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희가 겨울을 두 번 보내고 난 그 다음해 봄, 인희는 이제 제법 처녀티가 나고 있었다.
목포 어느 관광호텔 사장이라는 분이 직원 둘을 데리고 동화책과 학용품, 장난감을 들고 가거도를 찾아왔다. 이들은 군용 지프를 타고 대리마을 국민학교를 거쳐 항리분교와 대풍분교까지 올라왔다.
대풍분교의 나이 드신 남자 선생님이 인희에게 선물들을 받아 교실에 잘 정돈해 놓으라고 했다. 호텔 사장이 학생들에게 나눠주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뒤 사장이 교단으로 나와서 선생님하고 악수한 뒤, 학생들 한 명 한 명 앞으로 나오게 하여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선물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두 명까지 진행되었을 때 인희가 선생님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도중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선물더미 쪽으로.
와르르르.
선물도 쏟아지고 인희도 쓰러졌다. 선생님이 달려와 인희를 일으키고 선물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았다. 호텔 직원이 달려왔다. 인희는 얼굴이 새빨개져 허둥지둥하며 선생님을 도와 선물들을 쌓았다. 선생님은 사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인희는 고개만 숙일 뿐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인희는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 사장이 인희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는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인희는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선물 전달식이 끝나고 사진도 찍은 뒤에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인희는 밖에서 호텔 직원과 함께 이것저것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다.
사장이 교실 밖으로 나오더니, 안에서 따라 나오려는 선생님에게 손을 들어 막고는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사장이 직원들 쪽으로 와서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발자국 걷더니 사장이 돌아서서 인희를 바라본다. 그러더니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다시 돌아서서 걸어갔다.
인희는 멀어져 가는 사장의 등 뒤로 고개를 숙였다.
그 다음 주에 목포 관광호텔에서 직원이 찾아왔다. 선생님이 인희에게 밖에 나가 만나보라고 했다.
“송인희 씨죠? 저희 사장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인희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 선물 전달할 때 많이 놀라셨죠? 저희 사장님이 걱정하시더라고요.”
인희는 얼굴이 빨개졌다.
“저, 혹시 저희 호텔 식당에서 일하실 생각이 있으면 오십사고 사장님이 말씀을 전해 달라십니다. 오늘 당장 정하라는 것은 아니고……. 다음 주에 제가 다른 일로 다시 이곳에 올 건데, 그때 마음이 있으면 저하고 같이 올라가시면 됩니다. 혹 이곳에서 정리할 일이 있으면 더 천천히 올라오셔도 되고요.”
2
인희가 목포의 그 관광호텔 식당에 도착한 것은 연중 가장 화려하다는 5월이었다. 인희는 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 이것이 인희가 이력서에 쓸 수 있는 단 한 줄의 글이었다. 편물공장이나 봉제공장은 이력서에 자리 잡을 자격이 없었다. 학교 졸업 이후 그때까지의 세월은 공백이었다. 누가 이 여인을 받아줄 것인가?
매니저라는 사람이 이력서를 받고 들여다보았다. 오월의 화려함은 꽃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희의 얼굴은 이 세상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붉은 색감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인희보다 매니저가 더 민망해 했다. 사장의 지시였으니 받지 않을 수는 없을 터.
인희는 해곶을 떠나온 지 5년이 지났다. 학교에 다녔다면 고등학교 3학년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앳돼 보였다. 그 눈망울이나 행동가짐도 그러했다. 그 행동이 서툰 것이 아니라 가녀렸다. 겨울을 두 번 나도록 바닷바람을 맞았을 텐데 얼핏 보아서는 그러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인희가 맡은 일은 주방청소와 식당정리. 그러나 사실 인희는 잉여인간이었다. 다른 사람이 다 한 일을 한 번 더 반복하거나, 조금 남겨진 일을 겨우 마무리하는 정도였다. 그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인희는 유니폼을 입고 끊임없이 식탁 사이를 돌고, 주방과 복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부지런히 쓸고 닦았다.
