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 거울속의나는

by Rudolf

제9장 | 거울속의나는


1


인국은 요즈음 공부가 많이 늘었다. 게다가 지난여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어리했던 모습도 많이 나아졌다. 초점이 없이 흐릿했던 눈에도 약간씩 총기가 보이는 듯했다. 말은 아직 어눌했지만 이제는 제법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게다가 어쩐지 키도 부쩍 자란 듯했다.

정 선생은 인국의 모습이 흐뭇했다. 인쇄소에도 가끔 데리고 가서 정 선생이 일하는 동안 동화책도 읽고, 정 선생이 낸 숙제도 하도록 했다. 단숨에 국민학교 모든 과정을 마칠 수는 없겠지만, 산수와 읽기만 제대로 하면 다른 과목들은 천천히 진행해도 될 듯싶었다. 이렇게 해야 내년 봄 허술한 중학교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인쇄소 사장도 가끔 인국을 보면 놀라곤 했다. 아이가 엄청 변했다고 하면서. 그리고는 자신의 집에서 남아도는 것이라며 동화, 교과서, 장난감, 옷이나 신발 등을 갖다주기도 했다.

정 선생은 인국을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꿈을 꾸고 있었다.

저 녀석이 저대로 잘 커주기만 하면, 어떻게든 내가 못한 꿈을 이루어줄 수도 있을 텐데…….

물론 아직 먼 길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 선생은 인국을 통해서 그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다.


2


정 선생은 수원으로 내려갔다. 황 서방이 불러준 대로 세류동 빈민가 사이를 더듬었다. 전봇대 서너 개 지나면 새우젓 통들이 밖에 나와 있는 목조건물이 나오고……, 그곳을 한참 지나면 경기상회라고 한자로 쓰인 간판이 보이는데……, 전봇대 바로 옆에서 오른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집인데, 색 바랜 파란색 양철대문이 반쯤 떨어져 나간 일본식 이층집 적산가옥이라서 척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설명대로 찾아가긴 했으나 색 바랜 파란색 양철대문 집은 보이지 않았다. 약도를 그려주어도 찾기 힘든 판에 전화로 설명을 들었으니 오죽하랴.

정 선생은 세 번이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더듬더듬 이 골목 저 골목 누빈 끝에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찾고 보니 파란색 대문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으나, 일본식 이층집인 것만은 간신히 알아볼 수 있어서 그 집이 맞는다고 판단했다. 10월초이지만 예년보다 더운데다, 한참을 헤맨 터라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정 선생은 기둥만 남은 대문에 서서 ‘계세요?’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조그만 계집아이가 현관문을 삐죽 열고 얼굴을 내민다.

“어머니 계시니?”

계집아이는 다시 쏙 들어갔다.

잠시 뒤 어떤 뚱뚱한 중년부인이 손에 작은 빗자루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집안청소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오셨어요?”

“저,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안 사요. 우리는 살 게 하나도 없어요.”

“아뇨. 저는 할부장사가 아닙니다. 뭐 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부인은 문을 닫으려 한다.

“왕십리 자전거포 아주머니 아시죠?”

부인이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마주 쳐다본다.

“그분이 알려줘서 찾아왔습니다.”

부인은 반쯤 닫힌 문을 등지고 서서 정 선생을 세밀히 살핀다.

“화투 치러 오셨수?”

미심쩍어 하는 눈길로 부인은 정 선생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남자의 생김새가 어딘지 왕십리 화투 아줌마하고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화투쟁이 같지는 않은데…….

“저……, 그게 아니고 뭣 좀 물어보려고요.”

부인은 여전히 미덥지 않은 표정이다.

“요즘 안 쳐요. 한참 됐는데…….”

“아뇨, 그게 아니고 자전거포 아주머니 말이, 여기 어떤 아주머니하고 함께 화투를 치셨다고 하는데……, 상이군인하고 사시는 분이라고 하고……, 세류동 어디에서 밥집 하신다고 들었는데…….”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 선생을 쳐다본다. 저 사람 뭐지? 하는 눈빛이다.

“그 아주머니가 욕을 잘 하신다고 하는데, 제가 그 아주머니를 찾고 있습니다.”

