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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Sep 24. 2023

명언으로 남은 탈옥수

좀 오래된 얘기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제목도 있다. 조선의 과거 제도와 비교할 수 없으나 일맥상통하는 학벌 지상주의가 활개 치는 한국 사회에서 ‘공부의 신’이란 말도 있다. 출신성분 지상주의가 판치는 북한은 논외로 하자. 공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있다면 부와 권력은 세습된다는 점이다. 악착같이 흐르지 않으려고 한다. 웅덩이 고인물이 되어 가고 있다는 슬픈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 않는다.


물론 관변학자들은 자신들의 노력만큼 세뇌되지 않는 이들을 과감하게 무시하고 핍박한다. 이명박의 ‘4대 강 사업’을 떠올려보라. 전두환의 ‘평화의 댐’을 떠올려보라. 요즘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로 시끄럽다. 아무튼 얼마나 많은 관변학자가 권력에 빌붙어 하루살이처럼 눈앞에서 앵앵거렸던가. 대체로 그런 관변학자들은 이익에 능하고 대부분 <꺼삐딴 리>의 이인국처럼 ‘민족이나 국가 따위는 개나 줘버려’를 좌우명으로 삼는 핏줄이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이 어쩌고 걸핏하면 욕하지만, 뒤집으면 을사년 성공의 법칙이다.


어쩌다 우연으로 태어나, 게다가 한국에 태어나 성공을 바라는 이들은 너무 많다. 노력하고 안간힘도 쓴다. 수시로 권모술수도 동원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백번 천번 읽어도 모두 성공할 수 없다. 낮과 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일부다. 자연을 지배하는 순리는 잔인하지만 정확하다. 때가 되면 태어나고 때가 되면 죽는다. 바람과 나무, 바윗돌뿐만 아니라 사람마저도.


성공의 대열에서 이탈되고 지붕 낮은 집에 살더라도 삶이 실패한 건 아니다. 대체로 한국에서 성공이란 물질에 국한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잘 먹고 잘사는 기준의 척도가 기껏해야 물질에 갇혀 있다니! 슬프지 않은가. 아프지 않은가. 우연처럼 태어나 단 한 번 인생을 산다고 가정한다면 천재일우(千載一遇)임에도 기껏해야 물질에 삶이 갇혀 허둥지둥 사는 꼴을 날마다 급기야 꿈속에서조차 만나지 않던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언제나 항상 최선은 아니다. 옳은 것이 아니다. 대체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연결되어 있다. 맹자의 항산지항심(恒産之恒心)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보기엔 부족하다. 결이 조금 다르지만 탕핑주의(躺平主義)도 있다. 치졸하게 얘기하면 가질 수 없으니 소유하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자기 최면에 빠진 거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라. 역사상 어느 누가 가진 것을 죽음 이후에도 즐기는가.


물론 그러길 바라는 산 자의 욕심은 끊임없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투탕카멘의 미라, 진시황의 병마용.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이 신라 백제 왕릉 발굴에서 발견하는 숱한 화려함은 과연 죽은 자를 위한 것이었을까. 손바닥을 엎었다가 뒤집어봐도 그것은 산 자의 욕망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눈앞의 편리(便利)를 위해 삶을 괴롭힌다. 우리 대부분은. 월급 노예란 말이 있을 정도.


한국에 있는 성공의 법칙에 대한 시선이, 소위 부자에 대한 시선이 삐딱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권력과 결탁하거나 착취성장형(搾取成長型)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끊임없이 떠든다. 특히 우리 시대 괴벨스는 입에 거품까지 물고 ‘부자가 무슨 죄냐’ 오히려 되묻는다. 과정을 문제시하는데 결과를 가지고 떠든다. 교묘한 속임수다. 대화의 가장 화려한 기술은 질문에 답하는 게 아니라 되묻는 편법을 쓰는 것. 결론은 똑같다. ‘시기하지 마라. 못난 건 너희들이다. 실패한 건 너희들이다.’


괴벨스의 궤변은 꽤 먹히기도 하지만 침묵하는 몇몇도 있다. 삶에 대한 그들의 법칙과 기준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낙수효과(落水效果)를 경제 정책 기조로 삼을 정도니 안 보아도 비디오인 정치꾼도 있었고 앞으로도, 어쩌면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 먹다가 싫증 나서 버리는 음식은 있을지언정 쓰다가 지쳐 버리는 돈은 예로부터 없었다. 권력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하게 부자 중심으로 경제를 운용한다는 걸 알 수 있으니 대마는 죽지 않는다는 호언장담이 무색하지 않다.


하여 지강헌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뼈아픈 말을 내질렀다. 풍자나 해학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남을 명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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