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이야기
20대 이야기
1
동하는 퇴근시간만 되면 괴로웠다. 천신만고 끝에 입사한 회사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 다녀와서 3년 만이다. 그래도 동하는 나은 편이다. 2~3년 취업에 도전하다 결국 포기하고 공무원 고시 쪽으로 옮긴 친구들도 많다. 더군다나 동하처럼 첫 직장생활을 정규직원으로 출발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동하는 다행히 그럴듯한 회사에 정규직원으로 채용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의 양이었다. 출근하면 책상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그러나 오전 중에 다 끝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거의 일이 없어 이것저것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5시부터 일이 쌓이기 시작한다. 유럽 쪽에서 들어오는 서류들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동하가 맡은 일의 담당자들은 6개월 이상 버티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규직원에 다른 부서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남들 퇴근시간 너머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데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대가로 야근수당이 만만치 않게 많다. 그래서 체력 좋고 제격 좋은 동하는 저녁시간 몸으로 때우면 되겠거니 하고 입사한 것이다. 게다가 지방에서 올라온 덕인지 탓인지 몰라도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저녁에 누구를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회사에서는 동하를 채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입사 후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 동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전임자들처럼 6개월은 채우고 그만두든가, 아니면 악착같이 버텨보든가 선택해야 할 시점이었던 것이다. 일 끝나고 나면 밤 10시 가까이 된다. 집은 회사에서 배려를 해주어 사무실 근처의 오피스텔을 싼값에 제공해 주고 있어서 출퇴근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다. 식사 역시 점심과 저녁은 회사에서 해결해 주어, 아침을 먹지 않는 동하로서는 식비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그리고 체력에도 물론 문제가 없었고. 여기에 주말에는 일을 시키지 않아 그것도 큰 장점 중 하나였다. 그래서 동하는 처음 입사했을 때 전임자들이 얼마 못 버티고 모두 그만두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배부른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동하가 사람 없는 드넓은 사무실에서 밤 늦게까지 남아 홀로 서류 들춰가며 일일이 다른 장부들하고 비교해서 확인하고 사인하고 팩스나 이메일 보내고 보고서 쓰고 하는 일을 일주일에 닷새씩 하다 보니 이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봇이라면 모를까. 게다가 이메일 등을 잘못 보내게 되면 그 뒷수습도 장난이 아니게 힘들었다. 야단맞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심적 부담감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뒷수습하는 일도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 일로 한 번은 선적이 취소되어 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니 저녁 5시부터 10시까지 네 시간은 온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서서 일을 하는 탓에 마치 10시간 이상 시달린 듯이 피로가 극에 달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하다가 자신 없는 부분은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문의하는데 대개는 통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만, 이상하게도 아주 어려운 부분이 나올 때면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도 않고 카톡이나 이메일 등 어떤 것으로 연락을 해도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진도를 나갈 수 없어서 일이 그 시점에서 멈춰지고 만다. 그 결과는 뻔하다. 때로는 밤 12시 넘어서 끝나기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덕에 집에 가서 딴짓하지 않고 곧바로 곯아떨어져 자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 아침 8시 넘게까지 자고 일어나서도 느긋하게 회사에 나가면 가장 일찍 출근하는 축에 속하기 때문에 잠은 모자라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늘 잠이 모자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마도 스트레스, 즉 중압감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퇴근 무렵이 가까워 오자 동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첫째, 사표를 쓴다.
둘째, 오늘은 야근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퇴근한다.
셋째, 그냥 일한다.
넷째, 넷째는 없다.
동하는 원래 말술이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거의 술을 끊다시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 스트레스 때문에 술이 늘었다고 하는데 오히려 동하는 그때부터 술을 멀리했다. 그리고 악착같이 스펙 쌓고 어학학원 다니고 하는 데 올인했다. 그 결과 취업이 된 것이긴 하지만.
동하는 저녁이 다 되어 일어났다. 그때까지 정신없이 잔 것이다. 새벽에 집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서 뻗어버렸다. 아 참, 한 번인가 비몽사몽간에 화장실 다녀온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밤 12시 넘어 홍대 부근의 바를 서너 군데 돌며 혼자 술을 마셨다. 새벽녘에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내린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는 전혀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다행이다. 과거에 여러 번 경험했듯 길거리에서 쓰러져 경찰 지구대 신세를 지지 않고 오피스텔까지 들어왔으니.
