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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13.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12)

제2장 | 예술정원 (4)

예고 동창의 독창 발표회에 다녀왔다. 남궁 여사가 좋아하는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애. 아주 귀국했다고 한다. 국내 대학에 자리를 잡으려는 모양이란다. 배경이 든든하니 쉽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대기 좋아하는 그 동창을 주원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궁 여사가 반강제로 끌고 간 것이다. 실력은 괜찮은 것 같았다. 특히 고음이 좋았다. 꼿꼿한 자세에서 저렇게 높은 음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애 많이 썼네. 주원은 박수를 힘껏 쳐주었다.

    “신랑 될 남자가 엄청난 사람이란다.”

    남궁 여사의 부러움 섞인 말투.

    뭐가 엄청나? 하늘에서 내려왔나?

    “낙하산이래.”

    무슨 말?

    “오성 비서실로 곧장 떨어졌대. 따자마자.”

    뭘 따? 병마개?

    “부모들끼리 샴페인 병 따면서 약속했었다나 봐.”

    학위 딴 건 아니고?

    “예일에서 공부하고 MBA 받았을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자세히 얘기하는 거지? 남의 신랑 될 사람에 대해.

    남궁 여사는 한숨을 푹 쉰다.

    “거기서 경영수업 받은 뒤 계열회사로 가겠지.”

    주원이 먼 산 보듯 눈을 돌리자 남궁 여사는 주원의 표정을 살핀다.

    그러더니 남궁 여사는 한숨을 쉬어가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그 두 사람이 어디어디에 갔었고 뭐를 샀고 약혼식은 어디에서 할 거라는 둥.

    갑자기 남궁 여사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주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을 한다.

    “얘, 우리 집에서 조그만 모임 하나 가질까?”

    “뭐를……?”

    “응, 왜 그런 거 있잖아. 브런치 같은 거. 내가 싸모님들 좀 아는데, 그 여편네들 한꺼번에 불러서 너 선 좀 보이자.”

    “…….”

    “싫지 않지?”

    주원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푹 나왔다.

    “저번 파티에 온 사람들하고는 다른 쪽이야.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모른 척해.”

    주원은 의자 뒤로 푹 기대며 고개를 젖혔다.

    답답하구나.

    주원은 눈을 감았다.

    계속해서 주절이주절이 말을 잇는 남궁 여사.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가 달려가요…….     



자정 가까이까지 주원은 이층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놨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남궁 여사는 계속 들볶을 것 같았다. 주원 본인은 원하지 않는데 왜 남들이 난리치는 거지? 하긴 20대 후반이니까 부모들은 마음이 급하겠지.

    이 기회에 아예 시집가?

    누구하고?

    선봐서?

    생판 모르는 사람 마주보고 앉아 탐색해서?

    아니면 그냥 정해 주는 대로?

    근사한 집 도련님하고?

    그 속을 어떻게 알고?

    나중에 숨겨놓은 여자 나오면?

    주원은 문득 핸드폰 생각이 나서 열었다.

    카톡이 몇 개 와 있었다. 친구들한테서 온 것들. 오늘 연주의 주인공에게서도 고맙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주원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답신 몇 개 해주었다.

    끝?

    뭐 좀 섭섭해?

    별로.

    아닌 것 같은데?

    뭘 안다고 그래?

    얼레리 꼴레리…….

    죽을래?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은 달이 밝았다. 별은? 별은 좀 없는 편이지. 오리온자리는 보일까?

    주원은 창가로 갔다. 고층아파트와 빌딩들이 좀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하늘이 웬만큼 보인다.

    동쪽 비스듬히 아래로 방패연이 보였다.

    와!

    정말 오리온자리네.

    반갑다. 반가워.

    주원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손을 문득 멈추었다.

    담 너머 저쪽에서 누군가가 손을 마주 흔드는 듯…….

    주원은 가만히 밖을 살펴보았다.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양쪽 빛이 희미하게 겹쳐지는 곳 근처에. 그 뒤쪽 어둠 속에.

    돈키호테.

    맞아, 둘시네아 공주를 찾아나선 돈키호테의 그림자가 분명 있었다.

    주원은 생각했다.

    이럴 때 둘시네아는 어떻게 했을까?

    하나, 몸을 숨긴다. 둘, 반만 숨긴다. 셋, 창문을 열고 마주보고 손짓한다.

    주원은 커튼 사이로 반만 숨기고 고개를 내밀고서 밖을 내다보았다.

    응?

    왜 아무도 없지? 그냥 간 건가?

    에이, 좀 기다리지…….