부인은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그 인간이 댁 돈 떼먹고 달아났수?”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그 분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이건 또 뭔 소리여? 하는 눈빛.

“혹시 그분 아직 이 근처에 사시나요?”

부인은 문을 활짝 열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그 욕쟁이를 통해서 누구를 찾는다……? 누구를? 내가 아는 사람이우?”

“말씀드리자면 이야기가 깁니다.”

“해보슈.”

부인은 빗자루를 바닥에 내려놓고 팔짱을 끼고서 문 옆 벽에 기댔다. 문에서 아까 그 계집아이가 나와서 부인 뒤에 반쯤 숨다시피 하고 기댄다.

“얘, 넌 들어가. 네 엄마 조금 있으면 올 거다……. 그래, 무슨 이야기예요, 그게?”

정 선생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부인은 호기심이 잔뜩 이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에구, 그럼 어린애 하나 찾자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유? 참 정성도 많구만.”

“그래서 그 아주머니를 찾으면 그 아이 있는 곳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고……, 시간도 많은 양반이네. 이 바쁜 세상에…….”

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하늘을 쳐다본다.

“그러니까……, 그 욕쟁이가 있는 곳을 알면 그 아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다? 그 욕쟁이는 벌써 1년도 넘게 전에 어디론가 가버렸는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을……?”

“아, 벌써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1년, 아니 그보다 더 됐지, 아마. 저쪽 아래 평택인가 어딘가로 간다고 했어요.”

“저, 자전거포 아주머니는 얼마 전 여기에서 그분하고 직접 화투를 치셨다고 하던데요……?”

“아니, 그게 뭔 말이야? 그 마누라가 직접 만나서 같이 친 게 아니라, 내가 그 욕쟁이 이야기를 해준 거예요. 그 사람이 하도 욕을 잘 해서 재미삼아 들으라고 해준 얘기여.”

“그럼 자전거포 아주머니가 그분하고 직접 만난 게 아닌가요?”

“아이고, 아녀. 그 마누라는 그 욕쟁이 만난 적도 없어. 내가 말해 준 거지. 욕을 하도 신나게 잘 해서 말여. 얘깃거리가 좋잖우. 그래서 그 마누라 여기 왔을 때 재미있으라고 내가 말을 해준 거지. 그런데 그 마누라가 거기 가선 자기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단 거요? 아이고, 뻥쟁일세. 완전 뻥쟁이여. 여기서도 뻥이 좀 심하더만, 거기 가서도 뻥뻥 해댔구만.”

정 선생은 좀 민망해졌다.

“저, 아주머님, 그 욕 잘 하시는 아주머니에 대해서 아시는 대로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 욕쟁이는 욕 잘 하는 것 말고는 말해 줄 게 없어요. 입만 열었다 하면 욕이니까.”

“그 아주머니가 평택에 간다고 했다는데, 평택 어디라는 말은 안 하시던가요?”

“어디……, 음……, 그래……, 맞아……. 카바레라는 말을 한번 한 것 같은데……. 그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네.”

“저, 혹시 그 아주머니가 팔덕이라는 사람 말한 적 없나요?”

“팔덕? 팔떡팔떡? 음……. 아니, 그런 말 없었는데…….”

“스무 살 안팎 되었을 겁니다, 그 팔덕이라는 사람.”

“스무 살이라……. 그건 잘 모르겠고, 언젠가 한번 이런 말 한 적은 있지.”

정 선생은 귀를 쫑긋 세웠다.

“박쥔가 뭔가 하는 새파란 애가 있었는데, 별명이 박쥐라고 했지 아마. 그 애가 별명처럼 꼭 박쥐 노릇을 한다고 타박했었지.”

부인은 이제는 시들해졌는지 말을 사린다.

“내가 별 말을 다하네. 이젠 나 들어가 봐야겠수. 집안 다 어질러 놓고 청소한답시고 법석대다 여기 나와 놀기만 했네.”

부인은 계집아이 등을 밀며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이젠 가보슈. 그리고……, 어디 가서 내가 뭐 어떤 말을 했다 그런 소리는 아예 마시고. 자, 그럼…….”

부인은 발을 떼려다 멈칫하고 또다시 말을 했다.

“올라가시거든 뻥쟁이 마누라한테 내 안부 전해 줘요. 한번 내려오시라 하고.” 그리고 숨 한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뻥쟁이라고 했다는 말은 빼고요.”

