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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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로 끌려가는 운명처럼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마지막 길목에 우리는 엉거주춤 망설이며 서 있는 거라고 다들 직감하고 있지만 소문난 비밀처럼 누구도 입 밖으로 뱉어내지 않았다. 최루탄과 지랄탄이 퍼붓는 교문의 전선(戰線)과 종암 경찰서의 비정상적인 왁자지껄과 케비넷의 불안한 화염병들을 아득한 옛날로 추억하는 날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명령 앞에서 발버둥이나 안간힘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수상하지 않아?"
장욱진은 골똘한 표정, 두 번째 비행기를 날리려다 말고 뒤돌아 고개까지 갸우뚱거렸다.
"교환학생은 보통 일 년 아니야? 여태 캘리포니아에 있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잖아?"
"돌아와도 벌써 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
"김선미, 너는 뭔가를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캘리포니아 그녀의 상실감을 붙잡고 결코 놓아주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버둥일지도 몰랐다. 김선미는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어서…, 그동안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자 세상 모든 것들이 빠르게 다르게 보였다. 남자를 받아들이는 여자가 비로소 되었다는 기쁨과 힘겨울 때 어깨 기대고 살아가며 생각해야 하는 기준이 새롭게 생긴다는 것은 확실히 설레고 가슴 벅찬 일이었다. 지금껏 살아왔던 모든 판단 근거를 뒤엎고 새로운 기준을 내세워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앞날은 흥미진진한 놀이터라고 살만하다고 여긴 터였다. 두 달 남짓 남은 결혼 준비가 빠듯했다. 마음이 땅에서 붕 떠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머릿속이 더없이 복잡한 정오 무렵이었다.
"오늘 출국하는데 만날 수 있을까? 도망치는 느낌이 싫어서."
김선미는 그녀의 전화를 받자마자 의정부 교도소 초입의 지붕 낮은 식당에서 마시던 낮술이 떠올랐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에 없지만 낡은 탁자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입으로 가져갔던 쓰디쓴 소주 맛에 미닫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한층 느슨해져 멋대로 기울어지는 햇살을 유심히 살피던 기억, 현실감이라곤 먼지만큼도 없는.
"아주 돌아온 거 아니었어? 언니?"
그녀의 청바지 옷차림이나 화장기 없는 얼굴에서 메이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김선미는 내심 놀라워하면서도 일정이 궁금한 터였다.
"언제 들어왔길래 나가면서 연락해? 미워지려고 하잖아?"
"한 달쯤? 다행히 학교에서 티오 하나를 따냈어. 몇 년 더 있을 거야. 어쩌면 그보다 더 있을지도."
그녀는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순례자처럼 직장인들이 카페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지냈어? 그동안?"
"편지 바깥을 묻는 거니? 사는 거야 여기나 거기나 똑같잖아?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결혼해. 두 달 뒤에."
"잘된 일이다, 선미야. 신혼여행 와라. 학생이라 돈은 없으니 많은 걸 기대하지 말고. 그런데 애들은 잘 지내? 군 생활 잘하고 있데?"
"면회도 안 가. 병장 달았다는데 고달플 일이 뭐 있겠어? 다시 캘리포니아로 가면 형들 못 만나겠네? 내년 가을 학기나 그다음 봄학기에 복학할 텐데."
"나 왔었다는 얘긴 하지 마. 게네들 의외로 잘 삐지니까. 자퇴했다는 것도."
"자퇴했어? 형들 상당히 섭섭해할 것 같은데?"
"양자택일 문제니까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난 영원한 문창반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런데 언니는 좋겠다. 나도 오로라 한번 보고 싶거든. 허쯔랑 언제 갈 건데?"
"모르겠어. 허쯔가 가자고 말만 몇 번 하더니 테일러랑 연애에 빠져서 정신이 없어."
