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ep 15. 2019
자문밖 이야기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읍지였던 한양에 도성을 쌓을 때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세웠는데 이 문을 경계로 도성 안과 도성 밖으로 나뉜다. 서울의 역사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안에는 조선왕조 궁궐의 문화유산이 남아있고, 도성 밖에는 수려한 풍경을 따라 별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도성 밖의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따라 가본다.
자문밖 이야기
창의문은 한양도성 사소문의 북문이다. 숲과 계곡이 울창한 골짜기에 자줏빛 노을, 자하(紫霞)가 아름답게 내려앉아 자하문이란 별칭을 얻었다. 자하문은 북한 쪽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조선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문을 닫고 통행이 금지됐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장소다.
자하문 밖의 종로구 구기동, 신영동, 부암동, 평창동, 홍지동을 한데 아울러 ‘자문밖’이라 부른다. 자문밖은 북한산, 인왕산, 북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풍경이 수려하다. 그런 이유로 아름다운 별서가 많이 지어졌고, 지금은 박물관, 미술관 같은 문화·예술시설이 모여 있다.
안평대군 무계정사 터, 그곳에 새로 지은 무계원
부암동에 있는 무계정사는 조선시대 세종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 이용이 세운 별장이다.
“그 어느 밤 꿈에 춘산을 거닐더니 무성한 숲 속에서 도원을 찾았구나... 의당 전생에는 나의 산수였으리니 그대, 하늘이 숨긴 곳 훔쳤다 웃지 말기를.” 안평대군이 읊었다고 하는 문장처럼, 그는 꿈속에서 본 무릉도원이 무계정사의 풍경과 같아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안견은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안평대군은 이곳에 정자를 지어 시를 읊으며 활을 쏘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안평대군의 글씨로 추정되는 ‘무계동’이라고 적힌 바위, 무계정사 터만 남아있다.
부암동 ‘무계정사길’을 따라 올라가면 멋스러운 한옥이 있다.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한옥 오진암을 옮겨온 것인데, 오진암은 원래 조선왕조의 마지막 내시이자 서화가였던 이병직의 집이었다. 이후 오진암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으로 이름났다. 서울시 등록 음식점 제1호이자 1910년대 초 대표적인 상업용 한옥으로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불리며 군사독재 시절 밀실 정치의 단면을 보여 주는 곳이었다. 1972년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로 이끈 7·4 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오진암 자리에 관광호텔이 들어서면서 한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종로구는 호텔사업자와 오진암의 건물을 이전하기로 뜻을 모으고 무계정사 옛터 근처로 옮겼다. 종로 구 청진동, 조선시대 시전행랑 건물이 있던 자리에서 발굴한 돌로 석축을 쌓았다. 옛모습은 사라졌으나 고풍스러운 한옥은 ‘무계원’이라는 전통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석파정
서울의 모습이 변하면서 조선 시대의 많은 정자들이 사라졌지만 부암동에 있는 석파정은 옛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이었던 김흥근의 별서였다. 세 갈래의 내(川)가 합쳐져 흐르는 곳이라 바위에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삼계동정사’로 불렀다.
고종이 즉위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 별서는 그의 소유가 되었다. 별서의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흥선대원군이 탐낼만큼 석파정과 주변 풍경은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수려하다. 고종은 이곳을 행전이나 행궁 시 임시 거처로 사용하며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했고, 흥선대원군은 사랑채에서 대신들과 국사를 논의하기도 했다.
사랑채 옆에는 굴곡진 역사를 견뎌낸 노송이 넓은 가지를 드리운다. 그 앞에는 계곡이 낮게 흐르고 넓은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너럭바위 위에 얹어 놓은 듯 포개진 커다란 바위에는 ‘소수운렴암(巢水雲簾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 그대로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별서 뒤의 언덕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운치 있다.
석파정은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중국 청나라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다. 자연을 벗 삼은 석파정 정원 내에는 고풍스러운 별서가 있고, 중국풍의 정자가 있다. ‘유수성중 관풍루’라는 중국풍의 정자는 청나라의 문살 문양과 화강암으로 바닥을 마감한 이국적이고 독특한 건축물이다.
정원을 둘러싼 인왕산 자락에 펼쳐진 바위산은 코끼리 형상을 닮아 코끼리 바위라고도 한다. 영험한 기운이 풍기는 조각한 듯한 바위는 소원을 이뤄주는 바위로 알려졌다. 아이가 없던 노부부가 이 바위 앞에서 득남을 빌어 소원을 이루었고, 아들의 시험 합격을 빌었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진 이야기가 전해진다.
광해군 폐위를 논하며 칼을 씻은 세검정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세검정은 홍제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해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이곳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광해군 15년,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이었던 이귀, 김류 등이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논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세검정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영조 때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겨 도성을 지키고 북한산성을 수비하면서 군사들이 휴식할 목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연산군 때 유흥을 위해 이 정자를 지었다고도 한다. 어느 이야기도 명확하지 않지만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이유는 그만큼 이 정자가 아름다운 풍광 속에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부근에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가 있어서 역대 왕들의 실록 편찬이 끝나면 이곳에서 세초 작업을 했다고 한다. 세초란 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사초(史草)와 원고들을 없애는 일로 종이에 먹물로 쓴 원고를 물에 씻어 글씨는 지워버리고 종이는 재활용했다.
이렇게 많은 사연을 간직한 세검정은 1941년 주변에 있던 종이공장의 화재로 주춧돌 하나만 남기고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겸재 정선이 부채에 그린 <선면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했다. 겸재의 그림처럼 장마철이면 물 구경을 할 만큼 세차게 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풍경은 도심 속에 묻혀 빌라가 들어선 길가에 정자 한 채만 외로이 홀로 서있다.
전란 겪지 않은 홍지문과 연회 베푼 탕춘대성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탕춘대성은 1719년(숙종 45)에 쌓은 것으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4km의 산성이다. 성의 이름은 연산군 때 세검정 동편 봉우리에 탕춘대(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를 쌓고 연회를 베풀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성안에 연무장인 연융대를 만들고 군량창고 등을 갖추었다. 탕춘대성은 한양의 북쪽을 방어했다.
홍지문은 한양의 북쪽에 있는 문이어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했으나 숙종이 친필로 쓴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달면서 정식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을 가로지르는 수문(水門)에 다섯 개의 칸을 틀어 오간수대문을 만들었다. 한 번도 전란을 겪지 않은 홍지문은 1921년 홍수로 홍지문과 오간수대문이 무너졌다.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다시 지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