    주원은 커튼 뒤에서 나와 사람 없는 가로등 불빛 사이를 싱거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젠 연극도 하는구나.

    몸부림치는 거야? 시집 보내줘?

    아서라.

    주원은 침대로 가서 철퍼덕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그리고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약간 이지러진 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달에서 은은히 비쳐 들어오는 살폿한 빛의 조각들.

    잠들기는 틀렸어…….     



주원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잠을 깨고 나서도 이리 꾸물 저리 꾸물 하다가 억지로 일어나서 브런치라는 것을 먹었다.

    말만 듣던 브런치. 보스턴에서는 방학 때라도 이렇게 늦게 일어나 본 적이 없었다. 연습, 연습, 연습……. 레슨, 레슨, 레슨……. 공연, 공연, 공연……. 수업, 수업, 수업……. 정말 기막히게 살아왔다. 남들 눈에는 유학생활이 화려하고 낭만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주원을 포함해서 주변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주원과 처지가 비슷했다. 태산처럼 짓누르는 공부에 치인 모습.

    아침 먹을 시간이 없어서 오전 어중간한 시간에 먹는 아침 겸 점심. 따지고 보면 그것이 브런치인데, 그 동안 한번도 그런 거에 요란하게 브런치니 뭐니 이름 갖다붙인 적 없다. 그저 매일이 브런치요 고생이었다.

    브런치.

    생전 처음으로 그런 말을 의식하고 먹어 보았으나 별것 아님. 그냥 늦은 아침 한 끼. 또는 이른 점심.

    이런 걸 가지고 뭐 그렇게 호들갑씩은. 그런 말 쓰면 좀 있어 보이남?

    대한민국 게으른 님들 모두 다 그렇게 먹을 텐데.     

    카톡이 여러 개 와 있었다. 모두 예상했던 사람들에게서 온 짐작할 만한 내용들.

    답장 몇 개.

    끝.

    시들.



주원은 허리춤에 손을 대고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무엇이라도 찾듯이. 그러나 무엇을 찾는지 몰라서 이번에는 이 구석 저 구석 세밀히 바라보았다. 노려보았다. 뭔가 나오기만 해봐라.

    없었다.

    의심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의심스러운 거지?

    주원은 이번에는 물건들 하나하나 들춰보고 열어보고 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수색했다.

    CD 하나하나 케이스까지 모두 열어보고, 끼적거렸던 노트도 후루룩 넘겨보고, 소파 방석들 다 뒤집어 보고, 의자 아래, 바이올린 케이스 속, 피아노 뚜껑도 열어보고, 화장품 상자, 핸드백, 가방, 의미 없이 뒹구는 봉투, 크고 작은 서랍마다 열어서 쏟아보고, 보이는 족족 이것저것 죄다 열어보고 까보고, 옷장 열어서 주머니마다 손 집어넣어 뒤지고 더듬고…….

    응?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서 꺼내보니 구슬이었다. 알록달록한 구슬.

    이게 왜 여기에?

    주원이 가만히 생각을 더듬어 보니 그 인간의 손바닥에 처음엔 알록달록한 구슬 두 개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주원의 귀에 가까이 대고 수작을 부리더니 손바닥을 폈을 때는 구슬이 하나였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이게 그 구슬?

    주원은 얼른 옷을 확인했다.

    맞다. 어제 입고 나간 연갈색 재킷.

    이 인간이…….

    하!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

    아차!

    주원은 화들짝 놀라 서둘러 재킷의 나머지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미심쩍어 양쪽 주머니를 다시 한번 꼼꼼히 뒤지고 뒤집고 해보았다. 혹시나 해서 그 전에 입고 나갔었던 재킷까지 다시 뒤졌다. 그러다가 퍼뜩 생각나서 가방을 열어서 내용물을 쏟았다. 샅샅이 헤집어 보았다. 갑자기 머리를 퍼뜩 들고는 벌떡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달려내려갔다. 어제와 저번에 신고 나갔던 구두를 찾아 뒤집어 탁탁 쳤다. 구두창에 묻은 먼지만 포르르 날린다.

    다시 이층으로 올라간 주원은 머리칼 속을 헤집으며 뒤적거렸다. 귀속도 파보았다. 콧구멍 속도. 거울에 가서 입을 헤벌리고 목구멍, 혀 아래, 어금니 뒤쪽, 입천장 죄다 살펴보았다. 눈꺼풀도 뒤집어 보고.

    흠, 어디 또 없나……?

    아, 기억 속…….

    주원은 자기 머리를 한 대 탁 쳤다.