부인은 싱긋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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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 선생은 그 집에서 돌아 나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해는 조금 남아 있었지만 곧 질 것이다. 지금 바로 평택에 가볼까……? 카바레라면 토요일 밤이 더 좋겠지. 그러나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인국이 걱정되었다. 잠시 망설이다 정 선생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보자 하고 결정했다.

평택 시내로 접어든 정 선생은 그러나 막막했다. 주변은 황혼의 마지막 빛이 막 사라져 가고 어둠이 덮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한다?

우선 카바레가 어디에 있는지, 몇 개가 있는지 그것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여기저기에서 물어본 결과 시내 한복판에 하나, 중앙시장 옆에 하나, 그리고 변두리에서도 더 들어간 허름한 주택가 입구 남도극장 옆에도 하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도 있고. 이 조그만 도시에 카바레가 여럿이 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 그러한 데는 관심이 없었던 정 선생으로서는 좀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람 사는 곳에는 늘 그러한 것들이 뒤따른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해 예외가 없을 듯했다.

어떻든 이들 중에서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무엇을 어떻게보다도 정 선생은 어디서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무조건 부딪혀 보기는 할 텐데, 순서를 정하는 것이 다른 일보다도 더 어려워 보였다.

그러는 동안에 정 선생의 머릿속에서는 계속 화투 부인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박쥐. 박쥐라…….

팔덕에게 어울리는 별명이군. 누가 잘 지어주었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박쥐는 어두운 곳을 좋아할 테니, 가장 으슥한 곳부터 시작하자.

집에서 기다릴 인국을 생각하니 정 선생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 선생은 택시를 불러 세우고 남도극장 쪽으로 가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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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선생은 은하수 카바레 근처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를 해결할 차례였다. 그러나 딱히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 선생은 지금껏 그러한 세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었다. 영화나 소설을 통해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부의 모습이지 지금과 같이 사람을 찾고 정보를 모으는 것과는 달랐다.

일단 부딪혀 보자고 정 선생은 생각했다. 큰 숨을 한번 내쉬고 카바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껌팔이 할머니가 손을 내민다. 정 선생은 외면하고 그대로 걸어갔다.

“물 좋은 데 찾으세요?”

정 선생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젊은 남자. 그래, 팔덕 또래 되었을 남자가 머리에 쓰고 있던 계급장 없는 군모를 들어올리며 이빨을 보이면서 웃는다.

정 선생은 멈칫했다.

뭐라고 대꾸해야 되는 거지?

“저 따라 오시면 삼삼한 데 있어요.”

남자는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카바레와는 반대방향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정 선생이 이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짐작하고 접근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정 선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남자는 조금 걷다가 멈춰서서 뒤를 돌아다본다.

정 선생은 용기를 냈다. 남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남자는 다시 돌아서서 걷는다.

정 선생은 빠른 걸음으로 남자 옆으로 다가갔다.

“뭣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남자는 슬쩍 옆으로 돌아보며 미소 짓는다.

“아주 좋은 물이에요.”

그러면서 또다시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아니, 저……, 혹시 박쥐라는 사람 들어봤어요?”

남자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 돌아다본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

“짭새……?”

남자는 주춤하며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 동작을 취한다.

정 선생은 순간적으로 생각이 떠올라서 얼른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 삐끼를 통해 정 선생이 알아낸 사실은 이것이었다. 박쥐는 박쥐라는 것. 즉, 박쥐는 어느 날 어둠 속에서 나타나서 아가씨들 소개를 통해 짭짤하게 수입을 올리는 것 같더니 어느 날 또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역시 박쥐다웠다. 그러나 이 말이 나왔을 때 정 선생은 또다시 절망했다. 하지만 그 다음 말로 다시 가느다란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쥐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쪽 동네를 떠나서 대전 어디께로 갔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곳에서 얼마 있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갔는데, 아마 대천 쪽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카바레의 회장이라는 사람이 평택 일대를 주름잡는 조직의 우두머리였는데, 박쥐가 그 사람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여기 떠난 지 1년 넘었을 거예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늘 이리저리 떠도는 게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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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날 일요일, 정 선생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찬찬히 생각하며 정리해 보았다.