인희는 이 호텔에 와서 처음에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화려함. 그 이상 어떻게 표현하랴. 열여덟 살 살아오는 동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곳에서 보았다. 호텔 내부와 외부, 네온사인, 실외수영장, 특히 밤에 불 켜진 수영장은 환상과도 같았다. 그리고 나이트클럽과 그곳에서 울려나오는 음악, 악기 연주자들……. 이 모든 것이 인희에게는 먼 이국의 장면들 같았다. 손님들도 똑바로 바라보기에는 너무 눈이 부셨다. 영화배우도 있다고 했고, 유명가수도, 정치인도, 서양인도, 군인도, 심지어 흑인도 있었다. 음식은 또 어떤가. 산해진미라는 말을 어디에선가 들은 것 같다.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직원들 말에 의하면 목포의 관광호텔이 서울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제일 규모도 크고 화려하다고 한다. 인희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빌려 읽은 신데렐라 동화가 생각났는데, 자신이 바로 신데렐라였던 것이다.
이렇게 몸은 힘들지만 꿈결 같은 시간을 한 주 남짓 보냈을 때 매니저가 위쪽의 지시라며 제주도로 가라고 했다.
이곳 김 사장은 호텔사업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동업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동업자는 자금력도 막강한데다 중요 정치인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을 강 회장으로 불렀는데, 그가 정부 고위층을 업고서 제주도 서귀포에 새로운 관광호텔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건축공사는 잘 진행되어 가다가 인희가 목포로 왔을 때쯤에는 지연되고 있는 상태였다. 호텔 사장은 서울에도 큰 사업체가 몇 있다고 한다. 운수업과 건설업 등. 그러나 강 회장의 권유에 억지로 목포 호텔사업에 끼어들었다가 지금까지 손해는 보지 않았지만 힘겹게 끌고 나가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 말로는 김 사장이 호텔을 포기하지도 더 끌고 나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이었고, 그 때문에 서울의 사업들도 지장을 받는 모양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직원들도 많이 불안해 하고 있었다.
인희는 몇몇 직원과 함께 목포에서 화객선(貨客船)을 타고 제주항에 도착한 뒤 두 대의 군용 지프 개조한 차를 타고서 제주 서해안을 따라 서귀포에 도착했다. 천지연 폭포 근처 숲속에 덩그마니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아직 도로나 주변 조경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치권과 연결되어 있기에 급하게 서두르다 자금을 비롯한 여러 사정 때문에 잠시 멈춘 상태였던 것이다.
인희 일행이 그곳에 도착해서 들은 말에 의하면 며칠 뒤에 귀한 손님들이 와서 공사현장을 둘러본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이 2~3일 묵고 갈 수 있게 객실 몇 개를 치장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희는 주로 청소하는 일을 맡았다. 객실 4개와 작은 식당, 그리고 주방. 객실에는 각각 침대 2개씩. 객실과 식당 내부 장식은 현지 직원들이 맡았고, 목포에서 간 직원들은 주로 접객업무를 맡았다. 안내, 요리, 청소 등.
이곳저곳 다니며 청소를 하면서 인희는 흘러나오는 여러 말을 들었다. 회사의 자금이 많이 달린다는 것, 자금줄인 강 회장이 무슨 이유인가로 김 사장을 외면한다는 것, 그 바람에 정부 쪽에서도 무엇인가 부정적인 암시가 오는 것 같고, 사장은 정부 대신 강 회장을 통해 일본의 재일교포 자금을 들여오려는 모양이라는 것 등등. 인희는 그러한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는 너무 먼 이야기들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손님들은 왔다가 돌아갔다. 장관도 있었고, 국회의원도 있었고, 은행 사람도 있었고, 경무대에서 얼마 전 이름이 바뀐 청와대에서도 사람이 왔다고 한다. 그 중에는 강 회장이라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인희는 이들을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을 뿐이다.
아무튼 이렇게 법석을 떨었어도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김 사장의 표정이 어두웠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김 사장은 어떻게 해서든 재일교포 쪽으로 잘 연결되어 있는 강 회장을 붙잡아 그들 자금에 손을 벌릴 모양이라고 한다.
직원 한 사람이 주방청소를 하고 있는 인희에게 와서 사장이 식당에서 부른다고 한다. 인희는 사장을 목포 있을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가 서귀포에 와서는 먼발치에서만 보고, 혹 저만치 지나가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이 전부였다. 인희는 겁이 덜컥 났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식당으로 가자 사장이 손으로 오라는 동작을 한다. 인희는 식탁 앞에 가서 섰다. 사장은 앉으라는 듯이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킨다. 인희가 그쪽으로 가서도 앉지 못하고 두 손만 모은 채 가만히 서 있었더니 사장이 입을 연다.
“거기 앉아요.”
