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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섭식장애입니다. (2)

생존 수단으로서의 섭식장애

by 리솜

아무리 잘게 씹어 삼켜도 조금이라도 질감이 느껴지면 곧장 속을 긁듯 반응해 오던 식도염이 잦아들었다. 요즘엔 컨디션에 따라 디카페인 커피도 간혹 마시고,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도 먹는다. 그러다가도 이내 스트레스가 심해지거나 힘든 일이 생기게 되면 증상은 심해졌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에 비해선 비교적 자유롭게 음식을 섭취하고 있다.


수년동안 나에게 식사란 통제 수단이었을까, 그저 음식이었을까.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손으로 내 입에 들어가는 무엇들을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내겐 숨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예기치 못한 트라우마, 그로 인해 변화되어 버린 삶을 어떻게든 지탱하고자 무엇이라도 붙잡아야만 했을지도.


감정을 토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처럼, 음식물을 게워내는 것조차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많이 먹고 체하면 결국엔 먹은 것들을 토해 내야 하니까. 애써 욱여넣은 마음들을 식도에서부터 입으로, 눈으로 결단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무의식이 식사량 조절이라는 생존 수단을 만들어 낸 건 아니었을까.


절식과 소식 그 어딘가의 사이에서 어느덧 벌써 약 십오 년을 머물렀다. 적게 먹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안에서 어쩌면 난, 누군가가 내게 내어주는 호의 깃든 음식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삶의 주도권이 아직 스스로에게 있다고 매일 확증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치유의 시작은 '문제라고 여겼던' 혹은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던' 모습이 실은 '지극히 생존 수단'으로서 작동해 왔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부터라고 믿는다. 물론 그 상태를 면밀히 알아준다고 해서 삶이 곧바로 변화되는 건 아니다. 다만,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현재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럴 수밖에 없어 왔던 긴 세월을 이해하고 바라보며 때로 안아주는 일이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스스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이따금 나 자신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버리고 싶고 다치게 하고 싶던 욕구가 더디게나마 하루 몇 분, 몇 시간씩만이라도 점차 줄어들어 가기 시작한다는 것만큼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음식은 죄가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이 유희인지 두려움인지에 따라 내 몸을 사랑하게 되기도, 혹은 증오하며 미워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여전히 하루를 살아내는 건 어렵고 늘 부딪히며 다치고 굴러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그저 살아있으니 되었다. 뼈저린 삶의 질곡들 사이로 그렇게라도 하여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고 있어서, 대견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날 필사적으로 구하고 있었다. 그 절박함을 이제야 아주 조금씩 알 것 같다.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아프게 할 수밖에 없던 날들을 찾아가 여려서 강한 척하던 미숙한 아이들을 끝끝내 양 두 손이 벅차도록 안아주고 싶다. 매일, 나를 지켜줘서 고마웠다고. 덕분에 긴 시간을 끝끝내 살아, 이제야 내가 너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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