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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도현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도 모두 통과했다. 대학 예비고사도 통과했으나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은 성적이 안 되어 차라리 지방으로 내려가자고 생각해서 대전 지역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집에서는 재수도 생각해 보라고 했으나 그것은 학교에 다니면서 결정하기로 했다.
집에서 대전까지 통학할 수는 없기에 대전에 방도 하나 구했다.
큰언니 수현은 경영학을 대학원에서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둘째언니 지현은 복학하여 잘 다니고 있고.
셋째언니 미현은 음대에 들어가서 잘 다니다가 외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도현은 마음속으로 늘 해곶을 생각하고 있었다. 꼭 그곳에 가보고 싶어서 한때는 지도까지 찾아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몸도 마음도, 또 상황도 알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대학에 들어갔고 성인이 되었으니 마음먹고 해곶에 가보자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3월 하순 토요일, 도현은 보통 때 같으면 이미 그 전날 금요일 수업 마치자마자 서울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집에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토요일 저녁에 올라간다고 알렸다. 그리고 나서 토요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갔다. 미리 도서관에서 지도를 찾아보고 해곶으로 가는 길을 대강 그려왔다. 지도는 몇 년 전 조사해 보았을 때와 별반 다른 것 같지 않았다.
수원역에서 내려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그곳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버스 운전사에게 해곶으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해곶이라는 데를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 집들은 거의 폐허 수준이었다. 대부분 초가집이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집도 꽤 되었다. 마치 전설의 고향 같은 데 나오는 음습한 마을 느낌이었다.
인희가 이런 곳에서 자랐구나. 미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안됐다는 느낌도 들었다. 도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 황폐한 곳이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흘끗흘끗 쳐다본다. 모두 생기를 잃은,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죽은 자들의 마을 같았다. 도현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숨도 쉬기 힘들었다. 이러한 곳에서 자란 인희가 어떻게 그렇게 고울 수가 있었을까 의아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에게 인희나 인국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모두들 먼 나라 이야기인 듯 고개를 젓다가 한 할머니가 이 빠진 입으로 더듬더듬 말을 했다.
“아……. 저쪽 갯벌 쪽에 가봐. 거기 무덤들 많은 곳에 몇 집 있는데, 하나 빼고는 모두 사람이 없을 게야. 다 도망갔으니까. 거기에 살았던 아이들이 그 애들일 거야. 벌써 전에 다들 도망가 버렸지만. 잘 갔지. 여기 살아서 뭐해. 다 죽은 곳인데.”
도현은 또다시 물어물어 갯벌 가까이, 무덤 많다는 곳, 그곳까지 갔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몇 채, 뭐가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집들. 겉에서 보기만 해도 으스스한데 안으로 들어가 살피기는 정말 싫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이집 저집 다니며 사립문 안쪽을 살폈다.
한 집에서 사람 사는 느낌이 들었다.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가 반은 주저앉은 툇마루 같은 곳 근처에 가서 물었다.
“저, 계세요……? 여보세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빈 바람소리와 저 멀리 시퍼런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물새들 울음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 집 안에서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도현은 방문을 열어볼까 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대로 서서 몇 번 더 불러보았다.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도현은 하는 수 없이 돌아나와 사립문 밖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그리고 더 이상 그렇게만 하고 있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죄다 반쯤 쓰러진 초가집 몇 채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 위로 무덤들이 보이는 곳까지 나왔다. 그때 저 멀리 갯벌 맞은편 산에서 어떤 사람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도현은 반가운 마음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곧 멈추고 말았다. 저쪽에서도 깜짝 놀란 듯 멈춰선 것도 한 이유이지만, 그것보다도 그 사람, 노파라고 해야 옳겠다, 그 노파의 모습이 너무 기이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주아주 초라한 몰골, 얼굴은 햇볕과 바닷바람에 탄 탓에 새카맸다. 눈은 아주 작아 보이지도 않았으며, 얼굴에 주름은 왜 그리도 많은지 마치 불도그 개 주글주글한 모습과 흡사했다. 사실 얼굴 모습도 그러했다. 사납게 노려보는 표정이. 옷은 또 왜 그렇게도 남루한지 마치 영화에서 본 육이오 때 피난민 같았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치 무엇을 하다가 들켰거나 무슨 위험한 상황을 만나서 도망가야 하는 입장이라도 된 것 같았다. 도현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런데 어쩌면 상대방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개가 사납게 짖어대는 것은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어디에서 들은 적 있었다.