인희가 의자 끄는 소리라도 날까 봐 조심조심 잡아당겨 한 손으로 치마를 쓸면서 앉는 동안 사장은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사장이 담배를 입에 물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힘들지 않았나?”
인희는 고개를 숙이고 아니라고 대답은 했는데 그것이 말로 되어 나왔는지는 자신도 잘 모른다. 아마도 말을 하는 동시에 살짝 고개를 흔든 것이 더 답 같아 보였을 것이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내가 부탁이 있는데……. 일본에 좀 가줘야겠어.”
“…….”
인희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며칠이면 돼. 한 사흘……. 그 정도 될 거야.”
인희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들어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 유리창으로 눈길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깥 풍경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권이나 비자 문제 때문에 시간이 급해서 우리 직원들이 도와줄 거야. 김 상무한테 말해 놨으니까 알아서 다 처리해 줄 거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몸은 괜찮은 거지? 힘들지 않아?”
인희는 고개를 다시 숙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 소리가 사장에게 들렸는지는 의문이다. 김 상무는 매니저를 뜻한다. 사장의 고향인 경기도 어디에서 올라온 먼 조카뻘 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담배를 비벼끄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한다. 너 일본 가는 것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이것은 나하고 김 상무, 그리고 너만 아는 거야. 알겠니?”
인희는 고개를 들고 사장을 보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는 김 상무가 말해 줄 거다.”
인희는 제주도에 올 때는 그 이국적인 풍경이 새롭고 놀라웠으나 다시 목포로 올라갈 때는 마음이 무거웠다. 올 때의 설렘은 간 데 없고 왠지 불안한 마음이었다. 제주의 맑고 온화한 공기도 가슴 속으로 들어올 때는 축축하며 답답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가거도에서 목포로 올 때, 목포에서 서귀포로 올 때, 그리고 이제 목포로 올라갈 때, 이렇게 방향이 바뀔 때마다 인희에게는 전혀 다른 기대감과 불안감이 크게 교차했다.
게다가 여권이나 비자라는 말은 마치 외국어 같았다. 외계인의 언어 같았다. 일본이라는 말도 평소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으나 이 역시 무척 낯선, 영어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일본이 어디 있는 나라지……?
3
그리고 나서 2주 후, 인희는 매니저인 김 상무와 또 다른 한 사람,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말한다는 중년부인과 함께 지프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도로사정이 안 좋은 남해안 길을 고불고불 달리면서. 운전은 매니저가 직접 했다. 매니저는 그 부인을 박 여사라고 불렀다.
그 2주 동안 인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희가 제주도에서 목포로 돌아오자 매니저는 짐을 모두 싸라고 했다. 그리고는 목포 변두리의 조그만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 뒤 인희를 데리고 미장원에 가서 단장을 하게 한 뒤 사진을 찍고, 도장을 만들고, 동사무소에 가서 인감을 등록하고, 지문을 찍고, 여러 서류를 떼고, 여기저기에서 옷과 구두 그리고 가방 등등을 사주었다. 화장품까지 사준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2주 남짓 일한 봉급과 얼마 안 되는 금액이라며 용돈까지 주었다. 남들한테는 얼마 안 되는 금액일지 몰라도, 2주 봉급까지 합하니 인희에게는 엄청 큰 돈이었다. 그런 뒤 일주일 만에 여권이 나왔다. 비자와 함께. 모두 강 회장이라는 분이 정부 쪽에 힘을 써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매니저가 말해 주었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에 매니저가 몇 가지 말을 해주었다. 인희는 이제 더 이상 호텔에서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 호텔을 나온 뒤부터 있었던 모든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것. 사장이 인희를 무척 아끼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하지 말고 지시에만 잘 따르면 별일 없을 것이라는 것 등등.
