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공동체의 와해

1950년대의 소설을 중심으로

by 이순직

전통적 공동체의식은 마을 단위의 자치규범과 가부장적 권위를 정점으로 하는 종적관계로 이루어지는데 그 와해요인을 자치규범의 파괴와 가부장적 권위의 몰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①


자치규범의 파괴와 가부장적 권위의 몰락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하나의 현상에 대한 두 측면의 해석일 수 있다. 마을 단위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종적 질서의 역전현상이 곧 공동체의식을 지탱하는 자치규범의 파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형상화의 양상에 따라 다음과 같이 살필 수 있다.


첫째, 공산 이데올로기의 극복 방안으로 상부상조하는 전통적 공동체의 삶의 원리를 제시하는 이범선의 「愁心歌」가 있다.


둘째,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와 가치체계의 해체를 다룬 정한숙의 「古家」가 있다.


셋째, 공산 이데올로기에 의한 역전적 종적 관계가 전통적인 가부장적 종적 관계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호철의 「빈 골짜기」가 있다.


넷째, 적대적 감정에서 비롯하는 이념도구적 폭력의 행사로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의 해체와 그 극복을 제시하는 이범선의 「학마을 사람들」이 있다. 이외에도 이호철의 「만조」가 있다.


「愁心歌」의 천식은 50년대 소설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인물형이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종합하는 리얼리즘의 정신이 다소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화자회상적 소급제시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지만 삼십 년이나 머슴생활을 했음에도 천식은 공산 이데올로기에 관심조차 없다. 따라서 이념도구적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 지주와 머슴의 관계를 착취와 피착취라는 경제구조적 인식이 신분제도의 불합리를 인식하는 선행조건이라면 천식의 경우 결말의 노랫말에서② 알 수 있듯이 공산당원들이 선전하는 이데올로기보다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다.


“가야디. 그럼 가야디. 걱정 마라 그까짓. 내 늙었어두 아직. 가야디. 가야디. 내 이렇게 업어다래두 넘겨줄라, 그까짓 삼팔선.”

(……)

“민아 걱정 마라. 그까짓 삼팔선.”


취한 민을 업고 “삼팔선”을 업어서라도 넘겨주겠다는 천식의 심성에서 전통적 공동체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식은 무려 삼 십 년 동안이나 머슴으로 일했지만 마을이 공산화되어도 계층대립적 입장을 갖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지주를 착취자로 인식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지주와 소작농‧머슴이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대립적 관계로 역전되는 현상에는 마을 외부의 이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노랫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념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천식을 통해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의 회복이 이데올로기 대립과 대결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전통적인 공동체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상부상조의 정신을 보여준다.


한때는 지주였으나 이젠 먹거리가 떨어져 옷가지로 쌀을 팔아오는 것을 눈치채고 “세 가마니는 꼭 준비해 주겠다”는 것이나 “민이 한 번도 그를 머슴이라 여겨 본 일이 없다”는 것에서 고아로 보이는 거지아이 천식을 거두어들인 민의 할아버지를 오로지 착취자로서 지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천식 또한 노동력을 빼앗기는 머슴으로만 볼 수 없는 여지가 생겨 공산 이데올로기의 극복 방법으로써 상부상조하는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의 회복을 놓고 있다.


「古家」는 家系型 단위에서 종갓집이라는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를 형상화한다. 태식으로 대표할 수 있는 봉건적 신분제도의 희생자들이 이념도구적 폭력으로 신분의 역전적 관계를 이끌어내지만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마을에서 종적을 감춘다. 마을의 질서와 가문의 신분적 체계도 원상태로 돌아오지만 전쟁이 휩쓸고 간 상처는 필재의 변화를 가져온다. 즉 필재는 가문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 종가제도라 믿고 종갓집을 팔아버림으로써 종가제도의 해체를 시도한다.


종파(宗派)를 나누고 문중(門中)을 따지고, 모든 이 나라의 비극은 종가를 중심해서 벌어진 것 같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 필재 자기요, 그 희생자가 태식이와 길녀인 것만 같았다.


