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포 관광호텔 직원이 손님과 아침식사를 하는 매니저에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직원은 매니저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상무님, 국제전화가 왔습니다. 일본에서…….”
누구야? 하듯이 매니저는 직원을 돌아다보았다.
직원이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매니저는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원은 매니저를 이끌고 식당 프런트 쪽으로 갔다.
매니저가 빨리 말하라고 채근하듯 직원의 팔을 잡는다.
“강 회장님 비서입니다. 급한 일인가 봅니다. 빨리 받아보셔야겠습니다. 일이 좀 꼬인 것 같습니다. 사장님을 찾으시는데, 지금 서울 가셔서 안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매니저는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마에 주름살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직원이 송화구를 손으로 막고 있다가 매니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다시 손을 떼고서 전화기에 대고 말을 한다.
“지금 들어오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직원이 전화기를 매니저에게 내밀었다.
“여보세요……. 아, 저 김 상무입니다……. 네……. 네? 잠시만요.”
매니저는 송화구를 손으로 막고 직원들에게 나가 있으라는 손짓을 한다.
사무실에 혼자만 남자 매니저는 송화구에서 손을 떼고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기다리죠.”
매니저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난감한 표정이었다.
몇 초 뒤,
“아, 예, 저 김 상무입니다, 회장님…….”
매니저는 귀에서 수화기를 조금 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 아, 아, 아닙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아닙니다. 절대 그게…….”
매니저는 다시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다.
“…… 아, 사장님요? 어제 아침에 서울에 가셨습니다. 내일이 되어야 오실 텐데요……. 예, 예, 예, 알겠습니다. 바로 전화 드리시라고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 아닙니다. 절대로……. 제가 곧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매니저는 귀에서 수화기를 조금 떼고 양미간을 찌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회장님…….”
매니저는 몇 번 더 여보세요를 반복하다 머리를 저으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넥타이 목을 느슨하게 풀었다. 후유―. 좀 살 것 같았다.
매니저는 책상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이 일을 어쩐다…….
일이 크게 잘못되고 말았다.
어쩐지 좀 그렇게 될 것 같더라니까……. 그러게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나 저러나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한다? 보통 일이 아닌데.
매니저는 머리를 저었다.
김 사장은 전화기를 손에 든 채 말이 없었다. 한 은행 지점장과 아침 골프를 치려고 나가려던 참에 목포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사장님……, 사장님……. 여보세요…….”
수화기에서는 김 상무가 혹 전화가 끊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부르는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중에 전화할게.”
김 사장은 대답도 듣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호텔 문 닫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다른 사업들도 온전치 못하게 된다. 연속 담보가 잡혀 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눈을 감았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시키는 게 아니었어……. 그 족제비 같은 놈이 하도 졸라대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마음이 내키지 않았었다. 내 딸보다 어린 애를…….
그건 그렇고 앞으로 세 달, 아무리 길게 잡아도 다섯 달 이상은 못 버틴다.
애초에 그놈하고 손잡은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김 사장은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2
인희가 호텔에서 도망쳤다. 강 회장이 노발대발하여 박 여사가 묵고 있는 집으로 전화해서 불같이 화를 냈다. 계집애가 도망간 것보다 자신의 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에 더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사실 강 회장은 목포와 서귀포 호텔을 몽땅 날름 먹어볼 요량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동업을 하면서 사업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발을 뺀다. 아니, 빼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애가 타게 된다. 목포 호텔은 큰 재미는 못 봐도 그런대로 장사는 된다. 그러나 서귀포 공사가 늦어지며 은행과 문제가 발생하면 결국 목포 호텔을 더 담보 잡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자금력이다. 김 사장이 어느 정도 버틸 힘이 있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김 사장이 자신의 다른 사업체를 통해 자금을 동원하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강 회장은 그것을 지켜보며 계산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부 쪽에 슬며시 정보를 흘린다. 일을 더 키우는 것이다. 정부 자금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은 눈치를 김 사장에게 주는 것이다. 지금 막 혁명정부를 세운 청와대 쪽에서는 민간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지역개발을 통해 민심을 얻을 필요가 있다. 서귀포는 그 좋은 대상이 될 수 있다. 천혜의 휴양지가 될 가능성이 많은 곳이니까. 그곳을 개발해서 지역민심도 사고 정치자금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 사장에게도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된다. 마음이 크게 동하겠지. 강 회장은 이를 부채질해서 더욱 일을 키운다. 서귀포 호텔 규모를 처음 계획보다 대폭 확대하는 것이다. 당연히 자금이 더 필요해진다. 강 회장이 은행을 더 소개해 주고 정부 인사들을 동원해서 은행에 슬쩍 압력도 넣는다. 청와대와도 연줄을 맺는다.
