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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Sep 15. 2019

문화예술 명소 이야기 1

번화한 도시 서울에는 예술가의 흔적이 담긴 역사적인 장소가 많다. 빌딩 숲에 가려진 동네 작은 골목에는 예술가들의 혼이 담긴 다양한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 오래전부터 알던 길이지만 이 길이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소박한 풍경 속에 풍성한 이야기가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의 골목 뒤안길,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가득한 길을 걷는다.


철강단지로 모여든 예술가문래 예술촌 

철강산업의 메카였던 영등포구 문래동은 일제강점기 방적 공장이 들어서면서 방적기계 '물레'의 이름을 따서 문래동이라 불렀다. 공장이 많아 이 지역의 대기오염이 심각해지자 철공소를 하나둘 외곽으로 옮겼고 문을 닫은 공장의 빈자리에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철공소 사이사이에 공방과 카페가 들어섰다. 미로를 탐험하듯 들어선 좁은 골목 담장엔 화려한 벽화가 장식되어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철공소 골목의 낮에는 기계가 돌아가고 용접 불꽃이 튀고 있지만 공장 문을 닫는 저녁과 주말에는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셔터가 내려지면 셔터마다 그려진 그림이 예술작품처럼 펼쳐지고 골목은 갤러리가 된다. 철강 단지답게 철을 소재로 한 작품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골목의 작은 카페에서는 작가들의 개인전이 열리기도 한다. 철공과 예술의 독특한 만남, 문래창작촌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역사문화 마을성북로

수려한 북악산 자락에 있는 성북동은 한양도성의 북쪽 마을이라 해서 이름 붙여진 마을이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 역을 나오면 산을 오르는 언덕길까지 예술가의 흔적이 이어진다. 가장 먼저 만난 곳은 ‘최순우 옛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4대 관장이자 미술사학자인 혜곡 최순우 선생이 1976년부터 생을 마친 1984년까지 살던 집이다.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 초에 지어진 한옥으로 시민들의 후원과 기증으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시민문화유산 1호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최순우 선생의 옛집에는 선생의 유품, 친필 원고 등을 전시하고 있다. 


고즈넉한 한옥을 나와 산을 향해 걸어가면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이 나온다.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에 해외로 유출될 위기에 있는 한국 문화유산을 수집했다. 이들을 보관하고자 한국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에게 설계를 맡겨 1938년 미술관을 완공했다. 아름다운 문화재를 지키는 건물이라는 뜻의 보화각(保華閣)에는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해례본>을 비롯해 수많은 국보와 보물을 소장하고 있다.


성북동 길을 다시 따라간다.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한옥 문에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통찻집이 나온다. 소설가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 월북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벼루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소설가의 의지를 담아 ‘수연산방’이라 이름 지은 곳에서 <달밤>, <돌다리>, <가마귀>, <황진이>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성북동 언덕의 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만해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이 있다.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님의 침묵>의 시인이며 승려였던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11년을 머물렀다. 전체 규모가 5칸에 불과한 작고 소박한 집은 한옥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북향집이다. “남향하면 바로 돌집(조선총독부)을 바라보는 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 덥더라도 북향 하는 게 낫겠다.”라며 북쪽으로 향한 기와집을 지었다. 

한용운의 서재였던 방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한 불교 설화 심우도에서 따온 말이다. 만해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는 지붕까지 가지를 드리우며 진한 향기를 뿌린다. 부엌을 들여다보니 단출하기 그지없는 부뚜막에서 그의 삶이 그려진다. 심우장 작은 대문을 나와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면 달동네 북정마을과 이어진다. 작은 슈퍼 앞 정류장에서 마을버스 뒤꽁무니가 아련하게 사라진다.

 

예술인의 마을 원서동길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이어진 원서동은 일제강점기 왕이 머물렀던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하고 그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의 유래는 가슴 아픈 일이나 백 년 가까이 이름 불린 원서동에는 화가와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전통 공방과 붉은 벽돌로 지은 미술관을 따라 걷다 보면 길모퉁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고희동의 흔적을 만난다. 1915년, 그가 그린 <부채를 든 자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유화작품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희동 선생이 살았던 가옥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 직접 설계해서 지은 목조 한옥이다. 이 집에서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치면서 41년을 거주했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당대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한 공간이다. 

한옥은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다. 사랑방 옆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실을 따로 두었다. 안채와 사랑채를 오가기 편하도록 긴 복도를 이어 창을 내었다. 한옥을 둘러싼 붉은 벽돌담과 푸른 철대문이 인상적이다. 개량 한옥은 일제강점기 한옥 살림집의 변화를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근대건축문화유산이다. 


고희동 가옥 대문을 나서 원서동길 골목 끝에 다다르면 궁궐과 연결된 작은 빨래터가 나온다. 물이 많이 흐르는 곳이라 빨래하기 좋아 궁궐 안에서도, 궁궐 밖 백성들도 이 빨래터를 이용했다고 한다. 궁궐의 높은 담 아래로 흐르는 물줄기로 빨래를 하며 아낙네들이 풀어냈을 수많은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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