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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17.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15)

제3장 | 겨울정원 (3)

신경 안 쓰려 했는데도 괜히 마음이 바빴다.

    헤어아트에 갔다 올 걸 그랬나…….

    옷을 미리 골라놓을 걸 그랬나…….

    화장은 해, 말어…….

    손톱? 이것까지는…….

    귀걸이를 할까…….

    네클리스는…….

    아이고, 다 관둬라.

    관심 없는 척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 아줌마들에게 잘 보이면 뭐 어떻게라도 되는 거야?

    그렇게 자신이 없어?

    아침 일찍 잠이 깨어 혹시라도 아래층에서 들릴까 봐 조심조심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이옷 저옷 들춰보면서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주원은 갑자기 마음이 시들해졌다.

    아줌마들 몰려와서 선을 보든가 말든가.

    단 하나 좀 걱정스러운 것은 그 브런치인가 뭔가 하는 시간까지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좀이 쑤셔서 어떻게 기다린담? 그때까지는 밖에 나가지도 못할 텐데.

    주원은 목을 돌리며 불편한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후우―.

    그래, 엄마 마음 맞춰주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남궁 여사는 아침 건너뛰고 브런치 먹겠다고 버티면서도 슬쩍슬쩍 과자랑 몇몇 가지를 남들 눈에 안 띄게 먹고 있었다. 주원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엄마, 그냥 많이 드세요. 그 사람들 너무 의식하지 마시고.

    주원은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남궁 여사가 원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주원은 적당히 분위기는 맞춰주자고 생각했다. 남궁 여사는 주원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런지 가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을 거는 척하며 이층에 와서 들여다보고 내려갔다. 주원은 무심한 척 의식하는 척 중간 정도로 적당히 행동했고.

    10시 반경에 손님들이 온다고 했다.

    거 참, 이런 일도 사람 신경 쓰이게 하네…….

    10시가 넘어가자 주원은 괜스레 손도 꼬아보고 다리도 뻗어보고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고 머리도 만져보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없어?

    …….

    모르겠다.

    그런데 손이 심심했다.

    옷장 문을 열고 이것저것 꺼냈다. 마술도구. 인간에게서 받아온 간단한 것들.

    그것들을 가지고 노니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재미있었다.



주원은 마술을 배우면서 특히 손끝으로 재주 부리는 것들을 빨리 익혔다. 아마도 바이올린 연주로 인해 손가락을 많이 사용한 것이 도움이 된 듯했다.  

    아, 소리가 난다. 드디어 오는 모양이구나.

    평소에는 아래층 소리 전혀 못 들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들려오는 것이다.

    귀가 이상해졌나…….

    주원은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다.

    머리를 한번 매만지고 다시 앉았다.

    가방으로 손이 갔다.

    마술도구들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저 사람들 옆으로 지나가듯이 선보이고 곧장 홍은동으로 가야지.

    아래층이 약간 왁자해진다.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10시 29분.

    정확히들 오시네.

    또다시 손을 오물오물.

    심심했다.

    손을 뻗어서 가방에 다 안 들어가 소파 한 구석에 놔둔 마술도구 하나를 잡았다. 조그만 통. 마술사들이 입는 옷의 헐렁한 소매에 감춰두는 것이었다. 주원은 그 통을 왼 소매에 억지로 밀어넣었다. 재킷 소매통이 좁아서 너무 꽉 끼어 팔이 좀 아팠다.



남궁 여사가 11시쯤 올라오겠다고 했으니 마음 좀 느긋하게 갖자고 생각하고 음악을 틀었다. CD.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작품번호 61 중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Part I.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연주. 편한 곡은 아니지만 그냥 그것을 골랐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우크라이나 출생의 거장. 육중한 느낌의 인상과는 달리 섬세함의 극치를 보이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냉전시대 소련의 천재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최초로 미국에 소개한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

    주원이 자주 연주하는 곡은 아니지만 오이스트라흐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이 곡을 가끔 듣곤 했다. 아마 오이스트라흐의 눈매가 갑자기 머리에 떠올라서 이 CD를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눈. 사람들의 눈을 보아야 한다.