도현은 침착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침착. 침착.
천천히. 천천히…….
도현은 심호흡을 하고 나서 할머니 쪽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아주 천천히.
할머니가 움찔한다. 뒤로 주춤 물러설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말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노려보기만 하고.
도현은 두 팔을 살짝 벌리고 최대한 밝게 표정을 지으면서 몇 발자국 떼었다.
할머니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현은 몇 발자국 더 옮겼다. 할머니가 몸을 움찔했다.
“할머니,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도현은 저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왔다. 도현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하나 여쭤볼 게 있어서요. 한 가지만.”
할머니의 작은 눈에서 공포인지 의심인지 안도인지 모를 빛이 나오는 것 같았다.
도현은 두어 발자국 더 다가가서 멈춰섰다.
“저기 저쪽 집이 인희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죠?”
할머니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도현은 그 표정이 긍정적인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왔어요.”
할머니의 눈이 더 가늘어진 것 같았다. 의심? 아니면 호기심?
도현은 용기를 내어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할머니는 그대로 서서 가만히 있었다. 도현은 할머니 앞에까지 갔다. 멀리서 볼 때보다 할머니의 얼굴은 더 자글자글했다. 온갖 세월의 풍파가 그 얼굴에 다 녹아든 듯, 가난과 절망과 질병의 질곡들이 얼굴 주름마다 배어 있는 듯했다. 이 해곶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도 그 얼굴에서 비롯된 듯, 아니면 해곶의 설움이 모두 할머니에게 들어가 있는 듯 그 얼굴에 도현은 가슴이 아렸다.
도현은 무심결에 할머니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할머니는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다. 도현은 아차 싶었다. 얼른 손을 거두고 말했다.
“할머니, 인희라는 분 소식 좀 알고 싶어서 왔어요.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그분을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 동생 인국이라는 남자도요.”
갑자기 할머니 눈에서 빛이 도는 듯 느껴졌다. 인국이라는 이름 때문인가?
“그 남자에게서도 소식이 온 적 있나요?”
할머니의 눈빛이 부드러워진 느낌. 그러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도현은 가방을 열고 지갑에 있는 돈을 몽땅 꺼내어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할머니는 몸을 움찔했으나 받지는 않았다. 도현은 할머니 손에 억지로 돈을 쥐어주었다. 할머니는 거부하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올게요. 건강하세요, 할머니.”
도현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도현은 그 다음 주는 금요일 오전수업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대전역으로 가서 수원역으로 향했다. 이미 길을 알기에 퍽 수월하게 해곶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덕분일까, 지난번 왔을 때보다 해곶의 분위기는 다소 밝고 또 정답기까지 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던 것이다. 가난과 절망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질병과 고통 속에서도 사람의 생명은 이어진다. 희망보다 절망이 크다 하더라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해곶은 어둡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더 사람 사는 곳다웠다. 도현은 갑자기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
인희네 집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주변에 많은 봄꽃들이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일주일 만에 생명들이 다투어 올라온 것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따스했다.
도현은 단 한 집, 사람이 사는 그 집으로 곧장 향했다. 담 안쪽에서 지난번 그 할머니를 발견했다. 할머니도 이미 도현을 알아차리고 있는 듯했다. 도현이 사립문 밖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할 때 받지 않고 뒤돌아서 있었지만 어딘지 거부하는 느낌은 없었다. 단지 등만 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도현이 안부도 묻고 여러 말을 건네고 해도 대답은 없었다. 그저 마당 안 여기저기 다니며 쓸기도 하고 장독대 뒤에서 무엇인가를 옮기기도 하면서 잔잔한 일만 할 뿐.