그리고 나서……. 호텔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청와대에 부정적인 눈치를 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은행은 자동적으로 등을 돌리게 된다. 바로 여기까지는 진행이 잘 되었다. 김 사장이 강 회장의 계획을 눈치챘겠지만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다. 결국 강 회장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강 회장은 자신과 연줄 있는 재일교포들의 자금으로 목포와 서귀포 호텔을 장악한 뒤, 정부 쪽에다 일본 재일교포들과의 교류가 앞으로 혁명정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설득해서 다시 국내 자금을 지원받는다. 이때쯤이면 이미 김 사장은 호텔은 물론 다른 사업에서도 밀려난 상태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마음이 급한 김 사장에게 눈치를 주어 나이 어린 듯하고 예쁘장한 아이와 재미를 보려 한 것이 그러나 망신으로 끝나고 말았다.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3
인희는 무작정 호텔을 나왔다. 한국에서도 집이나 공장 외부의 사정을 잘 모르고 살았던 인희가 일본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인희는 걸었다. 다리가 아파서 더 걷지 못할 때까지 걸었다.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일본 주택가의 가로등 여기저기에서 길을 조금 밝힐 뿐 대부분의 집에서는 불들이 하나 둘 꺼져가고 있었다.
인희는 불빛을 찾아서 걸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밝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제 어둠은 싫었다. 밝은 곳.
갑자기 저 멀리서 가로등이 한 줄로 달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로 향했다. 찻길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 아마도 바다 같았다. 저 너머 아련한 곳에 깨알 같은 불빛들이 별처럼 깔려 있었다. 수평선 먼 쪽에서.
인희는 도로가 보이는 곳까지 갔다. 왕복 2차선 도로. 그 양쪽에 좁은 인도가 있었다. 인희는 인도로 들어갔다. 많은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빠른 속도로 지나고 있었다. 해안도로 같았다. 그 너머는 컴컴한 나무숲.
자동차가 뜸한 때를 골라 인희는 도로를 건넜다. 가로등 덕분에 주변은 제법 환했다.
인희는 인도 옆으로 가지런하게 난 풀밭을 가로질러 바다 쪽으로 향했다.
바다가 좋았다. 바다는 인희의 고향이다. 해곶의 바다, 가거도의 바다, 그리고 이곳 일본의 바다. 박 여사는 이곳이 고베 시 근처라고 했다. 인희는 고베가 어디인지 모른다. 그러나 바다는 안다. 바다에서 나고 바다에서 자랐으니까. 바다로 가자.
인희는 풀밭 너머의 나무숲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이 꽤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조금 더 가다 보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바닷물 파도 부딪히는 소리도 제법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급경사 비탈이었다. 크고 작은 바위가 저 아래 바닷가까지 연결된 것 같았다. 인희는 그곳에서 멈추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자동차 소리도 아주 작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탈출. 성공했다.
인희는 바위들을 조심조심 넘어가며 옆으로 이동했다. 발밑이 어두웠지만 마침 보름달이 떠 있어서 주변은 조금씩 구별할 수 있었다. 조금 지나자 평평한 풀밭이 나타났다. 아, 그런데 그곳에 흰색으로 칠한 벤치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인희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벤치에 앉아 인희는 바다 저 먼 곳에 눈길을 주었다. 오른쪽으로는 수평선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아스라이 작은 별들이 무리를 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다 건너 어느 도시의 불빛이겠지. 그리고 저 멀리 작은 섬들이 몇 개 시커먼 그림자처럼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일부에서는 불빛도 있었다. 사람이 사는 섬 같았다.
인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곶이나 가거도처럼 별이 많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보는 밤하늘 같았다. 은하수가 흐르고 북두칠성이 비스듬하게 떠 있고, 동쪽하늘 아래에서 밝은 별 다섯 개가 약간 찌그러진 십자가를 그리고 있었다. 저 십자가가 하늘 한가운데로 뜨는 한여름 밤이면 동무들이랑 어울려 바닷가에 나가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었지. 그 친구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들 나처럼 이렇게 훌쩍 자랐겠지. 인희는 갑자기 신기해졌다. 해곶 바닷가 꼬맹이가 이제 이렇게 의젓한 숙녀가 되었으니까. 미소가 지어졌다.
인희는 벤치에 누웠다. 춥지는 않았다. 낮에는 습하고 더워 걷기도 힘들었는데 밤이 되면서 오히려 따사로운 기운이 감돌아 기분이 좋았다. 바다에서는 약간의 바람만 불어올 뿐이다. 기분 좋은 바람이. 인희는 마음이 밝아졌다. 지금까지의 피곤이 풀리는 것 같았다.
