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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Jun 12. 2024

마술사와 오케스트라 (11)

재2장 | 예술정원 (3)

화상이 어쩐 일인지 입을 열지 않고 시무룩하니 허공만 바라본다.

    주원이 노려보았다.

    화상이 슬쩍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린다. 아래층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주원도 따라서 아래층으로 눈을 돌렸다.

    많은 사람들이 바삐 지나간다.

    열심히들 사는구나. 나만 빼고.

    주원은 갑자기 울적해졌다.

    “일어날래요.”

    주원이 가방을 메며 말했다.

    “아, 잠깐. 잠 깐 만 요.” (왜 이래?)

    “나 집에 가야 돼요.”

    “우리 도장에 한번 가보시죠. 거기 마술도구들이 엄청 많이 쌓여 있는데 그것도 한번 보시고요, 내 솜씨도……. 아, 이거 한번 보실래요.” (얼레?)

    화상은 주머니에서 알록달록한 구슬 두 개를 꺼내더니 왼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펼쳐서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이고는 손바닥을 뒤집어서 왼손바닥 위쪽에 대고 쓰윽 문지른다.

    구슬이 하나가 되었다.

    다시 한번 문지른다. 두 개가 되었다.

    또 한번 쓰윽. 이번에는 다시 구슬이 하나.

    또다시 쓰윽 문지르자 구슬이 없어졌다. 그리고는 오른손바닥을 펼쳐보인다. 거기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화상이 팔을 쭉 뻗어 자기 오른손을 주원의 왼쪽 귀에 갖다댄다. 주원이 깜짝 놀라 뒤로 움찔하는데 손가락을 탁 퉁긴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치고 주원의 눈앞으로 내민다.

    구슬 하나가 그 위에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웃는다. 소리 나지 않게 박수 치는 시늉.

    나머지 구슬 하나는 어디 간 거지? 주원은 좀 얼떨떨했다.  

    “나가죠.”

    화상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원의 한쪽 팔을 잡으려 한다.

    주원이 몸을 비틀어 그 손을 피하면서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유리구슬 없애고 더하는 마술이야 그쪽 세계 사람들에게는 극히 초보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코앞에서 벌어지는 그 광경을 보고 주원은 정신이 쏙 빠져나갔다. 하도 날래게 해대는 바람에.



그렇게 남의 정신을 사납게 해놓은 뒤에 화상은 택시를 불러서 홍은동의 태권도장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주원은 꼭 도깨비에게 홀린 것처럼 멍한 채 끌려가다시피 그곳으로 간 것이다. 택시비는 주원 부담.

    지난번 갔었던 홍은동 사무실에서 구기터널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간 곳. 주택과 빌라가 많은 동네의 한 상가건물 4층에 글로벌태권도라는 도장이 있었다. 유리창 하나하나에 ‘글 로 벌 태 권 도’라는 이름이 한 자 한 자 붙어 있어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무슨 글로벌씩이나. 이런 구석에.

    주원은 괜히 분한 마음이 들어 흥 하면서 낡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그래도 저번 홍은동 지저분한 그 건물보다는 훨 낫구먼.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다리 아픈 것은 똑같지만. 괜히 스커트 입고 나왔어. 이딴 데 오려고 그렇게 살짝(?) 단장한 거야?

    도장 안으로 들어가자 수련하는 사람들의 구호소리가 들려왔다. 사범으로 보이는 두어 사람이 화상에게 인사한다. 화상은 어깨를 주욱 펴고 주원을 안내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좁아터진 공간으로. 그 사무실 한쪽에 또 문이 있다. 화상이 그 문을 연다. 창고 같은데 나무선반이 길게 놓여 있고 칸마다 무엇인가가 가득가득 채워져 있었다. 창고가 사무실보다 몇 배 큰 것 같았다. 그리고 저쪽 구석 어두컴컴한 곳에는 무슨 책 같은 것이 잔뜩 쌓여 있었다.

    화상이 그 안으로 들어가 주원에게 들어오라는 시늉을 한다. 주원은 문 입구에 서서 목만 빼고 그 안을 주욱 훑어보았다.

    그런데 뭘 보라는 건지, 또 무엇인가를 보았다면 그게 어떻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게 다 마술용품입니다. 퍼포먼스에 쓰이는 거죠. 대형행사 두 건은 거뜬히 할 수 있는 양이 됩니다.”

    그래서……?

    화상은 창고에서 나와 다시 도장으로 들어갔다. 주원을 앞세우고. 어깨가 더 벌어져 있다.

    어흠.

    화상은 귀빈을 모시듯 주원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도장 안을 휘이 둘러보게 했다. 그런 다음 천장으로 눈길을 고정시킨다.

    뭐가 있어, 거기에?

    “…….”

    아, 저거? 만국기?

    주원은 화상을 돌아다보았다. 만국기 보여주려고 그런 거야? 글로벌 느낌 주려고?

