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쉬 걸, 2015>
저의 집에서는 매 주 작은 영화관이 오픈합니다.
저와 제 가족의 은밀한 곳이죠.
상영시간은 '마음이 내킬 때'이고 팝콘과 콜라 대신 커다란 B사의 아이스크림이 대신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상영 영화도 항상 달라지는군요.
어제는 이 오래되고 은밀한 영화관에서 톰 후퍼 감독의 신작, 대니쉬 걸이 상영되었습니다.
리뷰를 시작하기 전.
얼마 전 누군가의 대니쉬 걸 리뷰에서 리뷰가 시작되기 전, "단지 이 영화가 소수자를 이야기했다고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보지 말아라" 라고 하는 문구를 보았습니다.
저는 그 문구를 보고 의아하더군요.
일단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로 여성과 남성의 신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또한 어른들도 이해하기 힘든 벅찬 인간의 감정과 고뇌를 담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가 아닌 이상 이 영화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단지 이 영화가 소수자를 다루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러라고 하지요. 또한 반대로, 이 영화가 소수자에 대해 다루었다고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그러라고 하지요. 사람은 모두가 영화 속에서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다르니까요. 그저 실화 이기전, 영화는 영화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제 무지한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이 그 어떤 사람과 다르다고 하여 그 사람의 의견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1920년대, 덴마크 코펜하겐에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화가 에이나와 또 재능 충만한 초상화 화가인 그의 아내, 게르다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을 것 같이 너무도 서로를 사랑하는 그들이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릴리라는 여자는 부부를 힘들게 합니다.
릴리, 그녀는 사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이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는데요. 어느 날, 진담 반 농담반으로 여장을 하고 캔버스 앞에 서 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받은 에이나가 일생에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고 이 느낌은 대체 무엇인지 영화 속에서 그는 서서히 자신 안에 있는 진짜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정신병자 일까요? 게이 일까요? 성 도착증 환자일까요? 영화 속에서 에이나가 답답한 마음에 찾아간 의사들은 모두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고 그리하여 상처만 받고 돌아서는 에이나에게 그의 아내 게르다는 마지막으로 딱 한 사람에게 가 볼 것을 권합니다.
과연 그 의사는 릴리가 (새로운 에이나)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너무나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다가 한 없이 다정한 남편이 여자로서의 삶을 택 한다고 한다면, 아마 그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큰 고통 이겠지요.
남편과 같은 직업을 갖고 그의 성공 뒤에 감추어진 그림자 안에 가려져 살고 있던 재능 있는 화가 게르다는 변해가는 자신의 남편 에이나를 곁에서 바라보며 혼란스러워 하지만, 곧 그런 그를 받아들이고 남편을 향한 사랑, 또는 우정을 끝까지 지키는데요. 현실을 받아 드리기 전 우연히 여장한 남편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또 그 그림 글이 잘 팔리는 것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속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강인하고 떳떳한 그녀 또한, 한 남자 옆에서 평생을 보호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그저 한 여자였으니까요.
사랑은 그 형태가 변해도 온전할 수 있을까요?
보는 내내 너무도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이 영화 속에 담긴 실화를 보고 나면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모습이던 끝까지 곁을 지키는 게르다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사람은 변한다고 하여도 어쩌면 사랑은 끝까지 온전할 수 있겠다.
릴리로 살아가는 삶을 택한 후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 릴리에게 그림을 그릴 것을 권하는 게르다. 그런 그녀에게 릴리는 자신은 화가보다 여자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하는데요. 그러자 게르다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받아칩니다.
"있잖아. 여자와 화가 모두 다 하는 사람도 있어"
소소한 영화관에 올려지는 영화들은 모두 작가가 추천하고 싶은 영화들이며 모든 글은 작가의 극히 주관적인 소견임을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