문득 인희가 앞을 바라다보니 풀밭 아래쪽으로 계단이 나 있는 것이었다. 계단 양쪽에는 밧줄로 된 난간까지 있었다. 인희는 벌떡 일어났다. 계단 쪽으로 가보았다. 계단은 직선으로 이리저리 휘면서 저 아래 바닷가까지 닿아 있었다. 조금 전에는 아래가 보이지 않았는데 웬일인지 저 밑까지 또렷이 보였다. 문득 주변을 보니 계단 밧줄 난간을 따라 꼬마전구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빨간빛, 파란빛, 초록빛, 노란빛, 흰빛…….
인희는 박수를 쳤다. 이 불들이 언제 켜졌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예뻐서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다. 성탄절 때 교회 밖에 걸어놓은 꼬마전구들 같았다. 인희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조심조심. 계단을 다 내려갈 즈음 갑자기 바닷가에서 등이 켜졌다. 둥그렇고 커다란 우윳빛 등 하나가 굵은 나무기둥 위에서 등대처럼 아주아주 밝게 켜지더니 주변이 온통 환해졌다. 인희는 탄성을 질렀다.
아, 그런데 바닷가를 자세히 보니 나룻배 하나가 떠 있는 것이었다.
응?
해곶에서도, 가거도에서도 보지 못했던 날씬하면서도 아주 밝은 흰색으로 칠해진 작은 배.
왜 이걸 보지 못했지?
인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있는 곳이 너무 밝아 그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언제 저렇게 변한 거야? 해곶보다, 가거도보다 훨씬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온 하늘에 깔려 있었다. 그 한가운데로 은하수가 더욱 밝은 별들로 가득 찬 채 남북으로 길게 폭포수같이 흐르고 있었다. 인희는 손을 높이 들어 별들을 따려 했다.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 그 대신 인희의 손가락 사이로 별들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인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바닷가에 떠 있는 나룻배로 눈을 돌렸다. 오잉? 누구지?
어머? 인희는 두 손을 입에 가져가 가렸다.
할머니?
인희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할머니가 배 위에 앉아 손짓을 한다. 빨리 와.
할머니, 할머니!
인희가 배에 올라가자 인국이 할머니 뒤에 숨었다가 쏙 나온다.
인국아! 그런데 하나도 안 자랐네. 아직도 꼬마네.
누나! 엄마도 왔어.
엄마? 난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나 벌써 잊은 거니, 인희야?
엄마가 인희 뒤에서 말한다. 인희는 얼른 돌아다보았다.
아, 엄마 맞다. 엄마야.
이상하다. 그런데 왜 눈물이 안 나오는 거지?
왜? 울고 싶니? 울지 마. 우리 이렇게 만났잖아.
인희는 생긋 웃었다. 인희는 손을 내밀어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기분이 좋았다.
이제 가야 돼. 할머니 목소리.
인희가 뒤돌아보니 나룻배는 벌써 출발해서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노를 젓는다. 할머니 힘이 좋아졌네! 와! 인희는 박수를 쳤다. 박수칠 때마다 손에서 반짝반짝 별들이 튀어나온다.
할머니, 어디로 가는 거야?
저기 내 뒤로 등대 보이지? 거기까지 갈 거야.
아 참, 등대!
아까 해안도로에서 내려올 때 저 멀리서 등대를 보았었다. 한번씩 휘 돌 때마다 안개 속 같은 빛이 하늘로 바다로 쫘악 퍼지던 그 등대.
그런데 할머니가 말한 그 등대는 아까 본 것과 달랐다. 할머니는 등대가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말했는데, 문득 바라보니 바로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와! 네 사람은 함성을 지르며 나룻배에서 내려 등대로 올라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등대가 엄청 컸다. 동화에서 나오는 성 같았다. 성문이 열렸다. 인희는 깜짝 놀라 멈춰섰다.
어머나! 난쟁이들이 몰려나오는 것이었다. 동화 속에서 읽은 그런 난쟁이들. 백설공주! 난쟁이들이 사과를 하나씩 들고 와서 인희에게 주었다. 사과가 너무 많아 다 받을 수 없었는데도 난쟁이들이 수없이 나타나 계속 주는 것이었다. 인희 두 손 위에서 사과들이 쌓여갔다. 높이 높이. 하늘 꼭대기까지 사과가 쌓여갔다. 그런데도 인희는 조금도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사과 탑 꼭대기가 은하수 속으로 들어갔다. 어? 주위를 둘러보니 대낮같이 밝았다. 그런데도 하늘에는 은하수가 떠 있었다. 아까 본 그 수많은 별들도 그대로 있었다.
웬일이지?
갑자기 사과가 닿은 은하수에서 밧줄사다리가 툭 떨어졌다.