인희는 꿈속을 지나는 것 같았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뿐만 아니라,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까지. 거울 속의 인희는 자신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인희 자신도 몰라보았으니까. 거울 속의 사람은 해곶의 배곯았던 그 어린애도, 서울과 그 주변을 떠돌았던 혼비백산한 몰골의 계집아이도, 가거도 거친 바닷바람 맞으며 세상에서 잊혀졌던 소녀도 아니었다. 다소 앳된 듯하긴 하지만 화사하고 단아한 모습의 처녀. 인희는 거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인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이 아닌 저 거울 속 여자는 누구일까? 왜 자신 앞에 나타나 있는 걸까? 마음이 갑자기 흔들렸다.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인희는 잠시 마음을 진정한 뒤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들어 거울 속 사람의 뺨을 만졌다. 인희는 오른손을 들었는데 거울 속 사람은 왼손을 내밀었다.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너는 왼손잡이구나. ^^ 인희가 자기에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자기도 인희에게 똑같은 미소로 답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마주 닿았다. 뺨이 아니었다. 인희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거울 속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 소리도 없는 거울 속의 세상. 그곳도 세상인데 왜 말이 없는 거지……? 인희는 자신이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해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세상은 다르지만, 인희에게는 이쪽 세상이나 거울 속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울 속의 인희는 누구에게서 아무런 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 원래 말이 없는 세상이니까. 인희도 말을 할 필요 없고. 말도 소리도 없는 저곳. 저곳으로 들어갈 수 없을까. 앞을 모를 이 현실보다 소리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도 없는 저곳이 자신에게는 더 어울린다고 인희는 생각했다.
갑자기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인희는 거울에서 손을 떼고 옷 앞쪽을 살짝 쓰다듬어 내린 뒤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밖에는 목포에서부터 함께 온 박 여사가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비행기 화장실에서 왜 그렇게 오래 있어? 걱정했잖아. 속이 안 좋아?”
“아녜요. 괜찮아요.”
인희는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아, 그전에 인희는 화장실 거울 옆에 붙어 있는 조그만 종이에 눈을 한번 주었다. 시가 적혀 있는 종이. 이상 시인의 ‘거울’이라는 시.
거울 (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오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오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오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오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오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오
잘은모르지만외로운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또꽤닮았오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비행기 안은 생각보다 비좁았다. 부산공항의 그 소란함을 지나 알 수 없는 여러 절차를 거쳐 비행기에 오른 뒤 인희는 이 느낌이 가장 먼저 떠올랐었다. 비행기라는 말에서, 또 어쩌다 저 높은 곳을 지나는 비행기를 보았을 때마다 비행기는 환상 그 자체였다. 인희는 감히 그러한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비행기가 나는 하늘만큼이나 저 먼 세상의 비행기. 여권을 만들고 부산으로 향하고 하는 그러한 과정에서도 자신이 실제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엄청난 부자들만 탄다는 비행기. 동화 속 세상보다 더 먼 세상인 그 비행기에 올라타는 순간 인희는 설레임보다는 답답함이 먼저 느껴졌다. 좌석에 앉았을 때는 더욱 불편했다. 앞을 알 수 없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서 오는 불편함이 아닌 공간에 대한 불편함. 해곶 앞바다 하늘도 넓었고, 가거도 산길 위 하늘은 더 넓었다. 그곳에서는 돈 한 푼 내지 않고도 그 넓은 하늘을 인희 혼자 다 가질 수 있었는데, 인희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많은 돈을 들였을 이 비행기 안, 그리고 특히 좌석은 너무 좁았다.
버스처럼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에 두 좌석이 길게 나 있었다, 비행기 안은. 인희는 창 쪽, 그리고 박 여사는 복도 쪽에 앉았다. 매니저는 공항에서 두 사람이 출국장 안으로 들어갈 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떠났겠지.
부산공항에서 두 사람이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매니저는 인희에게 일본 돈 엔화 약간을 주면서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일본에 도착하면 여권을 박 여사에게 맡기라고 하며, 혹 인희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리면 큰일 난다고 했다. 그리고 박 여사는 일본에서 머물 숙소라며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주면서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하라고 말을 했다.
오사카 남쪽의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뒤 비행기에서 내려 기다란 줄을 서서 입국수속을 하고 공항을 나오는 동안 인희는 정신이 완전히 나갔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란한 일본어 소리, 붐비는 사람들, 무슨 뜻인지 모르게 나오는 안내방송.
박 여사에게 이끌려 입국장에서 나와 개통된 지 얼마 안 되는 오사카 시내로 가는 공항열차에 올라탈 때까지의 어수선함은 그러나 열차가 출발하면서 잦아들었다. 인희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일본의 낯선 풍경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모나쿠 난바데스.”
열차의 안내방송이 나오자 박 여사는 인희에게 눈짓을 한다. 일어나라는 뜻인데 인희는 순간적으로 머뭇거렸다.