우선 팔덕. 왕십리에서 어딘가를 거쳐 수원. 그리고 평택과 대전. 지금은 대천. 카바레. 어떤 불량조직.

다음은 심통여사. 왕십리에서 어딘가를 거쳐 수원. 그리고 평택. 그 이후는 모름. 밥집. 상이군인.

자, 이러고 보니 보이는 것이 있지 않은가!

공통분모는 수원과 평택.

그 다음은 갈린다. 하나는 카바레, 다른 하나는 밥집. 여기에서 공통점은? 모르겠다.

또 하나 다른 것. 하나는 불량조직, 다른 하나는 상이군인. 이 둘의 공통점? 역시 모르겠다.

그리고 어색한 것. 하나는 평택 이후 대전과 대천이 나오고, 다른 하나는 평택에서 멈췄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의 가정은 세울 수 있다.

두 사람이 왕십리, 수원, 평택까지 함께 움직였다면 그 다음 행적도 동일하지 않았을까? 이 가정이 맞다면 팔덕과 심통여사는 지금 대천 어디쯤인가에 함께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합리적 의심.

정 선생은 이 둘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하고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인물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인희.

역시 인희의 행적을 더듬어 봐야겠다.

왕십리, 성수동, 구파발, 신창, 그 다음 경로는 알 수 없지만 어디인가를 거쳐 어느 날 부천에 나타났다. 그 다음은 오리무중.

그렇다면 인희와 팔덕, 심통여사의 공통분모는 무엇인가? 왕십리 하나뿐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가정. 팔덕과 인희는 아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 지역이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인희와 팔덕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인가?

잠시 생각하다 정 선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심통여사는 몰라도 적어도 팔덕과 인희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


며칠 뒤 정 선생은 또 휴가를 얻었다. 주말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마음이 급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손에 무엇인가가 잡힐 듯하는 것이어서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놓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사장은 정 선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진척이 있었나 보군. 그동안 애썼어. 모든 게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 때를 놓치면 안 되지. 어서 가보게. 조바심이 일면 일도 잘 안 되는 법이여. 그래, 그 일부터 먼저 해결하게.”

정 선생은 사장에게 한없이 고마움을 느꼈다. 반드시 갚아드려야지.

공장을 나선 정 선생은 한달음에 부천으로 달려갔다.

우선 우체국. 정 선생은 부천우체국 앞에 가서 우체국을 등지고 섰다.

무엇이 보이는가? 오고가는 많은 사람. 그 너머로 경적 울리고 시커먼 연기 뿜어대며 분주하게 달려가는 크고 작은 매연 자동차들. 그 다음은? 상점, 건물, 주택, 주택, 왼쪽으로는 저 멀리 야산, 오른쪽으로는 공장들. 저 어딘가에서 인희는 매달 말에 이곳 우체국으로 왔다. 한 달에 한번씩. 차를 타고 왔나? ……. 아니야, 시골에서만 자라 번잡한 도시생활에는 익숙지 않을 것이다. 혹 어디에 살든 그 근처에 우체국이 없다면 차로 갈 수밖에 없겠지만, 일단 복잡하게 일을 만들지 말고 이 근처에서 걸어왔다고 생각해 보자. 공장. 공장이라고 했다. 우체국 여직원이 공장이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그래, 저 공장들.

여기에서도 정 선생은 선택을 해야 했다. 부천에는 요즈음 크고 작은 공장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중에서 인희가 걸어서 올 만한 거리의 반경 안에 드는 공장을 알아보자.

걸어서 30분? 아냐, 너무 멀어. 20분? 10분? 10분 이내에 있다고 한다면 고맙겠지만, 그렇게 간단히 나타나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최대한 20분 이내로 잡자.

정 선생은 점심도 거른 채 네 시간 가까이 걸려서 대략 20분 거리의 반경을 모두 돌았다. 작은 가내수공업 정도의 공장은 일단 제외하고, 어느 정도 규모 있는 공장을 확인해 보았더니 모두 6개였다. 편물공장이 셋, 가방공장 하나, 봉제공장 하나. 그리고 기계공작소가 하나. 그 중 편물공장 하나는 문이 닫혀 있었다.