에그머니나! 인희는 놀라서 손을 움츠렸다. 그런데도 사과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밧줄사다리만 인희 눈앞에서 흔들흔들 움직이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아이들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거도 분교의 아이들이 모두 몰려와서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인희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 뒤에 어른들이 있었다. 보지 못했던 사람들인데……. 자세히 보니 정 선생님, 전도사님, 해곶 선생님……. 그런데 팔덕은 보이지 않았다. 도망갔나 보네. 인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은하수에서 내려온 밧줄사다리가 땅에 닿으면서 툭 하는 소리를 냈다. 인희는 위쪽 사다리 끝을 올려다보았다. 끝이 너무 높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좋아. 인희는 용감하게 밧줄사다리를 잡고 한 발을 올려놓았다. 박수소리가 더 커졌다. 그 순간 사다리가 위로 휙 잡아당겨지는 바람에 인희는 사다리에 한 발을 올려놓은 채 그대로 하늘로 끌려올라갔다.
아마도 은하수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인희는 은하수에 풍덩 빠져 팔을 흔들며 허우적거렸는데, 주위에서는 별들이 반짝거리며 거품처럼 일어나서 피어났다가 흩어질 뿐 인희는 빠져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인희는 소리쳤다. 나 헤엄치지 못해! 할머니!
왜 그래? 할머니가 나룻배를 저으면서 인희를 내려다보고 말을 한다. 나룻배는 가만히 있고, 그 주위로 은하수가, 별들이 흐르고 있었다. 인희가 동작을 멈추고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신기했다. 인희는 은하수 속으로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인희는 깔깔 웃으며 은하수 위에 누웠다. 자기 몸이 공기처럼 가벼웠다. 은하수는 반짝반짝하는 별들로 가득 찬 채 어디론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나룻배를 쳐다보니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희는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리고 노를 잡고 저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자신은 한번도 배를 저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노는 저절로 저어지고 있었고, 게다가 나룻배는 뒤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인희는 신이 났다. 빨리, 빨리 가자, 나룻배야. 인희는 나룻배와 함께 하늘 꼭대기로 나아갔다. 북두칠성이 옆으로 지나갔다. 저기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북극성인데, 하지만 아무리 노를 저어도 북극성은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계속 노를 저었다. 어? 갑자기 은하수가 끝났다.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인희가 탄 나룻배가 폭포로 떨어지며 뒤집혔다.
인희는 나룻배 밖으로 튕겨나가 하늘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인희는 두 팔을 활짝 폈다. 두 팔 사이로 별들이 지나가고 치마폭으로 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예뻐!
인희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인희의 몸이 둥실 뜨더니 가만히 내려앉는다. 살그머니.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벤치로 인희는 내려왔다.
아이, 졸려…….
인희는 벤치에 누웠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인희가 문득 눈을 뜨니 날이 환했다. 인희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4
인희는 바닷가 벤치에서 아침을 맞았다. 옷이 이슬에 젖지 않았다. 춥지도 않았다. 바다 쪽에서 잔잔하면서도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또한 신기하게도 옷이 더 깨끗해진 것 같았다. 인희는 문득 꿈 한 장면이 떠올라서, 은하수에 씻겨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며 속을 피식 웃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렇게 밖에서 잤는데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따뜻한 방 포근한 이불 속에서 편안하게 잔 듯한 느낌이었다. 벤치에서 잤는데도 몸 어디 불편한 곳 하나 없었고, 심지어 옷조차 조금도 구겨지지 않았다. 구름 위에서 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머리를 만져보았다. 거울을 보지는 않았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것 같았다. 얼굴이나 눈 주위를 만져보아도 조금도 푸석거리지 않았고, 손을 내려다보았을 때도 깨끗한 물에 씻은 듯 희고 깔끔했다.
인희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문득 어젯밤 지칠 대로 지치고 다리도 거의 움직이지 못할 만큼 아픈 상태에서 쓰러지듯 벤치에 누웠던 것이 생각났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조금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중간 굽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혹 발이 붓지는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구두를 벗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발이 가벼웠다. 그뿐 아니다. 온몸이 날아갈 것같이 가벼웠던 것이다.
꿈이 생각났다. 잠에서 깨었을 때 약간 생각나던 것이 이제는 마치 영화를 본 듯이 장면 장면들이 또렷이 떠오르듯 것이었다. 아……. 저 멀리 있는 등대, 아니 꿈속에서 본 성처럼 큰 등대, 거기까지 갔었지. 할머니가 젓는 배를 타고서. 그리고…… 하늘 끝까지 올라갔었어…….
꿈이 현실이 되어 인희 주위를 감쌌다. 마음이 맑아졌다. 상쾌했다.
인희는 자신의 몸이나 옷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 나서 도로 쪽으로 올라갔다.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들.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지나가는 자동차에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침을 먹지 않았어도 인희는 배고프지 않았다. 목만 조금 마를 뿐이었다.
인희가 주택가로 접어들자 출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대개 흰색 반팔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에 서류가방 하나,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쩜 사람들이 모두 다 저렇게 똑같은 모습일까. 약간 신기하기도 했다.