박 여사가 입 모양으로만 ‘일어나’ 하고 알리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에 내리자 또다시 사람들의 인파에 휩싸였다. 일본인의 얼굴 모습은 한국인과 비슷하지만 어딘지 다르기도 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넥타이는 없이 흰색 반팔 와이셔츠였고, 여자들은 다양한 양장을 깨끗하게 입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간혹 기모노를 입고 자분자분 걷는 나이 든 여인들도 있었다.
4
일본 내에서 재일교포가 가장 많이 산다는 오사카 시내 중심지로 나온 인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본 제2의 도시라고 하는 오사카의 높이 솟은 고층빌딩 숲과 그 아래로 정신없이 얽혀서 지나가는 자동차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인들이 쓰고 다니는 알록달록한 양산이 인희의 눈길을 끌었다. 할머니에게도 저런 양산이 있었으면…….
박 여사는 택시를 불러서 탔다. 한국과 달리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차들도 한국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인희는 모든 것이 생경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게 여겨졌다.
택시는 해안을 끼고 서쪽 방향으로 달려 고베 조금 못미처에 있는 아시야라는 도시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어느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가더니 조그만 상점 앞에서 택시는 멈추었다.
박 여사는 상점 앞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일본어로 말을 하다가 곧 한국어로 바뀐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가죠.”
박 여사는 인희에게 와서 택시에서 내려놓은 가방을 들고 말을 했다.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사람이 마중 나올 거야.”
두 사람은 상점 옆으로 나 있는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5분여를 걷자 맞은편에서 기모노를 입은 한 여인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먼 길 고생하셨어요.”
그 여인이 가까이 와서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한다. 한국인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네요. 잘 지내셨어요?”
박 여사가 대꾸한다.
“힘들진 않으셨어요?”
두 사람은 꽤 친분이 있는 듯 서로 반갑게 맞이한다.
“여기는 이니상.”
박 여사가 인희를 돌아보며 소개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니상. 말씀은 들었어요. 오시느라 더운데 고생하셨죠?”
여인은 상냥하게 인사하며 말을 한다.
인희는 목례를 하면서 자그마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를 숙였다.
기모노 여인을 따라서 두 사람이 간 곳은 아담하면서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있는 이층집이었다. 집 안에 들어가 안내해 주는 대로 좁은 계단을 따라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다미가 정결하게 깔려 있는 방이 나왔다.
방 한쪽에는 좁은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흰색 도자기 항아리에 향이 몇 개 꽂혀 있었다. 그 옆으로는 역시 자그마한 청회색 화병에 희고 붉은 꽃 몇 송이. 벽에는 한자로 알아보기 어렵게 쓴 좁다랗고 길쭉한 족자, 그리고 해안가와 바다와 흰 파도거품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는 조그만 묵화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을 이층으로 안내해 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기모노 여인이 물수건 두 개가 담긴 조그만 나무받침과 부채를 들고 다시 올라왔다. 그렇잖아도 얼마 안 되는 거리를 걸어왔는데도 이마와 목과 겨드랑이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어서 물수건이 반가웠다. 워낙 습하고 더운 날씨이기도 했지만 묵직한 가방을 들고 온 탓 같았다.
그날 저녁식사 후에 박 여사와 인희는 밖으로 나가 다시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 고베 시에 있는 호텔이었는데, 겉에서 보면 규모가 작을 것 같았으나 안으로 들어가니 꽤 넓은 로비가 나왔다. 게다가 아주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박 여사가 기모노를 입은 여종업과 무슨 이야기인가를 주고받았다.
여종업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두 사람은 로비에 있는 널따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여종업원이 다시 나타나서 다가오더니 박 여사에게 열쇄를 주면서 무슨 이야기인가를 했다.
박 여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서더니 인희에게 손짓으로 일어나라고 한다.
인희는 조심조심 일어나서 박 여사를 바라보았다.
박 여사는 인희의 눈을 외면하고 몸을 돌려서 복도 쪽으로 걸어가면서 따라오라고 나직이 말을 한다.
그러나 인희는 그대로 서 있었다.
박 여사는 뒤돌아보며 소리는 내지 않고 입으로만 재촉한다.
인희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따라가면서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5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곳은 3층이었다.
박 여사는 약한 조명이 비추는 복도를 앞장서서 걸어갔다. 두 사람이 멈춘 곳은 복도 왼편의 제일 끝 방 앞이었다.