도현은 말을 멈추고 눈을 여기저기로 돌려 바라보았다. 남루한 집, 그 뒤로 보이는 무덤들, 아직 잎이 돋지 않은 마른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푸른 소나무들, 그 위로 파랗게 퍼져 있는 하늘, 그 위로 더 파랗게 깊은 또 다른 하늘.
오늘은 도현의 마음도 밝아졌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도현에게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일만 했다. 무심함.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거나 도현을 쫓아내지는 않았다.
도현은 준비해 온 과자봉지와 편지봉투를 반은 무너진 툇마루 위에 올려놓았다. 약간의 돈이 들어 있는 편지봉투. 그리고는 건강하시라고 인사하고는 다음 주에 또 오겠다 말하고서 돌아섰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이 나서 한마디 덧붙였다.
“혹시 팔덕이라는 사람 아세요?”
다음 주 금요일 도현은 또다시 해곶으로 향했다. 할머니 집으로 가는 도중 들꽃들을 꺾어서 한 아름 만들었다. 코에도 대어보고 볼에도 비벼보았다. 봄. 참으로 좋은 계절이다. 생명과 희망만 있는 산과 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다 부질없는 듯이 느껴져 다소 시무룩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도현의 발걸음은 주저함 없이 갯벌 마을로 향했다.
할머니 집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없는 듯했다. 무례하긴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기척도 살피고 집 뒤로도 돌아가 보고 했지만 할머니가 있는 느낌은 없었다. 실망스러웠다. 할머니를 어디 가서 찾는다? 지난 두 번은 운이 좋아 금방 마주쳤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런 운이 따라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 근처를 모두 돌아다녀 볼 수도 없고, 또 길도 잘 모른다. 한없이 기다릴 수도 없다.
어쩐다?
도현은 뒷동산에 올라갔다. 아기자기한 무덤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비석도 없고 상석도 없었다. 원래는 있었겠지만 모두 다 어디론가 사라진 거겠지. 한 무덤가에 가서 도현은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제주도나 목포에서 본 바다와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검푸르게 너울거리는 파도들. 그 위로 피어오르는 옅은 하늘색, 또 그 더 위로 이어지는 짙푸른색 공간.
도현은 다시 수평선 끝으로 눈을 돌렸다. 옆으로 한일자를 그리며 퍼져 있는 일직선. 그 아래는 수많은 생명들이 숨겨져 있는 바다, 그 위로는 손바닥만 한 구름 몇 조각만 떠 있는 채 텅 빈 공간. 저 일직선 아래와 위가 저렇게 다르구나. 유와 무가 갈라지는 직선, 하늘 아래 물, 물 위에 하늘.
갑자기 도현은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과 바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명도 죽음도 시간도 역사도 미래도 슬픔도 기쁨도 고통도 인희도 성현도…….
도현은 문득 뒤돌아보았다.
할머니!
도현은 벌떡 일어났다.
도현은 가슴을 콩닥거리며 수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제일 뒷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다시 한번 할머니가 준 봉투를 꺼내어 보았다. 그 무덤가에서 할머니는 언제 왔는지 바로 뒤에까지 와서 도현이 돌아보다가 깜짝 놀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편지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도현이 얼떨떨해 하며 일어나서 봉투를 받아들고 보았더니 주소 하나 외에는 이름도 다른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우표가 하나 붙어 있었다. 도현은 할머니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들에서 꺾어온 꽃다발과 돈이 들어 있는 봉투를 할머니 손에 쥐어주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도현을 지나쳐서 내려가 버렸다. 도현은 할머니 뒤에 대고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가 어디에다 깊숙이 보관해 두었었는지 반으로 반듯하게 접힌 흰 봉투에는 때가 약간 묻어 있었다. 그리고 겉봉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사서함 주소만 적혀 있었고, 편지봉투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글씨는 엉망이었지만 알아보는 데는 문제없었다.