봉건적인 권위와 가치체제가 세대 교체에 따른 순리적 해체를 밟지 않고 전쟁으로 말미암아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다. 전쟁은 폭력과 분열작용으로써 관계의 체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종갓집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권위와 가치관을 해체시켜 버리는 것이다.⑤


「빈 골짜기」는 인걸의 시선으로 농민위원장 미장이의 아내가 되어버린 간난이와의 화해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전통적 공동체의식의 회복을 제시한다. 농민위원장과 지주 인걸네의 갈등은 공산 이데올로기와 전통적 공동체의식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가부장적 종적관계가 공산 이데올로기에 의해 역전적 종적 관계로 바뀌어져 인걸네는 마을에서 쫓겨나고 마을이 수복되자 3년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인걸은 간난이를 만나자 “농민위원장 미장이의 각시가 되었으면 되었지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그녀는 인걸네 부엌데기이면서 인걸의 보모였다. 인걸네가 별안간 재산 몰수를 당하자 간난이는 “겁에 질린 채 형편 돌아가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듯이” 농민위원장인 미장이와 새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인걸은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망설이던 간난이는 며칠 뒤 차마 빈손으로 갈 수 없어 녹두알 한 자루를 들고 인걸네를 찾아간다. 할아버지는 대뜸 역정을 낸다.


이눔으 지집아(계집애), 어딜 들어온? 썩 물러가지 못하겐? 이눔으 지집아, 썩, 이눔으 지집아.”

(……)

“머이 어쨌단 말이에요? 간난이가 뭘 어쨌단 말이에요? 아바인 괘니…… 역정을 쓰세요…….”

(……)

인걸이는 마구 울면서 간난이에게 대들 듯이 빼락빼락 소리를 질렀다.

“우리두 다시…… 너랑 살이 살려구 돌아왔지, 우리가 나그네질 온 줄 아니? 나그네질 온 줄 알아? 누가 저런 거 받겠다디?”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난 것은 농민위원장 미장이 때문이라 할아버지는 역정을 내고 그것은 간난이 탓은 아니어서 인걸과 인걸이 어머니는 간난이를 받아들인다. “나그네질” 하러 돌아온 것이 아니기에 당연하다. 농민위원장 미장이를 이념적 사고를 가진 인물로 분류할 수 있다면 간난이는 비록 핏줄이 섞이진 않았으나 인걸네 식구이며⑦ 전통적 공동체의식을 가진 인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공동체의식 안에서 보편성을 가졌던 가부장적 종적 관계가 공산 이데올로기에 의한 역전적 종적 관계로의 치환된 이후에 가부장적 종적 관계의 회복과정을 다루고 있다.


「학마을 사람들」은 적대적 감정에서 비롯되는 이념도구적 폭력의 행사로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의 해체와 그 극복을 다루고 있다. 학마을은 전형적인 농촌이다. 학이 돌아오는 3월 초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학나무 밑에서 마을잔치가 벌어진다.


젊은이들이 일 년 중 유일하게 술을 먹을 수 있는 날이라는 데에서 마을 단위의 자치규범도 엿보인다. 이와 같은 마을잔치를 통해 공동체의식을 새롭게 한다. 공동체의식의 핵심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에 의한 종적 관계이다. 최고 연장자가 이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우가 마을로 돌아오면서 가부장적 질서가 공산 이데올로기에 의한 역전적 질서로 치환된다.