동하는 금요일 밤 야근 일을 다 마친 뒤 부장의 책상에 사직서를 올려놓고 나왔다. 입사한 지 정확하게 6개월 만이다. 남들이 넘지 않은 선을 동하도 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잠에서 깬 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리고 한 것 때문에 어제 저녁의 일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러다 화장실 몇 번 들락날락하며 투덜거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 사직서.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동하는 어릴 때부터 두 분 품에서 자랐다. 동하가 유치원 다닐 때 부모가 이혼했는데 동하는 그 이유는 모른다. 그 뒤 아버지는 스페인으로 이민 가서 거기에서 결혼했다. 아이가 셋이란다. 어머니도 한국 어느 구석에서 사는지는 모르는데 재혼했다고 한다. 자식이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은 모른다. 두 분 모두 평소에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고 동하 생일에 이메일만 보낼 뿐, 다른 소식은 거의 주고받지 않는다. 다만 동하가 취직한 사실은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알려주었는지 축하한다는 이메일을 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않았는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동하가 취직하고 한 달이 지난 주말에 청주에 내려가서 뵈었을 때 두 분은 개선장군 맞듯이 환영해 주었다. 동하의 고향은 청주 북쪽 증평에 가까운 곳의 옥수리였는데, 그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몇 대째 내려오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동하가 어렸을 때는 제법 규모가 커서 그 일대에서는 소농부자라는 말도 들었으나, 삼대독자인 아버지가 이혼하는 과정에서 재산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스페인으로 이민 갈 때 또 남아 있던 재산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그나마 겨우 가지고 있었던 얼마 안 되는 땅도 농장사업을 한다는 사기꾼에게 속아 거의 다 남의 손에 넘어갔다가 두 분이 악착같이 일을 해서 동하가 대학 갈 때쯤에는 그런대로 남의 신세 안 지고 먹고 살 만해졌다. 7살 위인 형 준하는 공부도 잘하고 운도 좋은지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에 갔다가 미국 여자를 만나 그곳에서 결혼했다. 아들만 둘. 현재 유명한 IT 기업에 취직해서 다니며, 한국에는 들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러하던 차에 동하가 제대하고 3년 만에 취직을 하게 되자 할아버지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크게 한턱을 냈다고 한다. 그동안 마음에 억눌렸던 것을 한꺼번에 화풀이하듯 날려버리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동하에게 늘 그러셨다. 동하가 어렸을 때부터 무척 아껴주신 것이다. 형은 너무 잘나서 그런지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아도 혼자서 잘 헤쳐나갔지만, 동하는 모든 게 굼뜨고 말도 거의 없는데다가 형에게 치여 존재감 없이 자란 것 같았다.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런 동하에게 늘 과자 하나라도 더 주신 것으로 동하는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동하가 취직했다는 말을 듣고 흰색 아반테 신형을 현금으로 사주셨다. 서울에서 남들에게 기죽지 말고 일하라고 하면서. 나중에 할머니에게 들으니 전답 일부를 저당 잡히고 대출받았다고 한다. 동하는 그 말을 듣고 할아버지한테는 아는 기색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갚아드리겠다고 생각하고서.
작년 10월 초, 추석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취직이 확정된 뒤 할아버지가 집으로 내려오라는 전화를 했다.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동하는 가슴이 철렁해서 그 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고속버스를 타고 청주로 내려갔다. 할머니가 협심증이 있어서 몇 번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혹 무슨 큰일이 있나 싶어 겁이 났던 것이다.
동하는 버스를 갈아타고 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그곳에서부터 동네로 들어가는 길 양옆에는 노란 국화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아니, 마을 전체 온 천지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 마을에서는 예전부터 키 낮은 삼잎국화를 마을 입구에서부터 동네 곳곳에 심어놓아 가을이 되면 그 일대가 노란색 천국이 되곤 했다. 삼잎국화는 잎 위쪽이 3~5개로 갈라져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꽃이 작아 처음 꽃이 필 때는 이른 봄철의 민들레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어린잎은 뜯어서 먹기도 한다는데, 동하네 집에서 술에 담가 먹기는 했어도 맨 잎을 뜯어먹은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삼잎국화 말고 겹삼잎국화도 가끔 심겨져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삼잎국화에 비해 꽃이 너무 수북해서 어딘지 복잡한 느낌이 들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을은 북쪽으로 넓은 농지가 시원하게 트여 있어서 그곳에만 가면 언제나 마음이 활짝 넓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동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서 그런 광경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막상 집 앞에 가보니 신형 아반테 새 차가 세워져 있어서 어디에서 손님이라도 왔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일인가 걱정하며 급히 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갔었다.
