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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15.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14)

제3장 | 겨울정원 (2)

 이게 뭐야? 이게 복수한 거냐고?

    주원은 자신이 한심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약간 통쾌한 구석도 있었다.

    우선은 인간의 그 우쭐하는 걸 꺾어버린 것. 둘째는 잘난 척하는 거 눌러버린 것……. (둘 다 똑같은 거 아냐?) 그리고, 그리고 또 하나는…….

    생각이 잘 안 난다. 아무튼 좀 시원한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다시 곰곰 생각하니 책값이랑 택시비, 시간 허비한 것, 다리 아픈 것 등등 생각해 보니 자신이 엄청 손해 본 것 아닌가 싶었다.

    주원은 가방에서 책값과 택시비 영수증을 다 꺼내어 펼쳐놓았다.

    주원은 머릿속이 뾰족해졌다.

    아이고…….

    또 당했다. 그 악당!

    주원은 영수증들을 한꺼번에 쓸어잡고 박박 찢어버렸다.     



웬만해선 싫은 소리 안 하던 아버지에게 야단맞았다. 물론 남궁 여사가 펄펄 뛰는 걸 막아주려 그렇게 한 것도 같지만 그래도 눈빛만은 꽤 엄했다.

    주원은 시무룩하게 침대에 누워 있었다.

    하는 일마다 어긋나는 것 같았다.

    집에서는 어딘지 골칫덩이 되어가는 것 같고, 악당에겐 복수도 못 하고…….

    시집이나 갈까…….

    누구하고……?

    어디 백마 탄 왕자님 없을까?

    은색 망토 두르고 황금 왕관 쓴 키 크고 잘생긴 남자.

    성격 좋고 실력 있고 돈도 많고 주원만 위해 줄 사람.

    흠, 악당을 여기에 하나하나 대입해 볼까.

    백마 탄 왕자. 아이고, 백마는커녕 ×차 하나 없는 것 같더만. 태권도 도장엔 차 좀 있으려나.

    은색 망토? 옷도 꼭 저 같은 것들만 골라 입었지.

    황금 왕관? 그 더벅머리 장발에 뭘 쓰겠어.

   게다가 키가 크냐, 잘생기길 했냐. 못생기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지.

    성격은? 기분 좋으면 설레발, 안 좋으면 죽상.

    돈은 뻔하고.

    나 주원만 위한다? 아이고, 그건 절대 사양. 다른 데 가서 누굴 위하든 말든 상관없음. 오히려 딴 데 가서 노는 게 더 좋음. 제발 앞으로 영원히 보지 않는 게 내 만수무강에 유익함.

    됐네, 뭐.

    손 탁탁.

    끝.

    잠이나 자자.     



그런데 왜 잠이 안 오는 거야?

    주원은 벌떡 일어났다. 밤 12시가 지났는데도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잠 안 올 때 할 수 있는 것.

    미지근한 물 마신다.

    커피포트에 물 집어넣고 레버 눌렀다. 잠시 기다려 약간 따뜻한 물 만들어서 홀짝홀짝 마셨다.

    누웠다. 눈 감았다. 잠이 오겠지.

    좀 있다가 이불 걷어차고 일어났다.

    가벼운 맨손체조.

    엇둘 엇둘…….

    허리 옆으로 돌리기. 다리도 좀 뻗어보고. 목도 좌우로 살살.

    스톱.

    이런다고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책을 하나 읽는다.

    책장을 둘러봤다. 읽을 만한 게 없었다.

    아니, 하나 있지.

    퍼뜩 생각이 나서 낮에 메고 나갔던 가방을 열었다.

    책.

    마술책.

    봉투는 커피숍 나오면서 인간에게 던져주었다.

    어제 서점에 간 이유가 이거였잖아. 그제야 생각이 돌아왔다.

    그러나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인상부터 쓰게 됐다.

    이것도 책이라고…….

    아무튼 읽어나 보자.     

    


거의 식음전폐 수준.

    내가 한다면 하는 성격이지.

    주원은 일주일간 전화 끊어놓고 책에만 매달렸다.

    읽기도 힘들게 마구잡이로 쓴 글들을 해독해 가며 하나하나 따라하고 반복하고 실수하고 책 다시 들여다보고 연습하고 손에 익혀 나갔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다. 집 안에 있는 실뭉치, 컵, 종이상자, 보자기 등등을 죄다 뒤져서 갖다놓고 마트나 백화점에 가서 이것저것 사오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손이 제법 부드럽게 돌아간다.

    오호.

    복잡한 도구를 만들어야 하는 것 빼놓고는 대부분 기본기는 익혔다고 주원은 생각했다. 손에 익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손목을 이렇게 돌려서 검지를 요렇게 빼고 다른 손으로 밑을 받친 다음 엄지를 척 치켜들면서…….

    흠. 요거였구나.

    손수건 착 펴서 구슬 하나 올려놓고 양손으로 손수건 끝을 잡고 천천히 들어올리다 갑자기 확 뒤집는다. 구슬은 어디로 갔을까?

    주원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의 귀 쪽으로 손을 내밀다가 손가락을 탁 퉁기면서 손바닥을 폈다.

    짠! 요기 있지요.

    손바닥 위에 놓인 구슬.

    그러나 아직 서툴다. 들키기 딱 맞다.

    연습, 연습, 연습…….

    주원은 집에서 가까운 큰 서점에 갔다. 마술책을 종류별로 다 사왔다.

    진작 사올걸.

    종류도 훨씬 다양하고 설명도 상세하고 사진도 선명했다. 게다가 컬러로.

