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그리 바쁘던 자잘한 일들이 마무리됐다. 그래 이제 조금 쉬어가자. 가장 편안한 원피스와 치마바지, 두끼분량의 식량, 간식거리등을 챙기자.
그이는 낚시터에 자주간다. 햇수로 25년여 사반세기의 세월이다. 말 그대로 ‘강·태·공’이다. 강씨요.0태요.꽁이다. 낚은 물고기는 살림망에 넣지도 않고 놔 준다. 그리곤 자랑한다. 오늘 스물너댓마리.
처음 시작은 마음다스리기였다. 당신 아버님의 병환이 깊어가고 거기에 부인이 말 안하는 병이 들었다. 병원에 들르고 아이들을 챙기고 마누라에게 진심으로 말을 건네며 집안에 최선을 다한 후 주말이면 저수지에 머물렀다.
나는 그이를 따라 가끔 낚시터에 온다. 낚시대를 드리운 자연인 옆 의자에 걸터앉아 책을 꺼내든다. 집에서도 이렇게 둘이지만 이곳의 초연함은 단연 으뜸이다. 5도 2촌의 생활이다. 그이의 그 시절을 본다. 해질녁 노을과 바람. 그 후 부인은 더 명랑해지고 긍정적이며 살가운 사람이 되었다.
친구가 퇴임의 소회를 말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했다.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혼자서 느끼는 강도는 그 이상이었다. 정년해 보니 ‘모든게 부진아‘요, 비교적 여건이 좋은 퇴직 후의 생활이 보장되었지만 심리적으로 느끼는 뒤처짐을 감당하기가 힘들다고. 공부를 해 보자고 생각해서 부지런을 떨지만 문제는 체력, 오랜 시간 조퇴 한번 없이 정신적으로 버텨온 시간이 무너져내리고 병원예약을 무시로 해야하고 무엇보다 감기만 걸려도 중이염이라고.“
지금은 첫 번째 화두가 건강이다. ’건강에 신경써야 한다.‘는 충고는 소중하다. 급선무.
나 또한 다 지나간 옛 일이 생각난다. 하지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다. 지금 이리 앉아 있는 여유가 감회롭다.
나는 어릴적부터 서울로 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내 삶에 온전히 그 분들의 무게도 얹어졌다. 엄마가 다섯명의 딸들을 고향에 두고 서울로 가실 무렵 막내동생은 두돌이 지나지 않은때였다. 온전히 동생들과 함께 해야했고 부모님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끊임없이 집안일을 해야했다. 사실상의 가장노릇을 했다. 돈을 벌면서부터는 네명의 동생의 학비를 대야했다. 할머니의 가용을 대야했다. 말단공무원의 봉급이 요긴하게 쓰였다. 네명의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서울 엄마네로 차례로 올라갔다. 시골에서 내 역할이 마무리 된 후 나는 서울로 올라 올 기회가 왔고 결혼을 했다. 결혼후 시댁은 형편이 괜찮아서 둘은 착실히 적금을 했다. 결혼후 친정의 대소사에 신랑이 다 감당했다. 경비와 품을 온전히 할애하는 참으로 헌신적인 사위였다. 하지만 그 후 결정적으로 아버지는 신랑에게 어려움을 안겨준 일이 있었다.
우리신랑은 ‘나는 처가에서 뭐라해도 상관없다. 너만 있으면 된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고 나를 대하는것에도 변함이 없었다. 나는 판단력이 빠르고 나름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생각을 끝까지, 아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론은 늘 단순하다. 나는 신랑을 선택했다. 아득하고 슬픈 바람이 미지근하게 불어왔고 계속해서 불어왔다.
채움은 인생에서 소중하고 값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집중하면 비움의 순간이 와도 비워야하는 지혜를 얻기가 힘들다. 나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비우고 지금의 삶을 기억하고자 한다.
모든 시간을 이겨낸 후 지금은 그야말로 망중한이다. 우여곡절로 잘 살아낸 지금을 여유있게 관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