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카페 | 아홉 번째 이야기
잘디잔 인간사들 소소한 갈등다툼
남몰래 가슴앓이 아득한 미래살이
케세라 세라세라에 이판사판 신난다
차 한잔의 카페 | 아홉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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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장마도 아니다. 5월달에 무슨 장마냐. 아무튼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장마철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였다. 부슬부슬 봄비가 아니라 장대 같은 빗줄기인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이상기후라고 하는데, 한 방송국 앵커에 따르면 이것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 과거에도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나이 열아홉, 한국 나이로 스물에 처음 보는 현상 같았다.
나는 재수해서 간신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남들보다 생일이 빨라 일찍 학교에 들어간 탓에 늘 뒤처지게 살아왔다가 이제 겨우 남들과 균형을 맞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학 1학년생이 축제 맛을 보려고 기대를 잔뜩 한 참에 비가 주룩주룩 내려 모든 게 다 망쳐져서 풀이 죽어 있었다.
“아무도 안 온단다.”
“상관없어.”
“넌 왜 늘 그렇게 시들하냐?”
“넌 왜 늘 방방 뜨는 거냐?”
이렇게 별일 아니게 시작된 것이 일이 커져 버렸다. 내가 장난삼아 주먹으로 상현의 코를 툭 쳤는데 그만 안경이 떨어져 나가면서 코피가 난 것이다. 그 바람에 상현이 그날 새로 입고 온 양복 재킷의 왼쪽과 그 속의 하늘색 면 티셔츠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 야외축제는 없지만 강당에서 행사가 있고, 또 파트너 만나기 위해 쏙 빼입고 온 것인데.
이 일로 인해서 소문이 고약하게 났다. 내가 함부로 행동한다고. 성격이 거칠다고. 태권도 같은 운동 좀 한 모양이라고.
“요즘 자랄 때 태권도 한번 안 해본 애 있어?”
“뭐 한 10단쯤 된다는 거야?”
“짜식, 엉망이네. 겉으로는 곱상해 보이더니 아주 조폭이구나.”
“그런 애들이 더해.”
며칠 뒤 과대표한테서 전화가 왔다.
“너 학과장님이 오라고 한다.”
“무슨 일인데?”
“몰라.”
“그래도…….”
“글쎄……, 상현이 문제 때문인 것 같은데…….”
나는 학과장에게 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 학과장의 수업이 있었는데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서 도서관 뒤 숲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학과장은 단 10분만 늦게 들어가도 눈을 부라리고 쳐다보는 사람이다. 그렇잖아도 몇 번 수업에 늦거나 빠진 일이 있어서 곱게 안 볼 텐데 상현의 일까지 겹쳤으니 이제 대학생활을 온전케 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
될 대로 돼라.
나는 그날부터 한 주간 동안 아예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연락하는 친구들이 없었다. 같은 과 친구들 말이다. 이럴 수가…….
그런데 일주일 만에 카톡이 하나 떴다. 과대표한테서 온 것이다.
― 너 내일은 꼭 학교에 와야 한다. 문제가 커질 것 같다.
뭐야, 이게?
나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천장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제기랄.
싫다. 안 간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 안 다니면 그뿐이다. 한 번 더 재수하자. 삼수.
이렇게 생각은 했으나 마음은 처량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다 내 잘못이니까. 경솔하게 행동한 결과다. 그동안 사실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많았다. 성격 급하고 또 흥분 잘하는 데다가 남들에게 민폐 끼치는 짓도 종종 해왔다. 그거 다 내 탓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무사하게 넘어갔다.
아, 한번 망신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
큰누나가 각종 자료를 많이 수집하는 바람에 클리어파일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클리어파일뿐만 아니라 그에 필요한 소소한 것들을 누나 대신 내가 많이 사다준다. 물론 돈은 다 받고. 심부름비까지.
나는 그런 것들을 집 근처 고등학교 옆에 있는 문구점에서 늘 사온다. 겉에서 보면 자그마한데 안에 들어가면 제법 규모가 큰 가게다. 어느 날 또다시 클리어파일을 사기 위해 그곳에 들어갔었다. 보통 한번에 10통을 사는데 늘 꼼꼼하게 개수를 세어 확인했다. 그러나 그날은 개수를 세어보지도 않고 계산대로 가져갔다. 주로 주인아주머니가 나와 있었는데 그날은 아저씨, 즉 주인아저씨가 가게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클리어파일을 계단대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10통이에요.”
다른 날에는 그것을 세어보지 않고 계산해 주고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주었는데, 그날따라 아저씨가 하나하나 세어본다. 그러더니 하나를 빼내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얼른 다시 세어보았다. 그랬더니 정말로 하나를 더 가져온 것이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이 일은 두고두고 나를 힘들게 했었다. 물론 그 문구점에는 다시는 가지 못했다. 하필 개수를 확인해 보지 않은 그 날, 또 하필 주인이 꼼꼼히 세어본 것이다.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던지. 그리고 그 생각이 날 때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화끈거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즉, 벌 받은 것이라고. 무슨 말이냐 하면, 그동안 크고 작은 일 거짓말하고 지우개 쪼가리처럼 하찮은 물건이지만 남의 것이나 공동의 것을 아무 말 없이 가져온 일들을 한번도 들키지 않았으니, 저지르지 않은 일이 저지른 것처럼 되었다고 억울해할 것 하나도 없다고 마음먹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받을 것 받았다고 생각하니 최소한 억울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물론 단 한번도 선의든 악의든 거짓말도 해보지 않았고, 남이 흘린 부스러기조차 탐하지 않은 분들이야 나처럼 생각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마음을 달래야 했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낄낄거리다가 장난으로 툭 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동안 경솔하게 행동한 것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가 이번에 한꺼번에 벌을 받게 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다음날 학교에 갔다.
인문대 건물로 들어서는데 과대표를 만났다.
“일이 좀 골치 아프게 됐다. 폭행으로 고발한다는 모양이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과대표를 바라보았다.
“알고 봤더니 상현이 아버지가 우리 대학 이사란다. 그 애 엄마가 지금 학장실에 와 있어.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 괜히…….”
“그만해!”
아차,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과대표 옆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학장실로 가기 위해.
뒤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병신 자식.”
할 말이 없었다. 학교에 오면서 그렇게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건만 또 갑자기 욱 한 것이다. 잘한 것 하나도 없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가 더 숙여졌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한심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학장실 문 앞까지 와 있었다.
나는 한숨을 크게 쉰 다음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살며시 열었다.
학장실 소파가 보였다. 어느 중년부인이 기세 좋은 모습으로 앉아 있고, 그 옆에는 상현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학장이 앉아서 이쪽을 돌아다보았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들어와.”
학장이 말한다.
중년부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본다. 상현은 나를 한번 흘끔 보고 나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리 와서 앉아.”
학장이 다시 말한다.
나는 소파로 다가가서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부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글쎄, 얘가 양복이랑 티셔츠랑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서 들어왔다고요. 코피가 터져서.”
부인이 나는 보지 않고 학장에게 말한다.
그러자 상현이 갑자기 몸을 돌려 자기 어머니 쪽을 바라보며 소리치듯 대꾸했다.
“그거 피 아냐!”
“얘가? 내가 다 봤는데 왜 그래?”
“코피 아니라니까.”
“그럼 뭐야?”
“커피가 터진 거야.”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종이컵이 터져서 커피가 쏟아진 거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