어디부터 시작할까? 어제 카바레 찾을 때는 정말 운이 좋아 첫 번에 성공했다. 오늘도 운이 따라줄까? 정 선생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근처 상점에서 산 빵으로 점심을 대신한 정 선생은 자신을 재촉해서 무겁지만 한 가닥 희망만은 가지고서 걷기 시작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기계공작소. 그러나 입구에서부터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우람하고 우락부락한 남자들의 시커먼 옷에 시커먼 기름, 시커먼 손과 얼굴 속에서 인희 같은 앳된 아이는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인희의 사진을 보여주었어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다음으로 편물공장. 그러나 정문에서부터 가로막혔다. 공장 직원이 아니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3년 전 저 건너에 있는 편물공장에 큰 불이 난 뒤로 공장의 출입은 물론 내부순찰이 강화되었다고 한다. 정 선생이 사진을 보여주자 그런 아이 본 적도 없지만, 그 공장에서는 어린아이는 고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문이 닫힌 두 번째 편물공장은 그대로 지나갔다. 그 공장에서 불이 났었던 모양이다. 나머지 공장들을 찾아가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들은 말에 의하면 지금 문 닫혀 있는 편물공장은 화재사건 이후 큰 곤욕을 치르고 경영도 부실해져 한동안 어렵게 이어가다가 최근에 다른 회사에 팔렸다고 한다. 그리고 직원들도 여러 군데로 흩어진 모양이다.

정 선생은 나머지 공장들을 차례로 찾아갔지만 모두 허사였다. 정문 수위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설명을 해도 소용없었다.

주저앉고 싶은 몸으로 정 선생은 마지막 힘을 다해 하나 남은 봉제공장으로 찾아갔다. 정문 수위실 앞에 경비원이 나와 있었다. 공장 안의 저쪽 건물에서 어떤 남자가 어깨가 쳐진 채 힘없이 정문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나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 선생은 자기처럼 저 양반도 힘든 짐을 많이 짊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어딘지 동병상련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정 선생이 경비원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몇 년 전 사진이지만 혹시 본 기억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근처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2년 전쯤에 다른 곳으로 간 것 같다고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름은 송인희라고 말했다.

마침 어깨가 쳐진 남자가 정 선생을 지나쳐 갔다. 남자가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춰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지금 송인희라고 했습니까?”

정 선생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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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물공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직원들이 대부분 흩어지고, 조 계장도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근처 다른 편물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그날 이력서를 가지고 그 공장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좋지 못해 낙담한 마음으로 공장을 나오다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송인희라는 그 아이 때문에 팔덕에게 얼마나 시달렸던가. 조 계장은 팔덕이 아니라 송인희라는 이름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정 선생과 조 계장은 공장 근처 다방으로 가서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서로를 위로했다. 마치 두 사람은 오랜 친구 사이 같았다. 종류는 틀리지만 인희, 그리고 팔덕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이 가슴을 태웠던가.

“인희는 지금 군포에 있는 봉제공장에 다니고 있어요. 그동안 팔덕이놈이 병원비다 약값이다 무척 많이 뜯어가긴 했지만, 사실 단 한 번이라도 그 돈을 인희에게 썼는지는 의문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로서는 주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물론 그 돈은 내가 준 것은 아니고 회사에서 내준 겁니다. 회사에서 약점을 잡힌 것이거든요. 이제는 내가 그 회사에서 나왔으니 팔덕이놈에게 더 이상 시달릴 일은 없겠지만, 그놈은 하도 사악해서 또 어떤 구실로 나에게 찾아올지 몰라요.”

사실 정 선생은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시바삐 인희가 있는 봉제공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팔덕으로 인해서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무엇보다도 인희에 대한 귀한 정보를 준 사람에게 매정하게 말을 끊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고 두 사람이 다방에서 나온 뒤, 정 선생은 바람처럼 군포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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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날이 10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무척 따뜻했다. 이상기온이라고 하는데, 낮의 기온이 무려 30도 가까이 올라갈 때도 있었다.

인희는 한밤중 더워서 잠이 깼다. 좁은 방에서 다섯 명이 끼어서 자기 때문에 조금만 기온이 올라가도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인희의 자리는 문 쪽 제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인희가 몸을 뒤척이다 얼핏 언니 쪽을 돌아다보니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가끔 있는 것이어서 인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돌아누웠다.