인희는 계속 걸었다. 처음에는 괜찮았으나 많이 걸으니 역시 다리가 아파 왔다. 동네 여기저기에 자그마하면서도 깔끔한 공원이 있고 그곳에 벤치도 있었다. 인희는 그 중 한 곳에 가서 앉았다. 까마귀들, 한국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커서 무섭기까지 한 까마귀들이 공원 여기저기에 내려앉아 무엇인가를 쪼아댄다. 목이 말랐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분수대가 있고, 물이 약간 솟아오르고 있었다. 인희는 아픈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그곳으로 갔다. 물은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손바닥에 담아 조금 마셔 보았다. 괜찮을 듯했다. 두 손으로 담아 마셨다. 많이 마셨다. 배가 차도록 마셨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안 돼. 꾸욱 눌러서 눈물을 참았다.
인희는 다시 걸었다. 문득 교회가 보였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잠시 망설이다 가거도 전도사를 생각해 보고 교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교회 앞에 가보니 현관으로 올라가는 몇 단 안 되는 계단 앞에 굵은 쇠사슬이 쳐져 있었다. 들어가지 말라는 뜻 같았다.
인희는 그곳에서 잠시 망설였다. 올라가서 두드려 볼까?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섰다. 한두 발자국 떼는데 어떤 노인이 다가온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을 하는데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희가 멍한 눈으로 쳐다보자 노인은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잠깐 기다리라는 몸짓을 하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낸다. 그리고는 반팔 흰색 와이셔츠 윗주머니에 꽂혀 있던 볼펜을 꺼내더니, 들고 있던 작은 가방에 종이를 올려놓고는 그 위에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인희가 들여다보니 지도였다. 왜 지도를 그리는지 인희는 궁금했지만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뒤 노인은 지도가 다 그려졌는지 인희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뭐라고 설명한다. 지도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큰 길로 표시된 곳을 가리키며 톡톡 두드린다. 인희는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노인은 손가락을 주욱 밀며 길을 따라 움직인다. 조금 나아가다 왼쪽으로 구부러지고……. 마침내 큰 건물 모양의 그림이 있는 곳 옆으로 돌아 십자가 표시가 있는 곳에서 멈추고 손가락을 꼭 누른다. 목적지인 모양이다.
십자가 표시. 인희는 처음엔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 문득 자신이 교회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 교회, 즉 다른 교회를 찾아가 보라는 뜻인가……?
인희는 노인이 주는 지도를 받아들고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인희가 인사했더니 의외로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천 만 에 요’ 하고 띄엄띄엄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인희는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또 한번 머리 숙여 인사했다.
노인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는지 기도하는 모습을 흉내 내는지 모를 동작을 하고는 고개를 한번 숙이고 가버렸다.
인희는 지도대로 따라갔다. 지도상으로는 꽤 먼 듯이 느껴졌는데 목적지는 의외로 가까웠다. 그리고 또 아주 정확했다. 지도 중간중간에 그려넣은 건물이나 상점, 횡단보도 표시 등도 알아보기 쉬웠다.
이렇게 해서 인희가 도착한 곳은 역시 교회였다. 흰색으로 예쁘게 지어진 교회. 도로 바로 옆에, 먼젓번에 보았던 교회와 비슷한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
인희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인희는 이번에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 교회 역시 현관으로 오르는 서너 단의 계단이 있었는데, 바로 그 계단 앞에 쇠사슬이 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겠지.
인희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나중에 안 일이었는데, 일본에서는 그러한 교회가 많다고 한다. 특히 대도시에는 그렇다고 한다. 그런 곳은 교회이기는 하지만 예배장소로 이용되지는 않고 결혼식장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은 결혼은 교회에서, 노인들의 장례는 절에서 하는 것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러한 교회들이 연합하여 한국처럼 노회나 총회를 형성해서 조직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희가 찾아간 곳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종교시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낮이 가까워 오자 무덥기 시작했다. 햇빛도 강해졌다. 점심때가 지나자 속이 조금 울렁거려 왔다. 근처 공원을 찾아 분수대가 있나 살펴보았다. 없었다. 다른 공원을 찾았다. 거기도 분수대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침에 갔었던 공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래도 물을 좀 마시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걸었다. 피곤하면 공원을 찾아가서 앉았다. 저녁이 되었다. 온몸에 흐른 땀이 찐득거렸다. 다리도 아팠으며 구두 속에 들어가 있는 발은 퉁퉁 분 것 같았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구두라도 벗었으면 좋겠다. 벤치에 앉아서 구두를 벗었다. 몸을 구부리고 펴는 데 너무 힘이 들었다. 아침에는 안 그랬었는데……. 공연히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공원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이 많아졌다. 퇴근한 뒤 더위를 피해서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인희는 몇 시간째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너무 지쳐 일어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중에 문득 돈이 생각났다. 아, 왜 그 생각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을까? 인희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리를 질질 끌다 시피하고 상점을 찾아나섰다.
