를 기억한다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물었어. 샘은 어깨 으쓱거리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어. 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아니야. 평범해. 그러니 날 기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샘의 말은 맞아.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면 증손자는 물론이고 손자도 기억하지 않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이민의 캘리포니아 사람이니까.


하지만 응옥찐은 달라. 베트콩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죽어서도 남아 결코 지을 수 없는 낙인이 된다는 걸. 일본인이 된 한국인들에게도 그런 낙인이 있잖아? 그러나 뉘앙스는 대단히 달라. 남쪽 한국에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혹은 시대가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에, 또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그랬으니까, 하는 식으로 변명하면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분위기이지만 응옥찐 가족들에게는 추호도 용서 없어. 사랑은 개인의 것이지만 명예는 가족의 것이니까, 핏줄의 것이니까.


이미 알고 있겠지만 몇몇 유명한 가족을 빼면 거의 모든 캘리포니아 사람들에게 족보는 없어. 그런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피 섞고 결국엔 캘리포니아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응옥찐 가족은 베트콩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걸까? 모르겠어. 응옥찐의 진짜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씩씩해. 어제는 두 블록 떨어진 자동차 정비소 직원 몇몇이 왔는데 빨간 머리 남자애가 마음에 든다며 농담까지 했으니까.


실제로 서빙하면서 은근슬쩍 꼬리까지 치는 걸 봤어. 그러나 그게 진짜 속마음일까 의구심이 들어.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물론 김선미는 알겠지만 여자는 남자와 달라, 엄청. 더구나 무엇이든 숨기는 재주는 거의 본능에 가까워, 약간의 개인차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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