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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Sep 15. 2019

우리가 모르는 서울 역사문화유산 이야기

서울의 역사 1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도읍지였던 한양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수도로 이어지는 서울은 곳곳에 조선 왕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서울의 모습이 크게 변하면서 역사적 공간은 생활공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오랜 문화유산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옛 모습이 새롭게 조명되는 요즘, 아름다운 서울의 문화유산을 따라 걷는다.   

  

조선 역대 왕과 왕비 모신 신성한 종묘

종로구에 있는 종묘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유교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의 예법에 따르면 국가의 도읍지에는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왕이 머무는 궁궐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그것이다.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가장 먼저 세운 곳이 종묘였다. 

외대문을 들어서서 고요한 숲이 우거진 신로를 따라 걷다 보면 신성한 공간인 정전을 만난다. 정전은 왕과 왕비가 승하 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신주을 모셔 놓은 건물이다. 19칸의 태실에 모두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를 비롯하여 왕 19명과 왕비 30명의 신주다. 조선의 왕은 모두 27명이지만 공덕이 있는 19명의 왕과 그의 왕비들만 정전에 봉안했다. 

정전은 가로길이가 101m나 된다. 동양의 목조건물 중 가장 길다. 정전 건물 앞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을 쌓아 만든 단이 있는데, 이 단을 ‘월대’라고 한다. 월대 위에 기둥을 세운 정전은 웅장하다. 종묘 제례 의식이 여기서 치러진다. 

정전은 장엄하고 아름답다. 길게 펼쳐진 묘정 월대는 안정을, 건물 앞에 줄지어 늘어선 기둥은 왕위의 영속을, 수평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지붕은 무한을 상징한다. 왕이 살았던 궁궐의 건축이 화려하다면 왕의 혼을 모신 종묘의 건축은 아무런 장식 없이 간결하다. 절제미에 압도당해 신성함마저 느껴진다.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에는 종묘가 있다”라고 극찬할 만큼 아름다운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에서 치르는 제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도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제례는 조선 왕조 500년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진다.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에서 제례 의식을 올린다.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

경복궁 서쪽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아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1395년 궁궐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했다. 종묘가 왕의 영혼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면 사직단은 백성들의 생사를 관장하는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직단에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또는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가 났을 때 제사를 지냈다. 

사극 드라마 속에서 흔히 들었던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라고 하는 말은 조선이 국가의 근본을 종묘와 사직에 두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종묘사직은 조선 왕조와 나라 자체를 의미했다. 

사직단에는 동쪽에 사단(社壇), 서쪽에 직단(稷壇)을 배치했는데, 나란히 놓여 있는 두 단의 모양은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약 1m이다. 단 주위에는 유(壝)라는 낮은 담을 둘렀다. 그 뒤로 사방에 4개의 신문(神門)을 설치하고 담을 둘렀다. 이중으로 담을 설치할 만큼 사직단은 신성한 곳이었다. 외부에는 제사 준비를 위한 부속 시설을 두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사가 폐지된 후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현재는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 남긴 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1980년대에 담장과 부속 시설 일부를 복원했고 지금도 여전히 복원사업은 진행 중이다. 

요즘 한창 사람들이 몰리는 경복궁역 서촌 옆에 있는 사직단을 지나치면서도 이곳에 조선 왕조의 뿌리들 둔 문화유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직공원은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 한적하기만 하다. 서울의 구구한 내력을 다 알 수는 없어도 도심 한복판을 산책하다 만나는 사직공원에서 문화유산의 가치를 이해하고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     


고종황제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환구단

중구 소공동에 있는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서울의 중심가에 있는 8각 지붕의 건물은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던 자리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환구단을 건설했다.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황궁, 덕수궁과 마주 보고 있다. 환구단은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폐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인 황궁우, 돌로 만든 북과 문이 있었다. 3개의 돌북, 석고에 새겨진 용무늬는 조선 후기 최고의 조각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만 남기고 환구단을 철거했다. 이듬해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현재는 조선호텔 경내에 황궁우와 석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 보존되어 있다.   

    

인왕산 국사당

종로구 무악동에 있는 국사당은 조선시대에 남산을 신처럼 여긴 목멱대왕(木覓大王)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섬세한 민속 벽화가 그려진 집들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볼 수 있는 사당은 목멱신사로도 불렸다.

인왕산 기슭에 있는 사당에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제사를 지낼 수 없었지만 나중에 굿당으로 변했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암반 위에 지어진 아담한 맞배집 국사당이 인왕산으로 옮겨진 이유는 인왕산이 명당이기도 하고 무속 신으로 모시고 있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당 안에는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무신도가 걸려 있다. 지금도 국사당에서는 내림굿, 치병 굿, 제수 굿 같은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 이름의 유래, 인왕산 선바위

국사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특이한 봉우리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풍화작용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패어있지만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린다. 독특한 모양의 바위에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도성을 쌓을 때 조선 개국 공신이었던 무학대사와 정도전에 얽힌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게 설계하려 했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다. 이에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번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했다. 태조는 정도전을 손을 들어줬다. 선바위를 도성 밖에 두게 했다. 무학대사는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로는 서울의 명칭이 유래된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서울 도성 안으로 품자고 하고 정도전은 서울 도성 밖에 두자고 설전을 벌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민하다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 정도전과 나섰다. 그때 선바위 안쪽에는 눈이 녹아 있고, 선바위에는 눈이 녹지 않아 선바위는 성 밖으로 남겨지게 됐다. 그런 이유로 서울 도성에 안과 밖이 생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눈 울타리,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서울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에 이런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독특한 형상의 바위의 모습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모습 같기도 하고, 부부가 나란히 머리를 기댄 것 같다고 부부 바위라고도 한다. 선바위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그 아래로 옮긴 후부터 국사당과 함께 무신(巫信)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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