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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솔 Sep 04. 2018

가을이 오면, 이곳

성북동의 고즈넉한 찻집, 수연산방

서울 성곽 북쪽의 동네, 성북동에는 가보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이 여럿 있다. 봄과 가을, 해마다 두 번 전시회를 여는 간송미술관을 찾을 때면 가까이에 있는 길상사, 심우장(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난 곳), 최순우 옛집을 둘러봐야 한다. 그리고 그곳들을 오며 가며, 고요하고 아늑한 수연산방에 들른다. 소설가 상허 이태준의 고택으로 지금은 그의 큰 누님의 외손녀(외종손녀)가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1925년 단편 <오몽녀>로 등단해 단편소설 작가로 이름을 알린 이태준은 1933년 김기림, 이효석, 정지용과 함께 구인회의 창립 멤버로 순수 문예운동을 주도했고, 30년대 후반에는 <문장>지의 편집을 맡았다. 1930년대에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며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란 평가를 받았다.

1946년 7월, 이태준의 돌연한 월북은 그를 아는 문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사상적으로 변모한 그는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2개월 동안 소련을 돌아보고 와 <쏘련기행>을 남겼다. 그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나 1956년 남로당과 소련계 인사들이 제거되는 과정에서 숙청당했다. 그뒤 그의 행적은 드문드문 남아있다. 함흥의 콘크리트 블록 공장에서 노동자로 배치되기도 했던 그는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마지막으로 봤다는 소식만이 전해질 뿐, 그가 세상을 떠난 시기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남한에서 그는 잊혀진 작가였다. 월북·재북 작가의 작품은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들의 이름이 다시 알려지긴 시작한 건 1988년의 해금조치 이후였다. 정지용, 백석, 한설야, 오장환, 이태준의 글들이 다시 출간되고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현대문학사는 다시 쓰여졌다.

돌담과 나무들 사이로 수연산방의 일각문(대문간이 따로 없이 좌우에 기둥을 하나씩 세우고 문짝을 단 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태준은 이곳에서 월북하기 전까지 지내며 단편소설을 남겼다. 상허는 왜 이곳을 떠나 북한으로 갔을까. 그가 보기에 북한과 남한은 그의 소설 <먼지>(1950)에서처럼 이북은 착취가 사라진 낙원이고, 이남은 인민들이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지옥이었을까. 그는 마지막까지 무엇을 보았을까.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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