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정약용의 얼이 서린 곳
강진은 정약용의 정기가 서린 고장이다. 관공서의 프로그램이나 길거리 안내판 그리고 음식점의 현판 하나까지 모두는 조선 최대의 실학자를 모태로 기억하는 소도시이다.
강진의 여러갈래 여행 중 다산 실학의 4대 성지인 사의재, 보은산방, 이학래의 집, 다산초당을 돌아보는 방법도 좋다.
<사의재>
다산 정약용(1760-1836)은 내리 18년(1801-1818)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다산이 처음 도착해서부터 만 4년간 기거하던 역사 공간이다. 임금의 신임을 받다가 정조가 승하하자 종교 신앙 문제의 표면적 이유와 정쟁 제거에 희생되어 정약전과 함께 머나먼 귀양길에 오른다. 큰형은 흑산도로 그리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임금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총신이 낯선 곳에 도착해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처음 의지한 곳이 사의재이다. 사의재는 조선조 정신의 상징이자 실학의 정점이었던 고독한 선각자가 유배 생활을 시작했던 슬픈 곳이지만 다산 실학의 장엄한 첫 성지이다.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지키라“는 의미로 자신의 거처를 사의재라 칭하고 학문에 정진한 곳이다.
영락없는 주막이지만 1801년 겨울 맨 처음 오갈 데 없는 다산을 받아들여 조선 최고의 사상가로 거듭나게 한 주모의 집이기도 하다. 대단한 여인, 후환이 두려워 모두 문전 박대하는 현실에서 무얼 보고 받아들였을까? 유배 초기 술로써 시름을 달래던 석학을 알아보고 그를 채근하여 후학을 기르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다잡고 지극정성을 다한 이 모녀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다산과 실학사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의 투박한, 혜안의 주모 또한 길이 기릴만한 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8년을 유배지에서 버텨낼 수 있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하여 정신적 기반을 다잡아 학문연구에 정진하게 한 여인이다.
한 가지 의문, 그동안 주모는 업을 폐하지 않았을진대 들고 나는 주막에서 학문연구가 가능했을지가 의문이다.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
백련사 주지 혜장법사의 도움으로 보은산방에 거처를 마련하고 혜장법사와 학문적 교류를 돈독히 나누던 곳이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오가는 산길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제자 이학래의 집 조성 터>
산중의 스승을 안타깝게 여겨 다산을 집으로 모셔와 후학을 가르치는 데 더욱 매진하게 한 곳이다.
제자가 스승을 집으로 모신다는 건 흥미가 가는 일이다. 나라면 아들의 스승을 집으로 모셔올 수 있을까. 강진에 도착 후 가장 먼저 둘러보고자 한 곳이다. 안내지에도 나와 있지 않고 조성 터라는 명칭만 발견했다. 어림잡아 지도를 내비게이션에 대조하며 찾아간 곳은 철새도래지 상류쯤이었다. 집, 터.
‘이학래길’ 중간쯤 멍석에 앉아 농작물을 손질하던 어른께 물었더니 ’애초에 잘못됐다‘는 말만 계속했다. 차에서 내려 이학래길을 따라 계속 걷다가 나이 드신 남자 어르신께 다시 물었다. ‘이학래 집’을 아시나요. ‘저만치 주차장 터요’ 그 터에 오래된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를 이학래가 심은 나무라 하여 집을 복원하려 했으나 중간에 나무가 고사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하셨다.
<다산초당>
이듬해, 그의 제자들과 외가의 윤 씨들이 탐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귤동 마을 만덕산 자락에 다산초당을 마련한다. 다산초당은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 년 동안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였던 곳이다.
강진에 유배되어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가 풀리기까지 10여 년 동안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 등을 가르치고 저술하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다산 유배길은 그가 다니던 길, 즉 강진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 보은산 보은산방까지 다산의 사상이 녹아있는 길이다.
국내 소도시들을 소개하는 로컬 프로젝터 님들의 소개 글이 넘쳐나는 강진에 나만의 시각으로 선택하고 돌아보는 기회이다. 이학래의 집이 아직 조성터인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