경기도 천안시 우체국 사서함 2××
이게 무슨 뜻일까? 왜 이것을 주었을까? 누가 준 걸까? 그리고 이 주소로 편지를 받을 사람은 누구일까? 또 왜 수신인 이름은 없는 것일까? 또한 발신인 이름이나 주소가 없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현의 머리 한계 너머의 것 같았다. 다만 할머니가 준 이 봉투는 적어도 인희나 인국, 또 혹시 팔덕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이것만도 큰 수확이다. 이제 그 할머니한테는 더 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할머니 역시 그런 뜻으로 준 것일 테고. 나머지는 도현 몫이다.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풀어갈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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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은 우체국에 가서 사서함에 대해 알아보았다. 사서함이 설치되어 있는 방에는 열쇠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 즉, 사서함 방 열쇠와 사서함 열쇠 두 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서함은 어떤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일까? 도현이 알아보니 주로 기업에서 이용하는 것 같았다. 특히 외국과 거래하는 회사에서는 국내 주소를 쓰는 것이 복잡할 경우 간단한 사서함 주소를 알려주는 것이다. 방송국이나 신문사에서도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시청자나 구독자들에게서 퀴즈나 설문조사를 하면서 한꺼번에 많은 우편물을 받을 경우 사서함 주소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국내에 있는 외국회사에서도 많이 이용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사를 자주 할 때도 옮긴 주소를 일일이 알려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어서 사서함이 편하다고 하며, 특히 자기 주소를 공개하고 싶지 않을 때도 사용하는 모양이다.
이 편지 주인공의 경우에는 아마도 마지막 이유가 해당될 것이라고 도현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왜 주소를 알려주고 싶지 않았을까?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조만간 알게 되겠지. 도현이 알아낼 테니까.
어떻든 할머니는 이 봉투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도현도 이것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아무런 표현이나 말 없이 봉투를 건네준 할머니의 손에는 잘 해보라는 격려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 여겼다. 물론 도현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일 테지만, 그래도 도현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도현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할머니에게 감사합니다 인사를 했다.
천안우체국에서 사서함이 설치된 곳은 우체국 뒤쪽이었다. 즉, 우체국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출입하는 문이 아예 다른 것이다. 도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천안으로 올라가서 사서함 문 주변을 서성거렸다. 수업을 빠지고 갈 때도 있었다. 특별히 어쩌자는 생각도 없었다. 사서함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희나 인국,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팔덕이라는 사람 또는 그들과 연결된,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인물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서함 번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사서함의 주인이 만일 인희라면 5년이 지났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외모가 예쁘고 고와서 한눈에 띌 테니 인희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인국이라면? 남매라도 거의 닮지 않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인희가 5년 전 도현네 집에 올 때 둘째언니 지현과 나이가 같았다. 19살. 지금은 24살일 테지. 인국이 3살 정도 아래라 했으니 21살 청년이다. 어떤 모습일까?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고 떠돌았다면 흔히 길거리에서 보이는 그 또래 남자들 정도의 모습이지 않을까. 인국은 그렇다 치고, 팔덕이라는 인간은 어떨까? 인희보다 서너 살 위라고 했다. 27살? 아무튼 20대 후반이다. 못된 인간일 텐데 그런 사람들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영화나 그런 데서 나오는 악당 같은 모습이려나? 도현은 길 가는 젊은 사람들을 살펴보며 인국과 팔덕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짐작하기 어려웠다.
인희. 도현네 집에 왔을 때 한창 꽃다운 19살이었지. 그런데 어쩌자고 아빠는 자기 큰딸보다 어린 여자애를 건드려 아기까지 낳고 집에 데려온 걸까? 딸들 보기에 민망하지도 않았을까? 하긴 그 결과는 민망 정도가 아니었지. 어떻든 인희는 지금 24살이다. 짐작컨대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성현. 벌써 다섯 살이다. 몰라보게 자랐을 테지. 그러나 제 엄마 아빠 모습을 보면 아마 잘생긴 아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성현. 보고 싶다. 아기 때 그 예뻤던 모습 사실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빠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도현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빠가 한 짓은 밉지만, 성현을 생각하면 아빠도 그 아이도 모두 불쌍한 느낌이 든다. 어떻게 해서든 성현은 찾아야 할 텐데.