그랬더니 두 분이 마당에서 환한 얼굴로 반기시는 것이 아닌가? 어딘지 속은 생각이 들었지만 특히 할머니가 건강하신 것을 보고는 동하의 마음이 탁 풀렸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한마디도 안 하고 큼직한 주머니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어 내미는 것이었다. 동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받아들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당황했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볼이 아이처럼 발그스름해지며 웃으면서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그런 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한번 하시더니 뒷짐을 지고 대문 밖으로 먼저 나가고, 할머니는 동하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가듯이 했다. 동하는 눈만 멀뚱히 뜨고서 할머니를 따라 나갔다가 아반테를 보는 순간 퍼뜩 짚이는 것이 있어서 열쇠를 한번 바라보고는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동하는 지금 문득 그때의 장면이 떠올라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아반테는 현재 오피스텔 지하에 일주일 간 먼지만 앉은 채 서 있다. 지난 이레 동안 한 번도 타고 나가지 않았으니까.
동하는 할아버지보다도 할머니가 박수 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동하는 눈을 찔끔 감고 돌아누웠다. 저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면서.
그런 뒤 잠시 그대로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2
두 달 뒤 오월의 화창한 토요일 아침, 동하는 속초로 떠났다. 서울양양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동하는 감탄을 했다. 첩첩산중에 다리와 터널을 엄청 많이 놓고 뚫어서 만든 고속도로였기 때문이다. 다리로만 치면 서울 쪽의 선동교를 시작으로 해서 양양 쪽 공수전교까지 무려 78개였고, 터널은 남양주 와부읍 월문리의 월문1터널에서부터 시작하여 강원도 양양군 서면 수리의 서면7터널까지 총 63개나 되었다. 게다가 강원도 한복판에 나 있는 인제양양터널은 거의 11km나 되는 길이여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그 전에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의 의정부 근처 사패산터널이 4km 가까이 되어 한국에서 가장 길다고 했었는데 그보다 두 배 반이 넘는 것이다. 이것은 자동차 전용도로의 터널만 따져본 것이고, 동탄역을 지나가는 율현터널이 고속철도노선인데다 무척 길어서 인제양양터널의 네 배 반이나 되기 때문에 터널 자체로만 보면 이것이 가장 길다고 할 수 있겠다. 위 세 터널의 자세한 길이는 다음과 같다.
율현터널 50,250m
인제양양터널 10,962m
사패산터널 3,997m
참고로 터널 자체의 길이만 놓고 보면 스위스의 고트하르트베이스 터널, 일본의 세이칸 터널,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 해협을 잇는 채널 터널 순으로 길고, 그 뒤를 이어 율현 터널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길다고 한다.
고트하르트베이스 터널 57km
세이칸 터널 53.9km
채널 터널 50.5km
율현 터널 50.25km
아무튼 대한민국 어디를 가든 산은 뚫리고, 계곡이나 강에는 다리가 놓이고, 심지어 바다 한가운데로도 엄청 긴 교량이 놓여서 사통팔달 모두 통하고 산간벽지 어디든지 교통이 안 닿는 곳이 없다. 게다가 좁은 땅덩어리 반반도 하늘에도 비행기가 왜 그리 많은지 하루 종일 복잡하고 어지럽다.
