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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dolf Oct 14. 2024

걷자, 은하 너머까지. . .

-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

이제 다시 시작한다.

    그리하여 걸었다. 그래, 걸었다. 한없이 걷고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종착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다. 종착지를 정해 놓지도 않았으니 어디를 향해 걷는지도 모르고 걸었던 것이다.

    그래도 걷자. 걷다 보면 어디엔가 닿겠지. 혹 아무런 곳에도 닿지 못하더라도 뒤돌아 보면 걸어온 발자국은 남겠지. 그렇지 않니? 족적, 알잖아. 내가 남긴 흔적. 내가 어디에서부터 걸었고, 어떻게 걸었으며, 어디까지 걸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나는 또 걸었다. 쉬지 않고 걸었다.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남들이 생각에 잠길 때 나는 걸었고, 남들이 무엇인가에 몰두할 때도 나는 걸었으며, 남들이 내가 어디 있는지 찾을 때도 나는 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었다.

    “그 친구 어디 간 거야?”


    

나는 걸었다. 대로, 소로, 앞길, 뒷길, 옆길, 아랫길, 오르막길, 내리막길……, 길, 길, 길……, 길을 걸었고, 길을 벗어나 걸었으며, 길을 찾아 걸었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 걸었다.

    나는 땅을 걸었으며, 강을 걸었으며, 언덕을 걸었으며, 숲을 걸었으며, 작은 연못가도 걸었으며, 호수를 걸었으며, 동네를 걸었으며, 마을을 걸었으며, 도시를 걸었으며, 산맥을 걸었으며, 드디어 바다까지 걸었으니까.

    내 족적. 뒤돌아보면 내가 걸었던 발걸음이 모두 보이는 것이었다. 저 멀리 언덕 너머, 산 너머, 강 건너, 마을 너머, 도회지 너머, 바다 너머 길게 길게 이어지는 내 발자국들…….

    이렇게 걷고 걷다 어느 날 문득 주위를 살펴보니……, 아, 나는, 나는 하늘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청명한 하늘을.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위를 올려다보았는데 정말 하늘 한복판이었단 말이다. 그 탓에 온몸을 바르르 떨면서 저 아래 땅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으스스 무섬증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아, 떨어지면 안 되는데…….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구름, 구름이다.

    얼른 구름 위로 펄쩍 뛰어 올라탔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푸른 창공에서 까마득한 저 아래 땅으로. 갑자기 식은땀이 쫘악~.

    가슴을 쓸어내리며 큰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 한복판을. 그렇게 조금 걸으니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 땅이나 강은 물론 하늘까지 다 내 세상 같았다. 가슴이 뿌듯해졌다.

    가슴을 활짝 펴자!

    나는 하늘 정복자가 되어 무위도 당당하게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걸어서.

     


그렇게 잠시 걷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구름이 다가온다.

    흠……, 이번에는 용감하게 그냥 구름 위로 펄쩍 뛰어올라갔다. 사뿐.

    별것 아니다. 그냥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거칠 것 없이. 바람결에 따라 실려가고, 구름 타고 둥둥 떠가고, 그런 다음……, 그 다음은……?

     멈칫. 나는 하늘 한복판에서 멈춰섰다.



그래, 그 다음은 뭐지?

    문득 하늘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푸르고 깊은 하늘. 잠시 하늘을 바라보자 갑자기 저 하늘 속에 풍덩 빠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대로 저 위로 펄쩍 뛰어들어 볼까……?

    그 순간 내 몸은 저절로 움직거리더니 정말로 하늘 위쪽을 향해 퍼얼쩍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푸르른 하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갑자기 별들이 보였다. 반짝이는 별들. 앙징스러운 꼬마별에서부터 목성처럼 묵직한 별, 명왕성처럼 작고도 못난 별, 오토바이 달리듯 정신없이 질주하는 혜성, 게을러 터져 느릿느릿 움직거리는 지렁이별, 너무너무 커서 온 하늘을 다 덮을 것만 같은 태산별.