박 여사가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문 안쪽 입구 천장에서 흐릿한 전구 하나가 빛을 내리 비추었다. 박 여사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자 환히 밝아지며 방 안이 보였다.
박 여사는 인희를 돌아보며 고개와 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한다. 그러나 인희는 그대로 서 있었다.
박 여사는 안으로 들어가서 휘둘러보고는 다시 나왔다.
“왜 안 들어와?”
목소리에 약간 역정이 들어가 있었다.
인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박 여사가 다가와 손을 잡는다.
“괜찮아. 들어와.”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인희는 또다시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천천히 따라 들어갔다.
복도에서 얼핏 보며 느꼈던 것보다 방 안은 훨씬 넓었다. 그리고 에어컨이 켜져 있었는지 덥지 않았다.
방 전체에는 연녹색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에 정사각형의 또 다른 폭신한 느낌의 연회색 카펫이 얹혀 있었고, 그 위에 커다란 소파 세트가 별도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전축과 레코드 꽂이에 꽂힌 여러 장의 레코드판, 텔레비전, 아담한 화장대와 거울, 옷장, 그 옆에는 고급스런 나무 옷걸이, 벽시계, 큼직한 냉장고, 창문 위쪽에 에어컨, 라디오, 전화기, 야광시계, 기모노와 소매가 넓은 일본식 남자 화복인 유카타가 각각 두 벌, 물병과 잔 몇 개가 놓인 쟁반, 흰 도자기 접시에 놓인 물수건 두 장, 작은 선풍기, 찻잔 세트와 도자기 주전자, 접이식 쥘부채 두 개, 목욕타올 세트, 화사한 꽃과 오사카 성 사진이 들어 있는 달력 등등이 보기에도 적절한 곳에 단정히 놓여 있었다. 창문에는 고운 모시 커튼이 처져 있었는데 일본의 화식 대나무 그림이 푸른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방 저편에는 창호지 미닫이문이 양쪽으로 열려 있었는데, 밑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눈부실 정도로 흰 이불이 베개와 함께 길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의 벽에는 일본 여인이 기모노를 반쯤 벗은 상태로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 연분홍 벚꽃을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인희가 방으로 들어가자 박 여사는 인희 뒤로 돌아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방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하나하나 확인하듯이 이것저것 만져보고 냄새 맡고 하며 둘러보았다.
박 여사는 마지막으로 미닫이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이쪽저쪽을 살폈다.
그런 뒤에 인희 가까이로 와서 방문 옆쪽의 회색빛 대나무 무늬가 들어간 유리문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깨끗이 목간하고 나와서 저 잠옷으로 갈아입고 기다리면 돼.”
그 목소리에는 지금껏 없었던 명령조가 들어가 있었다.
그런 뒤 박 여사는 에어컨 쪽으로 눈을 한번 주더니, 인희를 외면하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6
인희는 선 채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몰랐다.
사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다리가 아팠다. 힘이 들었다.
인희는 소파에 가서 앉았다.
들고 온 핸드백은 옆에 놓았다.
그리고는 눈을 들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깔끔하면서 은은한 멋이 풍겨지는 방이었다.
인희는 평생 살아보지도, 자보지도 못할 것 같은 방.
해곶의 벌레 기어다니던 냄새 나고 눅눅하고 침침하던 그 방이 떠올랐다.
인희는 고개를 숙였다.
허리가 앞으로 꺾였다.
가슴을 무릎까지 파묻고 인희는 얼굴을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인국, 할머니, 해곶의 너른 개펄, 뒷산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던 아이들, 그 속에서 인희도 보였다.
한밤중 요강 비우러 밖에 나가서 올려다보던 밤하늘.
은하수는 왜 그렇게 슬프게 흘러내렸는지.
별들도 참 많았어.
여름밤엔 견우직녀, 겨울밤엔 방패연과 그 가운데 있는 삼태성이 참 밝게 떠올라 있었지.
북두칠성은 또 어떻고.
그 커다란 국자에 고기국물 듬뿍 떠서 인국의 그릇에 가득가득 따라주었으면…….
은하수 이쪽저쪽으로 나누어 인국과 어느 쪽의 별이 더 많은지 경쟁하며 세어보기도 했지.
인국은 늘 자기 쪽에 별이 더 많다고 우겨댔다.
서로 구역을 바꾸어 세어보기도 했으면서.
저 건너 으르렁거리는 소리 울려오는 시커먼 바다 위로 별똥별은 참 많이도 떨어졌다.