    만국기, 그딴 거 ×나 ×나 다 거는 거 아님.

    칫!

    그래도 반응은 해주어야 해서 주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국기를 주욱 훑어보았다. 그리고 화상의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우쭐우쭐.

    맞네, 화상.



두 사람은 도장을 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내 꿈은 글로벌하다 그겁니다.”

    “벌써 글로벌한데요 뭐.”

    화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원을 바라본다. 희소식? 기대감?

    그러면서 주원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

    화상이 머쓱해 한다.

    주원이 일어섰다.

    화상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난다.

    “아직 커피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집에서 걱정해요. 빨리 들어가야 돼요.”

    주원은 뒤도 안 돌아보고 카페를 나섰다. 화상이 카페 직원에게 손을 흔들면서 주원을 따라 서둘러 쫓아나온다.

    “제가 집에 바래다드릴까요?”

    “됐어요.”

    

     

집으로 돌아온 주원은 후회막급했다.

    미국에 있었으면 지금쯤 콘서트 투어나 레슨 계획 때문에 정신없었을 것이다. 다른 동료나 교수들이 그에 대한 글을 이메일이나 메시지로 종종 보내오고 있다. 주원은 3개월 동안 한국에 와서 푹 쉰 다음 학교로 돌아가서 강행군하자고 마음먹고 이곳에 온 것이다. 사실 잠시도 쉴 틈 없이 빽빽한 스케줄이 이미 잡혀 있다. 게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국에서 가봐야 할 각종 연주회도 여럿 있었다. 여기에다 두어 콘서트는 일본과 중국에서 열리는데 거기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에 와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귀국연주회와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쓰러진 것을 핑계로 지금 사람들 접촉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화상이 보낸 카톡을 보고 답답하던 마음에서 시내에 나갔다 온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답답함만 더 쌓이고 말았다. 애초에 그 인간과 연결된 것이 잘못이지만, 처음엔 집 안에만 있기 지루하던 차에 바디페인팅이라는 특이한 면에 호기심이 생겨 심심풀이 겸 나갔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콧대 높기로 이름났던 자신이 어떻게 그런 인간에게 말려든 것인지 신기하기도 했다. 개구리 왕자와 공주도 아니고.

    뭐, 개구리 왕자?

    피―.

    관두자.



저녁식사를 하고 주원이 악보 정리를 하고 있는데 남궁 여사가 이층으로 올라왔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안락의자 팔걸이를 쓱쓱 문지르더니 천천히 앉는다.

    주원은 아무런 반응 없이 악보만 뒤지고 있었다.

    “너 요즘 종로에 자주 간다며?”

    “…….”

    “다치지는 않았니?”

    “무슨 말이야?”

    “넘어졌다며?”

    “…….”

    “세상 참 좁다. 조심해야 돼.”

    “무슨 말이냐니까?”

    “네가 마네킹 쓰러뜨린 집. 그 가게가 누구 건 줄 아니?”

    “…….”

    “네 고모 친구가 종각역 지하도에 상가 몇 개를 가지고 있어. 네가 가게 하나 난장판 만들어놓고 보상해 준 가게도 그 사람 거야. 합의서 써주었다며? 거기에 네 이름이 있는 걸 보고 혹시나 하고 고모한테 연락했다더라. 고모도 처음에는 네가 남자하고 그런 데 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동명이인인가 보다 하고 넘겨버렸대. 그런데 그 가게 여직원이 오늘 또 너하고 그 남자하고 둘이서 그 가게 앞에 왔다 갔다고 주인에게 알려준 모양이다. 그래서 고모에게 그 말이 들어가 나한테 확인해 보라고 전화가 왔다. 조금 전에.”



남궁 여사는 빤히 주원의 얼굴을 바라본다.

    “너 맞는 거니?”

    “…….”

    “누구야, 그 남자?”

    “…….”

    “너 몸은 괜찮아? 다친 건 아니지?”

    “…….”

    “저번에 레스토랑에서 쓰러지고 나서 또 그 사람 만나러 나간 거야?”

    “…….”

    “세상 좁아. 엉뚱한 소문나게 하지 말고 잘 정리해.”

    “뭘 정리해? 아무것도 아닌데.”

    남궁 여사가 팔짱을 끼고 주원을 노려본다.

    “알았다.”

    남궁 여사는 천천히 일어났다.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여기저기 찬찬히 살핀다. 그러나 이내 몸을 돌려 방문 쪽으로 향했다.

    남궁 여사는 방문을 열고 나가다가 문을 잡고 잠시 멈칫하더니 상반신만 반쯤 돌린다.

    “돈 너무 함부로 쓰지 마.”

    그리고는 남궁 여사는 문을 탁 닫고 나갔다.

    주원은 소파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 인간.

    도움이 안 되는구나.     



[다음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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