잠시 후 한 곳에 눈에 띄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상품들. 사실 인희는 그동안 자신이 직접 물건을 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럴 만한 돈도 없었지만. 물건을 사고 돈을 내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만 같았다. 이제는 그 일을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골라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없었다. 상점에 들어가자마자 가까운 곳을 멍한 눈으로 살피다가 먹을 것과 마실 것 몇 가지를 골랐다. 계산대에 가서 물건을 주고 핸드백을 열었다. 신기했다. 그 속에 작은 지갑이 있고, 그것을 여니 돈이 있었다. 한국 돈과 일본 돈이.
인희는 일본 돈 한 장을 꺼냈다. 계산대 여직원에게 내밀었다. 상냥한 얼굴. 무슨 말을 한다. 밝은 목소리. 듣기가 좋았다. 거스름돈을 주는데 꽤 많았다. 종이돈과 동전들. 여직원은 종이봉지에 물건을 넣어준다. 인희는 꿈결처럼 그것을 받고 상점을 나왔다.
공원에 다시 가서 먹고 마시고 하니 기운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다리는 무거웠다.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어젯밤 갔었던 그곳을 다시 갈까? 그런데 그곳이 어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무작정 걸었으니 방향도 모른다. 후회되었다. 지도라도 그려놓을걸.
인희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몇몇은 아직 남아 있었다. 밤이 꽤 늦은 것이다.
인희는 무거운 다리를 간신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걸었다. 어디로 갈지도 몰랐다. 그냥 걸었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여관 같은 것이 보였다. 확실치 않지만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안에서 큰 소리로 맞는다. 어서 오시라는 말이겠지. 인희는 프런트 같은 곳에 가서 돈을 내밀었다. 직원이 받으면서 또 무슨 말인가를 한다. 인희는 가만히 있었다. 거스름돈을 준다.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무엇인가 쓰라는 뜻 같았다.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어디에 쓸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직원이 손가락으로 빈칸을 가리킨다. 인희는 이름을 적었다. 영어로 SONG IN HEE. 여권에서 본 이름. 직원이 다른 칸을 또 가리킨다. 무엇을 쓰란 말인가? 인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KOREA라고 썼다. 일본에 오기 전에 배워둔 것이다. 직원은 인희가 쓴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인희가 멍하니 있으려니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것을 가지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잠시 뒤 직원이 다시 나오더니 인희를 향해 무슨 말인가를 했다. 인희는 역시 가만히 있었다. 직원이 대신 빈칸 몇 곳을 채워넣는다. 그 중에는 날짜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 직원이 계산대 밖으로 나오더니 따라오라는 표시를 한다.
인희는 방에 들어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다다미방. 다탁 위에 잡동사니 몇 가지. 다락처럼 생긴 곳을 여니 그곳에 이부자리. 씻는 곳과 화장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인희는 대강대강 씻고 벗고 치우고는 자리에 누웠다. 피곤했던 몸치고는 잠이 금방 들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잠은 점점 더 멀어지고 수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5
다음날 아침, 노크 소리에 인희는 잠을 깼다. 정신없이 잤던 모양이다. 꿈을 꾼 것 같기는 했지만 생각은 나지 않는다. 그제 밤과 같은 가슴 뭉클한 꿈은 아니다. 어지러운 꿈, 이리저리 쫓기는 답답하고 눌리는 꿈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은 잘 나지 않았다.
꿈 탓인지 어제의 피로 탓인지 인희의 머릿속은 맑지 않았다.
인희가 부스스 일어나서 머리와 옷을 매만지고 문을 여니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아침식사가 얹혀 있는 쟁반을 들고서.
“오하이요오 고자이마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침인사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인희는 다소 부끄러웠다. 남이 아침상을 가져다줄 때까지 잔 것이 게으름으로 보일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침식사 후 인희는 여관을 나섰다. 종업원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 무슨 말인가를 외친다. 잘 가라는 뜻이겠지.
인희는 조금 걸으며 오늘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건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아,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지.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멈춰졌다.
어떻게 한국에 가지? 여권도, 비행기 표도 인희는 가지고 있지 않다. 매니저 말대로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박 여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의 짐을 갖다놓은 그 상냥한 부인의 집도 찾을 수 없다. 일본어도 모르니, 또한 돈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으니 공항에 가서 비행기도 탈 수 없고.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이대로 일본에 남게 되면 어쩌나?
인희는 핸드백을 뒤졌다. 혹 여권이나 그 무엇이라도 들어 있지 않나 하는 헛된 기대감으로. 역시 없었다. 아무것도.