더운데다가 땀으로 목이 끈적거려 다시 잠들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지난번 편물공장의 순지 언니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문득 문 옆 신발장 위에 있는 조그만 탁상 야광시계를 보았더니 밤 2시가 조금 안 되었다. 어쩐지 걱정스러워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활짝 열어젖힌 방문을 통해 바깥 어디에선가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날카로운 소리……. 그러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저음의 소리.

무슨 소리지……?

가만히 들어보니 사람 목소리였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귀는 자꾸 그 소리 쪽으로 곤두서고 있었다. 약간 높은 여자 목소리. 잠시 후 또다시 섞여서 들리는 두 가지 톤의 목소리. 혹 싸우는 소리인가?

인희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인희는 귀를 막고 돌아누웠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불안이 점점 켜져 갔다.

갑자기 인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 자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바깥 소리를 못 들었는지 낮은 숨소리만 내며 그대로 잠만 자고 있었다.

밖에서는 소리가 잠시 끊겼다.

인희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아주 희미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 뒤채는 소리…….

아주 약하게 비명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인희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섰다. 그리고는 맨발로 밖으로 나갔다.

3층 끝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곳 뒤쪽에서 옷자락 같은 것이 비쳐보였다.

인희는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커튼이 쳐지지 않은 창문을 통해 건물 밖의 보안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들고 있어서 사무실 안이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갑자기 잡동사니 사이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여자였다. 옷은 반쯤 벗겨진 상태 같았다. 뒤이어 또 한 사람이 나타나서 앞사람을 잡아끈다. 나지막한 소리로 옥신각신하면서.

인희가 보기에 앞사람은 언니가 분명했다. 창문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불빛에 얼굴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뒤의 사람, 그러니까 남자일 텐데 약간 어둡게 눈에 잡혀서 누구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남자가 여자의 나머지 옷을 잡아채고 벗기려 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빠져나오려 발버둥친다. 그러나 힘에 벅찬 듯 끌려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여자가 낮게 비명을 지른다. 남자가 여자의 입을 틀어막으려 손을 내미는 순간,

“안 돼!”

인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은 마치 슬로비디오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인희 쪽을 돌아다보며 남자의 손이 느슨해지는가 싶더니 여자가 몸을 뒤틀어 달려나갔다. 여자의 옷은 다 찢겨져 나가 거의 알몸과 같았다. 그러나 인희 쪽으로 오지는 않고 창문 쪽으로 쏜살같이 뛰어가더니 열려 있는 창문을 넘어 바깥으로 난 좁은 난간 턱으로 나갔다. 이 건물은 3층에만 창문 밖으로 길게 좁은 나무 난간을 대서 그 위에 화분을 놓을 수 있게 해두었다. 건물 외벽이 지저분해서 그렇게라도 장식해 놓으라는 사장이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그 화분 난간은 계단통 창문까지 이어져 있고, 그 창문을 통하면 계단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아마도 언니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화분난간을 통해 계단으로 가려 했던 모양이다. 사실 전에도 한번 불조심 플래카드를 걸 때 바람에 너무 펄럭여서 한 직원이 화분난간을 딛고 못을 박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창문 밖으로 나가는 순간 화분 몇 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숙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서 자던 사람들이 밖의 소란에 잠이 깬 모양이다.

창밖으로 나간 여자는 벽을 붙잡고 옆으로 나아갔다.

그때 그늘 속에 있던 남자가 황급히 쫓아나와 인희를 쳐다보더니, 이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여자를 살피고는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창을 넘어갔다. 그 남자, 확실하게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아는 사람 같았다. 사장의 먼 조카뻘 되는 사람이 몇 주 전에 이곳 총무과에 와서 잠시 일하고 있었는데, 대학 다니다가 군대 가기 위해 잠시 휴학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인희는 한두 번 스치듯이 잠깐 본 것뿐이지만 그 사람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숙소에서 사람들이 달려나왔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동안에 인희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숙소 직원들이 창문 쪽으로 달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도둑이야 하는 소리도 들렸다.

“인희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가 얘 좀 달래 봐요. 저러다 큰일 나겠어.”

“아니, 저 저 저 창밖에 누가 있네!”