이제부터는 박동무가 이 부락의 인민 위원장이라고 했다. 인민 위원장이란 무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그게 바로 이 마을의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했다. 모를 일이었다. 학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은 남자가 이장 일을 보아야만 했고, 또 그 이장이 학마을의 제일 어른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바우는 마을의 제일 높은 사람 행세를 정말로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우는 가부장적 권위가 보편적 원리로 작용하는 공동체의식을 와해시키기 위해 공동체의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학을 죽임으로써 역전적 종적 관계를 확실히 한다. 이 사건은 서사적 사건의 핵심을 이룬다. 왜냐하면 바우의 폭력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이념도구적 폭력으로 분류할 수 있고 공동체의식의 와해를 주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말에서 애송나무를 통해 공동체의식의 회복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공동체의식의 와해에서는 공산이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써 상부상조하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삶의 원리를 제시하는 경우와 가족의 단위에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권위와 가치체계의 자발적 해체를 다룬 경우, 공산 이데올로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자 역전적 종적 질서가 전통적 가부장적 종적 질서로 회복되는 과정을 제시하는 경우와 문체의 시각화를 통해 서정성을 획득하면서 전통적인 삶의 원리인 가부장적 권위와 가치관이 와해되지만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경우 등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객관현실에 대한 대응양상이 각기 다르지만 공통점은 인습적 신분제도에 근거를 둔 전통적 공동체의식이나 가치체계의 해체가 세대교체에 따른 순리적이고 발전적인 형태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폭력과 적대적 감정에 뿌리를 둔 갈등과 증오의 폭력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인식에 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마을 단위의 전통적 공동체의식이 공산 이데올로기의 개입으로 와해되고 신분의 逆轉現狀이 일어나며 가부장적 권위 역시 해체된다. 또한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공산 이데올로기에 의한 계급대립적 갈등이 조장되며 서자를 비롯한 인습적인 신분제도가 해체되면서 공산이념에 따른 신분관이 성립된다.


이와 같은 공산 이념에 의거하는 사회문화적 변화에 대한 문학적 수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삶의 원리를 공산 이데올로기의 극복방안으로 제시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인습적 신분제도의 해체가 세대교체에 따른 순리적이고 발전적인 경로를 밟지 않고 전쟁의 영향으로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다.




① 농업은 노동력의 집중화를 절대적인 필요조건으로 하는 산업이다. 자연의 계절적 변화에 맞추어야 하는 농업의 특성에 맞추어 필요한 시기에 밀도 높은 노동력을 집중해야 하는데 이에 따라 대가족 제도나 혹은 품앗이 형태의 두레 등이 발달한다.


대가족 제도나 마을 단위의 두레는 血緣 및 地緣을 토대로 공동운명체라는 공동체의식을 전제로 성립한다. 공동체의식이 결여할 경우 노동력의 집중화가 불가능하여 농경활동 자체가 와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마다 조선시대 향촌의 자치규약인 鄕約과 유사한 자치규범이 있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자치규범은 농경활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전통적인 美風良俗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밑바탕이 된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마을 외적 힘에 의해 마을 단위의 자치규범은 파괴되거나 권위에 도전을 받는다. 또한 원시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 형편이어서 농경경험이 풍부한 연장자를 존중하는 가부장적 권위가 공동체의식에 보편적으로 자리한다.


가부장적 권위는 토지소유를 기반으로 하면서 자치규범의 질서를 수호한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마을 외부의 힘에 떠밀려 가부장적 권위는 해체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다. 특히 봉건적 신분에 근거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가부장적 종적 관계 및 질서는 공산 이데올로기에 의한 逆轉的 關係로 변질된다.


공산 이데올로기가 봉건적 신분제도의 타파와 토지의 공유제도를 옹호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념적 힘에 의한 신분의 逆轉現狀은 공동체의식의 와해를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는데 토지의 재분배와 맞물려 계급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계급갈등은 공산 이데올로기를 전제할 때 가능한 것으로 농경활동에 기반을 둔 전통적 공동체의식이 와해되고 그 자리에 공산 이데올로기가 들어서는 현상을 불러온다.


② 혼자 흥얼거리는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살며언은 한 백 년 사아는가아 꿈 같은 인생에에 말은 왜 많은고오.”


③ 이범선, 수심가, 「현대문학」, 1957, 2.


④ 정한숙, 고가, 「문학예술」, 1956. 7.


⑤ 이재선, 앞의 책, 102쪽.


⑥ 이호철, 빈 골짜기(원제, 白紙風景), 「문학예술」, 1956, 4.


⑦ 인걸네를 찾아갔을 때 간난이는 인걸이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⑧ 이범선,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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