기다랗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별똥별 하나에 소원 하나 빌어야 한대서 많고 많은 것들 하늘에다 주문했었지.
어떤 때는 너무 많은 별똥별이 한꺼번에 떨어져서 하나하나에 소원을 다 못 빌어 엄청 손해 본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었고.
할머니……. 어느 봄날 할머니와 뒷동산 너머 무덤가에 가서 쑥을 캐다가 할미꽃 하나가 살며시 올라온 것을 보았다.
아이고, 왜 이리 일찍 나온겨. 춥지도 않아?
할머니는 인희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이 할미가 할미꽃 얘기 하나 해주련?
나도 알아요, 할머니.
인국이 삐죽 대답한다.
에그, 니들이 아는 그런 얘기가 아녀. 내 할미꽃 얘기 못 들으면 할미 할애비도 못 되고 일찍 죽는다, 얘.
그럼, 해주세요. 나 할머니 될 때까지 살래. 할머니도 그때까지 살아야 해.
에그머니나. 그렇게 오래 살면 안 뒤야. 할미들이 빨리 죽어야 젊은 할미들이 안 힘들지.
할미꽃 얘기 해줘요.
그랴…….
옛날 옛날에 할미 호랭이가 있었는데…….
이 호랭이가 자식이 없었어…….
그래서 새끼 호랭이를 훔치려고 여기저기 다녀봤는디…….
온 산을 다 뒤져도 새끼 호랭이는커녕 쥐새끼도 안 보이는 거여…….
그래서 삼천리 방방곡곡 산을 뒤지고 뒤지고 또 뒤지고 다녔지…….
그러다 저 멀고 먼 중국 땅까지 간겨…….
할머니, 할머니, 저 바다 건너가 중국 땅이랬잖아…….
에구, 좀 가만히 있어 봐. 저 건너 말고, 저짝, 저 북극성 있는 쪽 말이야…….
인희와 인국은 할머니 손가락을 따라서 북쪽을 쳐다보았다.
글쎄, 그 중국 땅에 갔더니 그곳에는 새끼 호랭이가 너무 많은 거야…….
이짝에도 득실, 저짝에도 득실…….
이산 저산 모두 새끼 호랭이 천지였지 뭐여…….
그래서 할미 호랭이는 고민에 빠졌어…….
어떤 새끼 호랭이를 고를까…….
이짝으로 할까!
할머니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얼굴을 내밀고 인국을 쳐다보는 바람에 인국은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저짝 호랭이로 할까!
이번에는 할머니가 인희 쪽으로 얼굴을 돌려서 내밀었다.
에그머니나!
인희는 얼굴을 뒤로 젖혔다.
그런 뒤에 할머니는 인국과 인희를 번갈아 돌아다보며 이짝으로 할까, 저짝으로 할까를 몇 번 반복했다.
그렇게 할미 호랭이가 3년을 고민하다 보니 새끼 호랭이들이 죄다 도망가고 없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나니까…….
이 할미 호랭이는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갔대…….
그래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앉아 있다가 굶어죽고 말았다는 게야…….
그리고 겨울이 와서 눈이 쌓이고, 다시 봄이 되어 눈이 녹았는데…….
글쎄, 할미 호랭이 시체는 안 보이고 그 자리에서 꽃이 하나 피어올랐대요…….
늙은 호랭이 할미꽃이…….
거짓부렁!
인국이 자기 얼굴을 할머니 쪽으로 가까이 갖다대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인희는 꿈꾸는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고.
할머니, 옛날 얘기 또 해줘…….
인희는 할머니에게 팔짱을 끼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인희는 마음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철커덕!
인희는 깜짝 놀라서 윗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세웠다.
문 밖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
인희는 엉겁결에 문 쪽으로 돌아다보았다.
눈물 어린 눈으로.
문이 열리면서 환한 불빛 아래로 유카타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강 회장.
분명했다.
호텔 직원들이 그 사람이 강 회장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었다.
지난번 서귀포에서 확실히 보았다.
그가 인희를 바라보며 김 사장과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 광경은 마치 신발 속의 모래알처럼 인희의 마음에 불편하게 남아 있었다. 게다가 여권 발급 때도 그 사람 이름이 한 번 더 언급되어서 어딘지 불안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반백의 머리에 족제비 같은 얼굴. 금테 안경.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