“저러다 떨어지겠어요!”

“누구지? 아니, 쟤잖아!”

그러다 갑자기 창문 밖 난간에서 우지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창문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창 아래에서 와드득 하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려갔다.

“어떡해?”

“주, 주, 주……, 죽었나 봐.”

그 순간 창문 밖 남자도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떨어졌다. 우드득 툭 탁 하는 소리. 뒤이어 둔탁한 소리가 났다.

숙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래를 보며 소리를 지른다.

인희는 그 소리에 이끌려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자는 아마도 상자 쌓아놓은 곳 위로 떨어진 모양이다. 무너진 상자더미 속에서 팔다리를 휘어적거리며 나오는 모습이 보안등 불빛에 선명히 보였다.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건물 바로 앞에 심어놓은 나무 옆 풀밭에 널브러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남자 옆에는 부러진 잔가지와 나뭇잎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남자는 엎드러진 채 약간 움직거리는 듯했다. 아래로 떨어지면서 마침 그 아래에 있는 나무의 가지들에 걸려 미끄러지듯이 옆으로 떨어져 내린 덕에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인희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홱 돌려 숙소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숙소 안으로 들어가 인희는 급히 바지와 윗도리를 걸치더니 옷걸이에 있던 옷 일부를 가방에 쑤셔넣고는 베개 옆 작은 상자에 넣어두었던 여러 잡동사니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에 던져넣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들고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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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팔덕은 아침 일찍 봉제공장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인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팔덕은 어디를 가든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전화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밤중 인희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숙소에서 자던 여직원들이 깨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일들. 두 사람이 창밖으로 떨어졌는데 한 사람은 멀쩡했고, 또 한 사람은 많이 다치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 여기까지는 그 공장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 인희가 옷과 가방을 들고 뛰쳐나갔다는 것. 그 뒤는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이 사실이 팔덕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팔덕은 머리에 맷돌이 올려진 느낌이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 애가 또 말썽을 부렸구나. 지난번에는 공장에 불을 내고 사람이 죽고 여럿 다치더니, 이번엔 그나마 다행이지만 공장 안이 얼마나 뒤집혔을까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뛰쳐나갔다니!

팔덕은 자기 짐이라고 여기고 무겁게 일어나 호텔 일을 대강 정리한 뒤 군포로 향했다.

팔덕이 봉제공장으로 들어서자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준 박 주임이 벌떡 일어섰다.

“어서 와라.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했다.”

박 주임은 공장의 상황을 대강 설명하고 나서 인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아이가 어디 갈 만한 데는 없니? 아직 어린 애가 충격이 심했을 거야.”

팔덕은 고개를 흔들었다. 인희가 고향 해곶으로 갈 리는 없다. 그렇다고 성수동 인쇄소로 갈 리도 없고. 아마 그곳으로 가는 길도 모를 것이다.

“어떡하냐? 이곳 지리도 잘 모를 텐데.”

박 주임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덧붙였다.

“아 참, 오늘 너보다 먼저 어떤 사람이 여기 찾아왔었다. 인희를 만나겠다며. 그래서 여기에서 벌어진 일을 대강 설명하고 인희가 뛰쳐나갔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주저앉더라. 그리고는 네 연락처 알고 있으면 알려줄 수 있느냐 하기에 모른다고 했어. 그 사람 너하고 무슨 관계냐? 아주 멀쑥해 뵈는 30대 남자인데, 그 사람이 명함을 주더라. 이름이 송정민. 무슨 인쇄소인데…….”

“송정민? 저도 모르는 사람 같은데요. 그 사람 언제 왔었습니까?”

“너 오기 바로 직전이야. 아주 크게 낙담하는 것 같더라. 완전히 혼이 나간 사람처럼 되어서 돌아갔는데……. 아, 저 밖에 나가면 우리 공장 안쪽에 직원들 쉬는 벤치 있지? 거기 가서 앉아 있는 것 같던데…….”

박 주임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서며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킨다.

“저기 저쪽 말이야. 한번 가봐.”

팔덕은 박 주임이 가리키는 창으로 가서 밖으로 내다보았다.

흰 페인트로 칠해 놓은 벤치 위에 실의에 빠진 한 남자가 이쪽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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