도현은 사서함실 출입문을 감시하면서 가능한 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 애썼다. 사서함실 바로 앞으로는 가지 않고 건너편이나 한 옆 멀찌감치에 가서 어정거렸고, 게다가 할 수 있는 대로 복장과 머리 모양을 자주 바꾸었다. 가능한 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도현은 학교 공부에는 거의 흥미가 없어졌다. 집에서 걱정할까 봐 수업에는 최소한 정도만 출석하고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않으며 틈만 나면 천안으로 올라갔다. 4월, 5월, 6월……. 도현은 지쳤다. 학교 시험은 엉망이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재시험, 재재시험, 그것도 안 되면 조교나 교수들을 찾아가서 사정했다. 일단 학점을 따놓아야만 집에서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집에 올라가야 할 때도 각종 핑계를 대서 대전에 머물렀다. 혹 집에서는 도현이 바람이라도 난 게 아닐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도현은 픽 웃었다. 사실 자기도 그랬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러고 나니 한번 더 피식 웃게 되었다.
사서함실에는 사람들이 그리 자주 드나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 유형도 어느 정도 정해진 듯했다. 전형적인 회사원. 넥타이와 와이셔츠, 양복 차림. 그리고 유니폼 입은 여직원이나 사환 복장의 학생 티 나는 사람, 아주 가끔 외국인도 있었다. 천안에도 외국회사가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아주 나이 많은 분들도 있었다.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물론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아주 특이하게도 중년 아주머니나 아무렇게나 입은 젊은 사람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어떻든 그들 중 특별히 도현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아직은 아무도 없었다.
1학기 말 고사를 앞둔 어느 날 오후, 도현은 우체국 건너편의 제과점에서 빙수를 시켜 먹으며 감시하고 있다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한 젊은 사람이 사서함실로 다가가는데 주변을 자꾸 둘러보며 확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직까지 그러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곧장 문으로 가서 열쇠를 집어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많이 달랐다.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는 모습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이 어딘지 밝은 느낌을 주지 않았다. 복장도 아무렇게나 입었고. 게다가 20대 후반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체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으며, 얼굴빛은 좀 검은 편이었다.
밖에서는 제과점 안쪽이 잘 안 보일 것이다. 도현은 안심하고 남자의 모습을 계속 살폈다.
남자는 사서함실 문을 열고서도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한 번 더 주변을 살핀 뒤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은 얼른 계산을 하고 제과점 문 안쪽에 서서 내다보았다.
잠시 후 남자가 나왔다. 이번에도 곧장 어디로 가지 않고 주변을 살핀다.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늘 조심하는 사람. 주변을 살피는 사람. 맹팔덕, 아니면 적어도 그 비슷한 사람들 부류이리라.
남자가 길을 따라 걷는다. 도현은 밖으로 나가 길 건너편을 따라 걸으며 남자를 눈으로 좇았다. 지루하던 세 달 끝의 성과일까? 도현이 감시하는 이 세 달 사이에 남자가 저곳에 처음 나타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도현이 학교에 있거나 서울에 올라가고 해서 감시하지 못한 시간이 더 많다. 그러나 어떻든 오늘은 좋은 결과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도현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남자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다가가더니 버스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도현은 황급히 길을 건넜다. 지나가는 버스나 택시에서 클랙션을 요란하게 울린다. 도현은 겁이 나긴 했지만 어떻든 무사히 건넜다. 막 건너편 보도로 올라서는 순간 버스가 출발했다. 아차! 도현은 낭패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자의 모습이 정류장에서 보이는 것이다. 그 버스에 타지 않았다! 다행이다.
도현은 딴청부리듯 건너편을 바라보며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또 다른 버스가 도착했다. 온양을 거쳐서 유구까지 가는 시외버스였다. 도현이 곁눈으로 보니 남자의 몸이 움직인다. 타려는 것 같았다. 도현도 남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버스가 서자 두어 사람 내리고 사람들이 올라탄다. 남자도 그 뒤를 이어 버스에 올라간다. 한 사람 건너 도현도 올라탔다. 버스 안이 자리가 많이 비어 있었다. 남자는 제일 뒤로 들어간다. 도현은 중간쯤에 가서 앉았다.