인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번 더 뒤졌다.
그러다 핸드백 속 조그만 지퍼를 열고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먼지라도 묻어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그만 종이쪽지 하나가 손끝에 만져졌다. 인희가 꺼내어 보니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에 박 여사가 주었던 것이다. 한자로 되어 있는 주소는 읽을 수 없었으나, 전화번호 숫자는 알 수 있었다.
인희는 마음을 쓸어내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 전 나온 여관으로 인희는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업원이 큰 소리로 인사하려다가 어? 하는 듯이 멈추고 인희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인희는 쭈뼛쭈뼛하면서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종업원이 그것을 받아들고 궁금한 눈으로 인희를 쳐다본다.
인희는 전화번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종업원은 다시 인희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알아차렸다는 듯이 ‘하이, 하이’를 연발하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안 있어 박 여사가 택시를 타고 여관으로 왔다. 인희처럼 박 여사 역시 혼비백산한 얼굴이었다.
인희를 보자 박 여사는 손목을 덥석 잡았다. 입을 벌려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 같은데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여관 종업원을 향해 고개를 숙여서 몇 번인가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 뒤 박 여사는 타고 온 택시에 인희를 태웠다. 운전사에게 손짓을 하면서 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는 혼잣말인지 인희에게 들으라는 뜻인지 중얼거린다.
“비행기 시간에 늦겠어.”
택시는 서둘러 달리는 느낌이었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더니 해안가 도로를 쌩하고 달려갔다.
잠시 뒤 공항에 도착해서 두 사람은 트렁크를 들고 뛰어가고, 출국심사를 받고, 아슬아슬하게 막판에 비행기에 오르고 하는 그 시간들 속에서 박 여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인희 얼굴을 피하는 것이었다.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비행기 안에서도 두 사람은 거의 말이 없이 서로 외면하고 앉아 있었다. 괜찮아? 밥은 먹었어? 이 말 외에 박 여사는 한두 마디 더 덧붙였던 것 같다. 그것이 다였다.
부산공항 출국장으로 나가니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희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다. 매니저가 성큼성큼 걸어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인희의 트렁크를 받아들려 한다. 인희는 손잡이를 움켜쥐고 내주지 않았다.
매니저는 민망해 하며 손을 빼고는 대신 박 여사의 트렁크를 받아들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공항 밖으로 나갔다. 매니저와 박 여사는 약간 앞쪽에서 걷고, 인희는 몇 걸음 떨어져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천천히 뒤따라갔다. 매니저는 박 여사에게 얼굴을 돌리고서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고 있었다. 매니저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도착하자 매니저가 뒷문을 열고 인희에게 먼저 타라는 눈짓을 한다.
인희는 타지 않았다.
매니저는 인희를 바라보다가 박 여사에게 고개를 돌리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공항청사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두 사람만 남자 박 여사가 긴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인희를 돌아다보았다.
“아픈 데는 없지?”
두 사람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따뜻한 느낌이 전해졌다.
인희는 대답 없이 먼 쪽을 바라다보았다. 보일 듯 말 듯 약간만 고개를 끄덕였을 뿐.
박 여사 역시 인희를 아래위로 슬며시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고 나서 매니저가 헐떡이며 뛰다시피 해서 되돌아왔다. 박 여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쳐다보아도 매니저는 대답이 없이 차문을 열어주었다.
“일단 타.”
매니저가 인희를 바라보고 말했다. 명령조가 아니다. 애원조였다.
인희는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자신이 지금껏 이렇게 거리낌 없이 누군가를 정면으로 쳐다본 적이 있었던가?
매니저는 인희의 눈길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 여사는 매니저와 인희를 번갈이 쳐다보았다.
인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차에 올랐다.
세 사람이 차를 타고 간 곳은 부산역이었다. 매니저는 역 근처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에게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하고는 대합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매니저는 표 한 장을 들고 돌아왔다.
그 표를 인희에게 내밀며 말을 한다.
“이거 서울역 가는 급행열차 표야.” 그리고는 표에 적힌 시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시간에 늦지 않게 개찰구로 들어가야 해.”
매니저는 손가락으로 역사 쪽을 가리키며 이리저리 설명한다. 그리고 몇 마디 더 하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인희에게 내민다.
인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박 여사가 그 돈을 받아서 인희 손에 쥐어준다.
인희는 돈을 손에 꼭 잡고 눈을 내리깔았다.
매니저가 인희 쪽을 바라보며 말한다.
“서울역에 도착하면 사장님이 기다리실 거야.”
이 말을 남기고 매니저와 박 여사는 차를 타고 떠났다.
급행열차 안에서 인희는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 있었다. 차창으로 지나는 풍경들, 객차 안에서 오가는 사람들과 승무원, 사람들이 주고받는 한국말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아직도 일본의 공항열차, 그리고 그 안에서 바라보던 일본의 도시 숲을 지나는 것 같았고, 사람들의 말도 낯선 언어처럼 들려왔다.