    그러나 어딘지 그냥 감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분위기상 말이다. 나에겐 어떤 숙명이 주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진, 앞으로 전진!

    그래서 또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문득 하늘 한복판에 강이 나타난 것이다. 은하수? 아니다. 수하은? 아니다. 강, 강이었다. 진짜 강 말이다. 물이 흐르고, 강둑엔 이름 모를 꽃들이 길게 길게 멀리까지 피어 있고, 저어 높은 하늘 위로는 별들이 깨알같이 박혀 있는 찬란한 오아시스와 같은 강에. 그러나 그곳에 어린 왕자는 없는 강둑에.

    나는 그곳에서 한동안 쉬었다. 다리도 아프고, 정신도 하나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갈지 알 수도 없어서 잠시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요랑으로.

    그러나 조금 쉰 뒤에도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사실 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무슨 목적이 있으며 또한 목적지는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계속 걷는 것, 그 하나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또다시 걸었다. 그리고는 결국 바다에까지 나아갔다. 시퍼런 하늘이 저 멀리멀리까지 퍼져 있는 그곳에.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바다에 도착하고 나서 결국 나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고 도달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다 그 너머는 허공, 즉 허상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꿈을 꾸었다. 밤에도, 낮에도, 해가 뜨는 아침에도, 태양빛 찬란하게 내리비치는 한낮에도, 그리고 땅거미 짙게 밀려오는 저녘무렵에도. 이뿐만 아니라 꽃양귀비 흐드러지게 붉게 핀 언덕에서도, 코스모스 모여모여서 흔들거리는 들판에서도. 게다가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작은 숲속길 끄트머리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에서도. (아차, 그리고 보니 이곳은 처음 내가 허상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도달했던 바로 그곳, 저어 벌판 너머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들녘, 게다가 서쪽 너머로 놀이 붉게 물드는 허허벌판이었던 것이다.)



병원에 가보았다. 잠을 자라고 한다.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하자 처방전을 써주었다. 약국에 가니 작은 알약들을 주었다. 그리고는 돈을 달란다. 없다고 했지. 신용카드를 달라고 한다. 없다고 했다. 신분증을 달란다.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알약을 도로 빼앗고 내쫓는 것이었다.

    울었냐고? 글쎄다……. 눈물은 났지만, 그것이 반드시 운 것은 아니라고 나는 강변하고 싶다. 감격에 겨울 때도 눈물은 나니까. 하품하다가 눈물이 났을 때도 있다. 안약을 과다하게 넣었다가 눈약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왜 우느냐고 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고.



철돗길을 따라 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림자길이었다. 그래도 그냥 걸었다. 그랬더니 빨주노초파남보 꼬마 장신구들이 뒤를 따라오더라. 검은 사다리 그림자를 타고서. 나는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뛰고 뛰어도 제자리인 것이다.

    겁이 더럭 났다. 이러다 잡히면 어떡하지?

    뒤를 돌아다보았다.

    큼직한, 그러나 순둥이 같은 누런 골든 리트리버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것이다.

    아…….



아, 나는 갑자기 리트리버 등에 올라타고 꿈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성과 토성을 지나 천왕성, 해왕성을 건너뛰고 명왕성 가까이 갈 무렵 문득 눈을 들어 허공 위를 바라보니……, 허, 글쎄 버스가 지나가는 게 아닌가!  



버스, 정말 버스다. 삼층버스!

    나는 버스를 뒤쫓아갔다. 가까이까지 따라가서 버스 옆으로 갔다. 그랬더니 갑자기 버스 창문이 열리며 환호성이 터져나오는 게 아닌가! 아이들, 아이들이 타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든다.

    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저 멀리 명왕성 너머 어떤 별나라 왕자님과 공주님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실로 오랜만에 잠 못 이루던 그 긴긴 시간을 끝으로 아주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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