"도망친다는 느낌은 무슨 말이야?"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냥 떠나버리면 나를 배신하는 느낌이 들어서. 다들 군대에 있으니 면회 가기에는 조금 번거롭고 성가시기도 해서 너라도 얼굴 보면 살아온 과거를 확인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사실 캘리포니아에서 살다 보면 정체성이 흔들려. 그걸 붙잡기 위해서 편지 쓰는지도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이렇게 얼굴 맞대고 얘기하는 게 정말 좋아."
"몇 시 비행기야?"
"이제 가야 해. 공항버스 타는 시간도 있고 미리 공항에 가서 대기해야 하니까."
"언제 또 봐?"
"신혼여행 오라니까. 의외로 금문교도 예뻐."
그녀와 김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공항버스 정거장은 바로 앞에 있었다. 김선미는 느닷없는 만남과 느닷없는 이별이 실감 나지 않았다. 무슨 말로 이별을 확인해야 하는지 떠오르는 말은 없었다. 저만치 공항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김선미는 와락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우리가 언니를 사랑하는 거 알지?"
"그래서 캘리포니아에서 버틸 수 있었고 앞으로도 버틸 수 있어. 결혼 생활 이쁘게 하고."
"고마워 언니. 편지할 거지?"
"그럼."
그녀가 올라탄 공항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김선미는 제자리에 서서 꽁무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의정부 교도소 초입 지붕 낮은 식당 미닫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 속으로 버스는 사라졌다. 꿈이라도 꾸는 듯 김선미는 몽롱함에 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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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세렝게티 얘기를 한 적이 있지? 포만감에 게을러진 수사자를 향해 걸어가는 일런드 한 마리, 절룩거리며. 그 너머로 노을 잔인하게 아름답게 피어나고.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위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지, 온갖 엉터리 수상한 거짓 논리로. 수사자에게 스스로 모가지 내민 일런드는 이미 죽었으니 거짓말은 명명백백한 목격담이 되고 사실이 되고 이윽고 대학 진학을 위해 달달 외워야 하는 진실이 되어버려.
그 무렵 서로 부대끼며 살았지만 내가 정말 허쯔를 알고 있었을까? 물론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만주 벌판 말 달리던 여진족의 잊혀진 몸 냄새를 느꼈던 건 허쯔를 위한 이해가 아니었어. 다큐를 봤어. 그랜드 캐니언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허쯔뿐만 아니었어. 매년 수십 명이 돌아오지 않아. 가보지 않았지만 그랜드 캐니언 앞에 서면 노르망디 코끼리 절벽 위에 선 잔느가 떠오를까?
하녀와 거침없이 끈적끈적 몸 섞는 남편 줄리앙을 보면서 잔느가 코끼리 절벽에서 자살 충동을 느꼈다기보다는 노르망디 그 푸른 바다와 절벽을 향해 부서지는 파도, 반짝이는 눈 부신 햇살, 더없이 맑고 높은 하늘을 비로소 온몸으로 받아들이면 삶이 얼마나 작고 헛된 것이며 부질없는 노동인지 찰나에 깨닫는 자신…, 대자연 앞에서 하녀에 대한 질투심이나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살아간다는 것과 존재한다는 것의 부질없음. 삶과 숱한 인연에 대한 그 어떤 거대한 논리와 변명도 한순간 티끌 먼지보다 가벼운 것들이 되어버리는 찰나…, 그 경지에 올라서서 자신을 바라보면 얼마나 초라해질까? 정말 허쯔는 그랜드 캐니언 절벽에 곧추서서 아주 작고 사소한 삶의 이유도 찾지 못한 것일까?
누구나 어느 순간 자신을 찾아오는 돈오(頓悟)의 순간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살아온 삶의 내력을 한꺼번에 송두리째 뒤집어 엎어버리는. 감수성 예민한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야. 테일러와 한바탕 뜨겁게 사랑 나누고 나서 샤워하러 가는 뒷모습을 몇 번 봤어. 손가락 끝 발가락들 작고 둥그스름한 어깨에 여전히 짜릿하고 달콤하고 쉽게 가라앉지 않는 흥분과 떨림이 남아 있지만 내가 본 것은 쓸쓸함이었어.