    그들의 눈이 어디로 향하는지.

    사람들의 시선을 주원 쪽으로 모으게 해야 한다. 주원의 동작 하나하나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기대를 갖게 해야 한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하며 마음과 시선이 집중되도록.

    이때 손, 손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마술사의 손을 따라간다. 저 손이 혹시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닐지…….

    그러나 수작은 이미 그전에 끝나 있다. 소매 속에.

    손은 천천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허공을 떠돈다. 그리고 작은 점 하나를 만들어 그것이 저 먼 우주에서 쏜살같이 날아오듯 급격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 점이 순식간에 거대한 운석으로 변하여 관객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순간, 그 어마어마한 충격에 놀란 듯 손은 요동을 치며 요란한 움직임으로 사람들 마음에 압박감을 준다. 관중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하며 다음에 올 카타스토로피(catastrophe)적 파국을 기대한다. 이때 두 손이 하나가 되며 하늘을 향해 뻗으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클라이맥스가 터져나온다. 왼손에 감추어둔 통으로부터. 번쩍 빛을 발하며. 바로 그 순간…….

    똑똑똑.

    얌전한 노크.

    괜히 주원의 낯이 간지러워진다.

    주원은 일어섰다.

    남궁 여사가 부드러운 모습으로 들어온다. 의미 있는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만 말한다.

    주원도 눈으로 답했다.

    가방을 들었다. 제법 묵직했다.

    남궁 여사의 미간이 약간 찌그러진다. 눈이 주원의 가방으로 향한다.

    주원은 모른 척하고 어깨에 멨다.

    남궁 여사는 주원에게 다가와 가방을 어깨에서 벗겨내려 한다.

    주원은 순순히 가방을 내주었다.

    남궁 여사는 가방을 받고서 내려놔야 하나 들고 내려가야 하나 잠시 우물거린다.

    주원이 다시 가방을 잡았다.

    남궁 여사가 멋쩍은 얼굴로 가방을 내준다.

    주원은 가방의 끈을 잡고 문 쪽으로 몸을 향했다.

    남궁 여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이내 몸을 돌려 주원 앞에서 문으로 걸어갔다.      

    


남궁 여사와 주원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약간의 긴장감.

    앞에서 내려가는 남궁 여사의 뒷머리가 닭벼슬처럼 올라간 듯했다. 머리에 너무 힘을 준 것 같았다. 앞에서 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뒤에서 보니 눈에 금방 띄었다. 왜 하필 머리 뒤에 힘을 주었지? 보이지 않아서 몰랐나?

    주원은 신경이 쓰였다.

    계단을 다 내려갔다.

    널따란 거실 한복판의 8인용 소파에 심사관들이 앉아 있었다.

    남궁 여사가 사뿐사뿐 심사관 쪽으로 다가가다가 몸을 살짝 돌려 주원의 팔을 잡는다.

    심사관들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인다.

    남궁 여사가 심사관 쪽으로 몸을 돌려 입을 연다.

    “여기 이 애가 우리…….”

    남궁 여사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주원이 뒷머리를 만졌기 때문이다. 뒷머리 속에서 어떤 종이상자 같은 것이 삐져나와 떨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엄마, 이거…….”

    남궁 여사는 놀라서 팔을 들어올려 뒷머리를 만진다는 것이 동작이 너무 커서 팔을 휘두르는 형태가 되어 몸이 빙그르르 돌면서 주원의 오른쪽 옆구리를 쳤다.

    주원은 갑자기 엄마의 팔에 얻어맞으면서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 무거운 가방을 팔에 걸치고 있어서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쓰러지면서 주원은 왼팔로 바로 옆에 있는 사람 허리 높이의 좁다랗고 길쭉한 화분을 밀어뜨리고 말았다.