    정신 차려!     

    주원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앞 테이블에 올려놓은 구슬을 노려보면서.

    분했다. 완전히 당한 것이다. 감쪽같이.

    이 인간…….

    주원은 갑자기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방 안을 한 바퀴 돌며 주원이 아래층에서 올라올 때 열어놓은 유리문을 통해 아래층까지 울려퍼졌다.

    우당탕퉁탕!

    아래층에서 나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 아마도 소파 옆에 놓여 있었던 화분 쓰러지는 소리, 계단 급히 올라오면서 발을 헛디뎌 어맛! 하며 소리 지르는 남궁 여사 소리, 몸이 좀 찌뿌듯하다며 집에 머무르다 느지막이 회사에 나가려고 현관문에서 구두 신다가 혼비백산 벗어던지고서 뛰어 올라오는 정 회장이 뭐뭐뭐 뭐야 하며 말 더듬는 소리, 그 뒤로 가정부 아주머니가 수건으로 가구들 닦다가 기겁하고 돌아서면서 얼떨결에 수건걸레를 입에 넣었다가 퉤퉤퉤하며 뱉어내면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

    입에 거품만 안 물었다 뿐이지 사방으로 뻗힌 머리칼 사이로 두 손 집어넣은 채 머리통 움켜잡고 끊임없이 비명 지르는 무남독녀 외동딸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곧 이어 앰뷸런스 도착하고 집 안으로 쏜살같이 들것이 들어왔다 나간 뒤 삐뽀삐뽀―.     


     

입에 체온계 물고 머리에 얼음주머니 올려놓은 채 병원 침대 위에서 비스듬히 누워 있는 주원.

    아니, 요즘 그런 거 안 쓰는데 웬 체온계? 얼음주머니?

    남궁 여사가 요즈음 도구 못 믿겠다며 구식이지만 그런 것들이 더 정확하다고 간호사 닦달하며 옛 체온계 찾아와라, 얼음주머니 가져와라 난리 친 결과가 바로 이 장면이었다.

    조금 뒤에 고모가 혼비백산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몇 분 뒤에 고모부.  

    그리고 좀 뒤에 이모.

    더 뒤에 이모부.

    더더 뒤에 막내작은삼촌.

    더더더 뒤에 막내숙모.

    더더더더 뒤에…….

    병실 안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대 주위에 둘러서서 주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분은 둘째손가락을 들어올려서 주원의 눈앞에 들이대면서 이거 보여 하는 표정을 짓는다.

    다른 한 분은 주원의 손을 잡고 울먹이려 한다.

    성당 다니시는 또 한 분은 가슴에다 십자가 성호를 긋고.

    또 다른 한 분은 핸드폰을 들이밀고 찰칵.

    교회 집사인 한 분은 두 손을 모으며 주여…….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또 한 분은 마침 강남의 큰 절에 갔다가 주원의 소식을 듣고 스님을 모시고 달려왔는데, 그 스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밀려 뒤에 서 있었다. 목탁을 두드리면서.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게다가 그 순간 병실 앞을 지나가던 한 방송국 리포터가 이 요란한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하여 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놀라서 동행했던 사람들을 불렀다.

    호들갑의 대명사 막내숙모님이 병실 밖으로 달려나가서 리포터에게 설명한다.

    손짓발짓 요란하게.

    한국에서 명문예고를 중퇴한 뒤 미국 명문예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역시 명문음대에서도 수석졸업, 대학원 최우수상, 박사과정에서도 어쩌고, 유럽과 미국에서 콘테스트 3연속 최고연주상 저쩌고……. 잠시 귀국하여 심신을 쉰 다음 다시 돌아가서 유럽 투어를 할 예정이네 마네…….

    그 소리가 열려 있는 병실 문을 통해 다 들려왔다.

    주원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신은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는 것이었다. 머리 위에 놓인 얼음주머니 탓인지 덕인지.      

    사람들 다 가고 병실에 주원 혼자 남았다.



    아까부터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러나 하나도 받지 않고 있었다.

    카톡도 끊임없이 까똑, 까똑, 까똑…….

    메시지가 계속 뜬다.

    어떻게 된 거야……. 웬일이래……. 죽은 거 아니지……. (뭐, 죽어? 이것들이!)

    FM 오늘의 클래식 소식 프로그램에서 주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한 카톡에 뜬 말. ‘강남 어느 대형병원에 긴급 입원한 재미 음악영재…….’

    주원은 핸드폰을 껐다.

    복수!

    이 인간 가만두나 봐라!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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