동하는 고속도로를 나서서 속초로 들어갔다. 그제야 시골다운 모습이 보였는데 그것도 잠시,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마자 번잡한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동하는 빌딩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은 바다가 갑자기 실종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역시 속초 시내를 벗어나 고성 쪽으로 차를 몰자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내륙 한복판에서만 자랐던 동하는 바다에 대한 일종의 동경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막상 바다에 나가면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림에서, 사진에서, 영화에서, 또한 공상에서 보았던 바다는 한없이 너르고 푸르렀으며 이상과 낭만과 미래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바다에 가서 보면 그것은 동하가 늘 부딪고 배회하던 농촌이나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간만 너를 뿐. 그런데도 다시 도시로 오게 되면 무엇인가 찾지 못한 채 돌아온 듯 바다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동하는 고성 가기 전의 거진에서 우회전하여 삼림욕장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차를 세우고 바다 쪽으로 나갔다. 바로 코앞에서는 백암도가 보였다. 회색 바위로 되어 있어서 백섬이라고도 부른다. 방파제 도로 위에서 돌멩이를 들어 힘차게 던지면 가 닿을 듯한 거리. 바닷가에서 110미터 떨어져 있다고 한다. 검푸른 바다에서 사마귀처럼 볼록 튀어나온 못생긴 바위섬. 희끄무레한 바위섬 위쪽에 해송 몇 그루만 자라고 있는 무인도다. 해도에는 ‘백도(Baekdo)’로만 표기되어 있다. 동하는 강에서만 헤엄쳐 보았지만, 당장에라도 웃통 벗고 바다에 뛰어들면 너끈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몇백 미터는 충분히 헤엄칠 수 있으니까. 게다가 백섬까지 중간중간에 작은 바위들이 솟아 있어서 여차하면 그 바위로 올라가면 된다. 순간적으로 충동이 인다. 하지만 방파제에서 그 섬까지 백섬 높이만 한 관광용 다리가 놓여 있어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걸어서 가면 될 곳을 일부러 헤엄칠 필요는 없지. 그러나 동하는 계속 유혹과 싸우고 있었다. 백섬까지 헤엄친 다음 그 너머로도 얼마만큼 갈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세 번째 오는 것이다. 첫 번째는 헤어지기 위해서. 군대에 가기 전, 사귀던 여자와 마지막으로 이별하기 위해. 그렇다고 그날 달콤한 썸싱은 없었다. 그저 헤어졌을 뿐이다. 그 애, 해연의 집이 속초여서 이곳에 왔었던 것이고. 두 번째 역시 헤어지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유학 떠나는 친구와 헤어지기 위해서. 그날은 그 친구의 차로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한밤중에 서울로 돌아갔다. 동하가 회사에 들어가기 한 달쯤 전에.
그리고 사실 오늘도 동하는 헤어지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작별하기 위해서.
동하는 회사에서 나온 뒤 더 멋진 직장을 찾아보자고 생각했다. 한번 취직해 보니 취업이 그리 어려운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약간은 겉멋도 들고 해서 면접 볼 때 다소 건방을 떨기도 했다. 자신이 먼젓번 회사에서 나온 것이 해고된 것이 아니라 업무가 지나치게 많아 좀더 인생의 여유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듯한 암시도 주었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취직하기 위해 너무 매달리는 듯한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번듯한 곳에 들어가 인생을 화려하게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는 어떠한 경우라도 비굴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울함이었다. 한번은 먼젓번 회사에 다시 찾아가 야근이든 뭐든 시켜만 주면 다 하겠다고 빌고 싶기도 했다. 월급 좋고, 야근수당 풍성하고, 점심과 저녁식사 해결해 주는 데다가 오피스텔까지 저렴하게 제공해 주던 회사. 무슨 겉멋이 들어 그런 곳을 뛰쳐나온 것인지.
주변에는 아직 취직도 못 해보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 없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 동하는 그 친구들에게 마음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구했다. 진심으로.
동하가 바다 대신 못생긴 백섬에게 작별을 고하며 돌아서는데 저 앞에서 어떤 소년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동하를 목표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어딘지 어색했다. 모습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걸음걸이가 어색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옷차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동하가 멈칫하는 사이에 소년은 동하 바로 앞까지 왔다.
“안녕하세요?”
응? 어……. 저……, 그런데 누구?
“저 소년이에요.”
?
뭘 팔려고 왔나? 아니면, 삐끼?
“저 그런 애 아니에요.”
그런 애? 그럼 무슨 앤데?
“그냥 소년이에요.”