일본에 도착해서 돌아오기까지 이틀 밤과 사흘 낮이다. 그러나 아득히 먼 옛적부터 그곳에 살다가 이제 낯선 이방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느낌이었다. 배곯았던 시절, 공장을 전전하던 때, 멀고 먼 외딴 섬에 가서 바다 저 멀리 아득한 곳을 바라보며 공상에 빠졌던 그 모든 시절이 인희 자신의 일이 아니라 동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장면들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이 들고 말았다. 잠이 살며시 깬 뒤에도 감미로운 잠결을 즐기듯이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니, 사실 어딘지 모르게 포근한 느낌이었다.
인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렇게 선잠을 즐겼다. 규칙적으로 낮게 들려오는 열차바퀴 소리, 사람들이 통로를 오가는 소리, 주변에서 낮게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나직이 들려오며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인희의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꿈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오사카 앞 너른 바다와 열차 속의 장면이 겹쳐지고, 꿈에서 보았던 은하수와 나룻배가 열차 창문 밖으로 흐르며, 아픈 다리를 끌면서 헤매고 다녔던 고베 근처 마을의 동네동네 길과 공원들이, 그리고 한밤에 찾아가서 누웠던 바닷가 그 새하얀 벤치가 이리저리 엉켜서 아련하면서도 어지러운 선 꿈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했다.
묵직한 트렁크와 핸드백을 들고 인희는 대합실로 나갔다. 사장이 나와서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사장…….
가거도에서 처음 보았을 때 어딘지 인희를 걱정해 주는 듯했던 그 눈길, 그리고 서귀포 식당에서 인희가 아니라 마치 먼 산을 바라보며 말하듯이 하던 그 목소리.
무엇일까? 그 속에 담겨 있는 그 사람 마음. 자신을 일본에 보낸 그 속마음.
알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그리고 지금 저 개찰구를 나가면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만나야 하나?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리고 또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마치 남의 일 생각하듯 궁금해졌다.
이제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곳저곳 빙빙 돌다가 해곶에서 도망나와 첫발을 디뎠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운명인가?
인희는 문득 그 말이 우습다고 느껴졌다. 무슨 운명? 자신에게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던가? 늘 남의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 떠돌았는데. 단 한 번 자신의 의지로 간 곳은 오직 가거도뿐이었다.
그래, 가거도. 그곳에 다시 가고 싶다. 외따로 떨어진 서해안 저 먼 곳. 마치 세상의 끝에 가서 섰던 곳 같은 그 섬. 그곳에 있을 때, 아무도 찾아오지도 자신을 끌고 가지도 않은 그곳에 있을 때 그러나 인희는 외롭지 않았다. 바다와 갈매기와 물새들과 검푸른 파도와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거친 바위들, 바닷가에서 바라보던 크고 작은 못생긴 섬들. 하늘은 또 얼마나 파랬었던지. 밤하늘은 별나라였고. 아, 고베 앞바다에서는 은하수 속에서 헤엄치기도 했었지. 그 별들. 별들이 참 많았었다. 바다 위 하늘에서도, 꿈속에서도.
인희는 별이 되고 싶었다. 별들이 되고 싶었다. 은하수…….
내 몸이 아주 작은 별들로 나누어져서 흩어지는 거야. 그리고 은하수가 되는 거지. 나는 은하수. 그 속에서 또 다른 인희가 헤엄치는 거야. 별들 사이에서 별이 된 나. 그 속에서 살풋살풋 헤엄쳐 나가는 거지. 어디로?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하늘 가 끝 저 너머로? 그 너머는 어디로 이어질까? 해곶? 아니 아니, 그곳은 싫어. 너무 가난해. 혹시 엄마가 사는 곳 거기는 어디일까? 거기서 엄마를 만난다고? 꿈속에서는 보았는데……. 그래, 그곳에 가서 눈을 들어 크게 뜨면 엄마를 볼 수 있을 거야…….
인희가 문득 눈을 들어 앞을 보니 저만치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인희는 우뚝 멈춰섰다.
자신을 일본에 보낸 사람.
유카타를 입고 호텔 방문 앞에 섰던 족제비같이 생긴 남자에게 보낸 사람.
자신을 가거도 그 너른 바다에서 꿈꾸는 미래를 선물로 주듯 뭍으로 끌고 나온 사람.
그가 저곳에 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 그 사람이 다가온다.
한 발, 두 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미안하다.”
이 말 저 사람, 사장이 한 건가?
인희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인희의 눈물을 닦아준다.
손이 따뜻했다.
누구지, 이 사람?
사장이 손수건을 꺼내어 인희의 손에 쥐어준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