몸뚱이 여기저기에 땀과 타일러의 타액과 더불어 살갗 숨구멍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쓸쓸함, 포만감에 게을러진 떠돌이 수사자에게 모가지 내민 일런드의 쓸쓸함과 얼마나 다를까. 이제는 아무도 누구도 허쯔를 기억하지 않아. 기억 속에서조차 떠나가 버린 허쯔, 보고 싶은 허쯔. 김철수에게 허쯔를 얘기한 적이 있어. 수천 년 삶을 살아도 결코 허쯔를 이해할 수 없는 김철수는 빙그레 웃었어.
길들여진 사람은 길들여진 채로 일생을 살아야 해. 낮은 목소리로 확신에 차서 말했지. 울타리에 갇혀 사는 망아지는 초원에 풀어놔도 울타리로 돌아와야 비로소 안전과 평화를 느껴.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이 감시가 아니라 으레 당연한 눈길이라 여기면서 살아왔는데 그러한 믿음들이 한꺼번에 폭삭 주저앉아 흙먼지만 남는 경험은 너무나도 충격이어서 맞물리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일상이 한순간 멈춰버려. 생각의 톱니바퀴를 재배치하고 기름칠하고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데 쉽지 않아.
돌아가는 길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어. 감시받고 통제받고 명령이나 지시에 따라 하루하루 보내는 게 안정감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주는 오래된 습관은 떨쳐버리기 어려워. 잔인한 유혹이야. 하지만 생각의 톱니바퀴를 스스로 하고 싶은 데로 마음 내키는 데로 재배치할 수 있는 현실을 두 눈으로 온몸으로 확인한 이상 마음속 갈등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고 격렬해지고 치열해져. 김철수는 내 경험 바깥을 이야기하고 있었어.
어쩌면 허쯔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캘리포니아에 적응하기 몇 달 동안의 내 경험일지도 몰라,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마음의 갈등을 풀어놓고 있는지도 몰라. 드문드문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향수병도 그것 때문이었어.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과 생각의 톱니바퀴를 뜻대로 재배치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선택한 것이 그랜드 캐니언이었다는 결론은 확실히 실망스러웠어.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읽을 권리가 있으니 틀렸다고 말하기도 우습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어. 함흥에서 양강도 혜산까지의 길 위에서의 하루들을 너무나도 자세히 들어서 이해하고 공감하고 뼈저리게 고개 끄덕이는 일은 나에게도 김철수에게도 기만이야.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일정한 거리와 유일한 공간을 가지려고 하잖아, 본능적으로. 그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야.
누구나 사람들 속에서 뒤엉키며 더불어 살아가지만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잖아. 그 유혹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강철 같잖아. 얘기 들었어. 김용덕은 해병대 다녀와서 허쯔나 김철수를 아주 언짢게 여긴다며? 김철수의 말대로 표현한다면 생각의 톱니바퀴가 재배치된 거야. 그러니 뭐라 하지 마. 누구나 자신이 만든 판단의 감옥 속에서 살아…, 망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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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데미안이 말했잖아. 알은 세계다. 새는 알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 성장통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는 거야…. 시지프의 노동처럼 무한 반복하는 일상 속에서 성장통을 이겨내지 못하면 알 속에 갇혀. 그것이 세계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만족하면서 살아, 좁디좁은 알에 갇혀. 아저씨도 식당 여주인도 그렇고 김철수도 살아온 내력에 갇혀 알에 갇혀 살아.
아저씨네에서 더부살이할 때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마치 양강도 혜산 같다고 하지 않았니? 문화원 팀장이나 원장도 다를 바 없어.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혜산에 살고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서울에 사는 희한하고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눈치나마 챌 수 있을까? 알 속에 있으면 누구나 그것이 세계이니 불가능할 거야. 나이 먹는다는 건 대부분 사람에게 생각이 화석화된다는 것이기도 하잖아.