어랍쇼? 난 아직 한마디도 안 했는데 이 애는 왜 대답을 이렇게 잘 하는 거지? 동하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괜히 이상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서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오늘 여기에 헤어지려고 왔잖아요.”
뭐라고? 누가 헤어져?
“아저씨가 헤어지려고요.”
누구하고?
“아저씨랑.”
동하는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멈춰서서 다시 소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너 누구야?
“소년이라고 했잖아요.”
장난해?
“아뇨. 장난 아녜요. 저 진지해요. 아주아주.”
응? 그런데 이 애가 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대답을 해주는 거지?
동하는 소년을 빤히 바라다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냥 애잖아.
“그냥 애는 아니에요.”
동하는 양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럼 뭐야?
“하늘에서 내려왔거든요.”
이 녀석이…….
“꼬마야, 집에 가거라.”
“여기에는 집이 없어요.”
“그럼 어디에 있어?”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참 파랗다. 바닷물이 비쳐서 그런지 다른 곳에서보다 더 파래 보였다. 차라리 까맸으면 좋겠다. 그러면 별들이라도 보이지. 그리고 까만 하늘 속으로 풍덩 빠져서 깊숙이 가라앉고 말 텐데. 영원히.
“하늘에는 빠질 데가 없어요.”
그런데 이 녀석이 나 가지고 장난 노나?
“그래, 그럼 하늘에 가라.”
동하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흥미가 없다. 하늘이 집이거나 말거나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세상 다 잊어버리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이상한 아이하고 말장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동하는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 인생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는 결정을. 지금 동하는 생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요.”
뒤에서 소년이 중얼거리듯, 그러나 동하 들으라는 듯이 말한다.
동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생명……. 그래,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어. 그러나 어느 때는 생명이 가장 가치가 없기도 하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것, 생명.
“생명의 무게를 재보셨어요?”
생명의 무게. 무게라…….
생명은 한없이 가볍지. 풀밭에 누운 병사처럼.
커다란 산언덕에 해가 고개를 내밀면
파릇파릇 풀 돋아난 골짜기 아래에선 시냇물 졸졸 노래하고
아지랑이 은빛으로 흩어져 풀잎사귀 사이로 흘러가면서
골짜기마다 넘치는 햇살
싱그러운 풀밭에 철모도 없이 머리를 처박고
입을 헤벌린 채 잠들어 있는 나이 어린 병사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 아래에서
햇살 쏟아지는 초록색 침상에 누운 그 모습 너무도 창백해
글라디올러스 만발한 꽃밭에 두 다리 뻗은 채
병든 아이처럼 힘없는 미소 머금고 잠들어 있는 이
자연이여, 저 병사 춥지 않게 따뜻이 잠재워 주오
꽃향기 실은 바람이 간질여도 콧구멍은 움찔도 않고
가슴에 평안히 팔을 올려놓은 채
오른쪽 배에 뚫린 두 구멍만 적막하구나
“며칠 전에 읽은 시.”
소년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한다.
“……?”
네가 랭보를 알아? 그리고 내가 그 시 읽은 것 어떻게 알았어?
동하는 말문이 막혀서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아니,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너무 어이없어서.
“랭보. ‘골짜기에서 잠든 이.’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Arthur Rimbaud), 1870년 10월 작품. 퇴폐주의, 낭만파. 이것 말고 다른 것들도 알아요.”
“나 놀리는 거냐?”
“그럴 리가요.”
동하는 이제는 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무엇엔가 빠져 있는 듯이 느껴졌다. 일주일 이상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했었던 탓에 환각이나 환상 속에 빠져든 모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동하는 눈을 감았다. 약간 현기증이 느껴졌지만 잠시 그대로 있으니 괜찮아졌다.
동하는 심호흡을 한 뒤 눈을 떴다. 소년이 보였다.
환상은 아니구나.
“맞아요. 저 환상 아니에요.”
소년이 미소 지으며 말한다.
“내일 이 시간에 여기 다시 올게요.”
소년은 돌아섰다. 그리고 걸어간다. 아까 온 길을 반대로.
저벅저벅…….
소년은 해안가 깔끔한 길을 걸어서 간다.
소년이 걷는 소리는 나지 않는 것 같은데, 동하의 머릿속에서는 마치 해안가 전체에 퍼지듯 발소리가 울려오는 것이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