    화분이 옆으로 쓰러지면서 천장 가까이까지 솟아 있었던 실내 관상용 나무가 심사관 쪽으로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주원의 왼팔 속에 감추어 두었던 통이 눌리면서 주원의 소매 밖으로 튀어나왔다. 스티로폼 솜 같은 새하얀 거품 덩이들이 펑하고 터져나오면서.  

    또한 주원은 몸의 균형을 잃으며 그대로 넘어지면서 기다란 화분 위로 쓰러졌다.

    우당탕탕탕 와르르르.

    이 모든 것은 거의 동시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심사관들의 요란한 비명소리와 함께.

    그리고 역시 그와 동시에 거실 공간은 거품 천지가 되어버렸다.

    아직 겨울은 되지 않았지만 11월 말에 접어들고 있어서 강원도 쪽에는 첫눈이 왔다고 하지만, 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11월의 함박눈 가득한 겨울을 맛본 집은 아마도 정 회장 댁이 유일할 것이다.     



주원은 병원에 실려갔다. 병실에 입원했다.

    사실은 그리 많이 다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남궁 여사의 요란법석에 앰뷸런스가 오고 응급실을 거쳐 병실로 가서 드러눕게 되었다.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주원의 다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허벅지에 약간의 멍이 들었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남궁 여사는 깁스를 해야 한다고 법석을 부렸다. 병원에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자 남궁 여사가 어디에 가서 구했는지 붕대를 잔뜩 가지고 와서 주원의 다리를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강제로 꽁꽁 싸매버린 것이다. 조금이라도 다치면 안 된다고.

    남궁 여사의 전화를 받고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번에도 마침 강남의 큰 절에 가 있다가 지난번 그 스님과 함께 온 둘째 이모였다.

    이날도 역시 고매하신 스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환자의 쾌유를 빌기 위해 목탁을 두드렸다. 불경을 암송하면서.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남궁 여사는 그 전날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용하다는 도사에게 찾아갔었다. 그리하여 여차여차 저차저차 사연을 길게 늘어놓고 부적을 하나 받아왔는데, 그 도사 말로는 부적을 아주 작게 정성껏 접어서 도사가 별도로 주는 작은 종이상자에 조심조심 넣어 뒷머리 속에 감추어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부적에서 영험한 기운이 나와 정 회장 가문에 큰 복을 갖다줄 귀인을 알게 해줄 것이라고 했단다.

    교회 권사이신 남궁 여사께서는 이러한 사연을 남들에게 말도 못하고 속으로 그 도사를 저주하면서 주원 옆에서 밤을 새웠다. 자기의 불신앙 때문에 딸의 다리가 어떻게 될까 마음이 조마조마해 하면서.

    주원은 어이가 없었다.

    교회에 그렇게 열심히 다닌다면서 기껏 도사한테 가서 부적이나 받아왔단 말이지…….

    그래서 죄책감 때문에 내 다리 빨리 낫게 하려고 이렇게 칭칭 감아놓은 거야?

    아이고.     

    다음날 집에 돌아온 주원은 씩씩거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남궁 여사가 옆에서 곰살맞게 굴면서 자분자분 비위를 맞추는 것도 외면한 채 쌩 찬바람을 내면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주원이 이렇게 냉기류를 내뿜는 것은 사실 어머니 남궁 여사보다는 그 인간 때문이었다.

    주원에게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는 것은 어쩐지 몽땅 그 인간이 자기 주위에서 맴도는 탓 같았다. 자기가 화분 옆에서 기우뚱했을 때 그 무거운 가방만 들고 있지 않았던들 그렇게 균형을 잃고 쓰러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가방이 무거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마술도구들.

    마술?

    마아술?

    흥!

    주원이 그 잘난 마술 배운답시고 태권도 도장 들락날락하다가 온 집 안 난장판에 눈사태까지 만들어놓은 것이다.

    내가 다시는 마술 배우나 봐라!

    그 웬수!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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