성장은 사춘기가 끝나면서 완성되었다고 믿는 것은 몸에만 국한되는 얘기야. 몸에 갇힌 정신은 미치거나 바보 중 하나가 되어버려. 멜라니가 올 시간이 거의 다 됐어. 멜라니가 몸에 잔뜩 묻혀오는 여러 남자의 체취는 제각각 다르지만 신기하게도 똑같아. 샤워하러 가는 허쯔의 알몸에서 풍기던 테일러의 타액과 냄새를 잊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아직도 기억 어느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거울 속에 결코 없는 인철수의 잔뜩 부풀어 오른 성난 메기 때문일까, 조셉의 검고 윤기 나는 메기와 조금 다른. 너희들도 졸업하면 비로소 느낄 거야. 학교가 좁디좁은 알이었다는 걸. 초인종 소리가 들려. 그럼 이만, 총총총….
"독서토론이 아니라 완전 편지 토론이네!"
김용덕은 투덜거렸다. 편지의 진정성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정신적 궤적이 우리가 겪을 수 없는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실감 나지 않았다. 나쁘게 얘기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뜬구름 잡는 짓거리를 우리는 저마다 지껄이고 있었다.
"마트료시카 얘기는 어때? 마트료시카 안에 또 마트료시카가 있어. 무한 반복이야. 뫼비우스 띠에서 알 수 있듯이 안과 밖을 구분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장욱진은 조금 화가 난 모양, 연거푸 막걸리를 목구멍 안으로 쏟아부었다. 막 출입구로 들어온 사내 두 명이 어깨에 잔뜩 쌓인 눈과 어둠을 털어내고 있었다. 김선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알을 깨고 나오면 또 알이 있는 거지. 멋진 비유야!"
김용덕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사내를 힐끔거렸다. 어딘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슬그머니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결국 관념 놀이야. 자기 안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양 은근슬쩍 뻐기는 짓이야. 구분하고 정렬하고 순서 맞춰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려는 자들은 뒤로 음흉한 속셈을 항상 감추고 있는 법이거든. 뭐, 그녀가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완전히 아니라고도 말 못 해. 하지만 삼척 해신당에 가보면 온통 남근뿐이야. 사는 게 씁쓸해지지.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아?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니까. 그런 경험을 배경으로 해서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들은 단순하지 않아."
김용덕은 장욱진의 장광설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연신 사내를 훔쳐보면서 고개 갸웃거렸다. 안 보인다고 할 수도 없고 보인다고도 할 수 없는 흐릿한 안갯속에 숨어 있는 기억 하나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이런 건 아닐까? 다르게 보기? 자신이 처한 형편에서 벗어나 다르게 보기. 물론 쉽지 않지. 하지만 훈련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면벽수행도 단순하게 말하면 자신 한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열 사람 백 사람 천 사람의 관점을 가지려는 훈련이니까."
"가만, 쉿!"
김용덕은 미간을 찡그리며 낮고 빠르게 미어캣처럼 경보음을 날렸다. 떠들던 장욱진은 입 다물면서 의아한 표정, 김선미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영풍문고에서 인철수 만날 때 녀석과 같이 있던 사내야."
김용덕은 낮고 은밀하게 말했다.
"이런 젠장 맞을! 알을 깨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는 거네?"
"그 알은 이미 깼으니까 감시하는 거지."
"이제 졸업인데 우리한테 무슨 정보가 있어? 빈털터리잖아?"
"타겟이 우리가 아니고 학교에서 보람찬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들렀을지도. 정보도 정보지만 우리 사이에 불신을 심어놓는 것도 저들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아니겠어? 상대를 서로 믿지 못 하게 하는 것만큼 활동을 제약하는 요소가 또 뭐가 있겠어?"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통 흙탕물을 만드니까. 프락치가 있는 이유지."
우리는 일제히 입 굳게 다물고 사내를 힐끔거리면서도 출입구를 쏘아보았다. 김선미는 오지 않았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어차피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한다는 비장한 목소리로 출사표 던진 김선미는 헤어진 신랑 놈과 무사히 다시 완전히 헤어질 수 있을까…, 장욱진은 뒤늦은 걱정에 쏟아지는 함박눈을 째려보았다. 발목까지 이미 쌓인 함박눈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