    그런 책으로 공부하니 더 잘 되는 것 같았다.

    또 며칠간 책을 파고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마술학원?

    인터넷을 쳐보았다. 여러 군데가 나왔다. 주원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있었다.

    주원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집 전화로 번호를 눌렀다.

    네, 짜자잔마술원입니다. 상대방이 받는다.

    주원은 갑자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주원은 전화를 끊었다.

    아니지. 의리는 지켜줘야지.

    의리? 뭔 의리?  

    그래도…….

    쳇, 별 게 다 갈등이 되네.

    에잇, 그래도 단골이 낫지.

    단고올?

    그 말이 이상하면 구관이 명관.

    명관 소리 한다.

    내 맘이야.

    주원은 한숨을 푹 쉬며 핸드폰을 켰다. 와르르 쏟아지는 카톡 메시지들.     



인간은 기세가 등등해서 폼을 잡는다. 그래, 있을 때 맘껏 즐겨라. Carpe diem.

    인간은 입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알았어, 알았어. 잘 가르쳐 주기만 해.

    주원은 집에서 매일 홍은동 태권도 도장으로 출근했다. 열흘 동안.

    인간은 싱글벙글 세상이 다 자기 것이 된 양 창고에서 온갖 것 다 꺼내와 주원 앞에 늘어놓았다.

    주원은 그것들을 보고는 글자 그대로 기겁을 했다.

    세상에,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장만했대. 이런 거 다 사용해야 되는 거야?

    주원은 인간을 우습게 보았던 것이 좀 미안했다.

    “이거 다 사모으려면 돈 많이 들었을 텐데…….”

    “그래서 늘 이렇게 쪼들리는 겁니다.”

    편가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이런 거 꼭 해야 돼요. 프로로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그래도 내 직업에는 꼭 필요해요. 사람들한테 즐거움을 주거든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편가.

    “안 하면 되잖아요.”

    “남보다 다른 게 있어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일 안 들어와요.”

    “좀 다른 거 찾아봐요.”

    “에이, 마술을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편가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진다.

    “주원 씨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나한테 배우는 거 아녜요?”

    싱글벙글.

    주원은 편가를 노려보았다.

    아유, 얄미워…….

    이렇게 해서 주원이 인간에게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또 한 가지 안 것이 있었다.

    인간의 태권도 솜씨였다. 주원에게 보여주려 온 힘을 다한 것도 있었겠지만 그동안 우쭐대던 것이 나름대로 이해는 되었다. 마술 가르쳐 줄 때의 그 섬세함에서는 상상도 못할 파워와 절도가 나왔던 것이다.

    바디페인팅에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변신 꺼풀. 그 하나하나가 좀 엉뚱하긴 하지만 약간씩 흥미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인간 정체가 뭐야? 전공이 뭐지? 어떤 직업에 집중하려는 거야?

    주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어떻든 주원은 인간에게서 배울 것은 다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술에 집중했다.

    인간이 꺼내오는 장비들 익히는 것 그 일도 쉽지 않았다. 그 중 극히 일부분만 만지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인간이 꽤 성심껏 가르치는 것도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익힐 수 있는 종류들만 적절히 잘 골라서 집중적으로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주원은 그러나 좀 혼란스러웠다. 현재 자신의 입장이.

    마술을 배워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천방지축으로 뛰고 있는 자신의 마음.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 자신.

    사실 집에서는 잔소리가 심하다. 왜 매일 나가냐고? 어디에 가는 거냐고?

    그런 거 다 무시하고 매일같이 이곳에 오는 주원.

    뭐 하자는 건지…….

    주원은 미리 약속해 놓은 콘서트 중에서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만 빼고 나머지엔 모두 눈을 감고 있었다.

    목적이 뭐야?

    이렇게 해서 마술을 배우려 하는 게 무슨 이유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모르겠다.     

     


집에 빨리 오라는 카톡을 받고도 주원이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현관문을 열고 짧은 통로를 지나 널따란 거실로 들어가는데 남궁 여사가 팔짱을 끼고 서서 쏘아본다.

    주원은 아무 말 없이 남궁 여사 옆을 지나 이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저녁은?”

    “먹었어.”

    주원은 돌아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층으로 거의 다 올라갔는데 또다시 주원 뒤통수로 날아오는 화살.

    “내일 잘 준비해.”

    “…….”

    주원은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다 뒤돌아보았다.

    “뭘?”

    “아침에 말했잖아. 내일 아침 브런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 아, 그거…….

    잊고 있었다.

    주원은 대꾸하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털퍼덕.

    소파에 주저앉아 앞만 멍하니 바라본다.

    멍하게.

    그냥 멍.

    그러다가 주원은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실로 갔다.

    따뜻한 물줄기 아래에 한참 서 있다가 주원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손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양손을 들었다가 한 손을 내리고 팔을 옆으로 비틀면서 다른 손을 허리 뒤로 슬쩍 감춘다…….

    주원의 입술에 슬며시 미소가 돌았다.

    좋아.

    주원은 샤워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두 손을 이리저리 움직거렸다. 요렇게 조렇게…….

    재미있었다.

    동작이 점점 커져갔다.

    허리를 돌렸다. 몸을 반쯤 돌린 상태에서 얼굴은 앞으로 향하고 미소를 살짝 지은 채 오른손으로 관객들 시선을 천장 쪽으로 끌고 올라가다가 갑자기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짠!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주원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쏟아지는 샤워가 마치 오색 종이테이프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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