버스는 온양 시내를 거쳐서 유구 쪽으로 향했다. 좁다란 길을 비틀비틀 달리더니 버스차장이 유곡리라고 소리치는 곳에 이르자 남자가 뒤에서 일어서서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도현은 망설여졌다. 따라 내려야 하나? 그런데 그곳에서 내리는 승객이 딱 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에 버스는 출발하고 말았다. 도현은 남자가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을 눈으로 좇았다. 버스가 가는 길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난 좁을 길을 따라 몸을 흔들흔들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현이 남자를 따라서 내려 그가 사는 곳까지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 정도로도 됐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골 산골에서야 찾기로 마음먹으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일단 여기까지만 진행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사실 저 남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맹팔덕일 가능성이 아주아주 높다. 그것만 해도 큰 성과라고 생각했다.
3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도현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직 인희는 찾지 못한 것이다. 도현은 아빠의 이야기에서 가거도가 언급되었을 때부터 늘 그곳을 생각하고 있었다. 인희가 그곳 분교에서 잡일을 했다고 하니 가거도에 꽤 오래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그곳에 가보면 무언가 단서가 잡힐지도 모른다고 여긴 것이다.
집에다는 여행이나 좀 하겠다고 말을 해놓고 도현은 흑산도를 거쳐 가거도, 즉 소흑산도로 향했다. 서쪽바다 맨 끝, 마치 무인도와 같은 느낌이 드는 그 섬에는 예상 외로 외지에서 사람이 적지 않게 와 있었다. 대학생이나 교회의 낙도봉사, 조류나 희귀 해상생물 탐방 또는 대한민국 최서단 섬이라는 점 때문에 호기심으로 여행 온 사람들이었다. 도현은 다행이다 싶었다. 그들 틈에 숨으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테니까. 도현은 인희를 좇는 자신의 존재를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가거도에 가긴 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닐 수도 없어서 아빠처럼 인희가 일했다는 분교를 찾아가기로 했다. 가거도 북부에서 산 서쪽에 있는 항리분교, 그리고 산 너머 동쪽에 있는 또 다른 대풍분교. 교실 한 채와 그 옆에 딸린 사무실 하나. 어찌 보면 동화 속 학교였다. 아빠는 대풍분교에서 인희를 만났다고 했다. 그때로서는 지금과 같은 일이 생길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 7년 전 아빠가 온 곳을 도현이 왔다. 또 그 이전, 그러니까 10년 전에 인희가 온 곳을 도현이 찾은 것이다. 각자 다른 목적으로. 이 무슨 기이한 접점이란 말인가.
도현은 묘한 감상에 사로잡혀 분교 주변을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았다. 소흑산도라니 섬이 검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해안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검은 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검둥여, 작은여, 오동여 등의 특이한 이름이 붙어 있어서 재미있는 느낌이 들었다.
도현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피해 혼자서 조용히 여기저기 다녔다. 그러나 딱히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도현은 단순한 관광객처럼 섬 아래 동쪽으로 나 있는 등대까지 타박타박 걸었다. 한 가족이 등대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가족 모습이 참 특이했다. 아빠, 엄마, 그리고 두세 살 된 아들 하나. 무엇이 특이했냐고? 아빠로 보이는 이의 키가 참 작았다. 엄마보다 훨씬 작았다. 그러나 난장이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도현이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저쪽에서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흘끗흘끗 바라보고 있는데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온다. 도현은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듯해서 얼른 눈길을 돌렸다.
“저, 실례지만 사진 좀 찍어주시겠습니까?”
“네? 아, 네, 네네.”
도현은 남자가 건네주는 카메라는 받아 등대를 배경으로 해서 가족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다.
남자는 카메라를 돌려받으며 묻는다.
“봉사 오셨나 봐요?”
“네? 아, 네네.”
“고맙습니다. 여기에서 봉사도 하시고 여행도 잘 하시고 가십시오.”
“아, 네네.”
남자는 카메라를 돌려받고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도현은 남자의 행동이 작은 키에 비해 어딘지 당당한 느낌이 들어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은 아무런 존재감이 없이 이곳에 왔다가 돌아가야 하는데 공연히 남의 눈에 띄게 행동한 것은 아닌가 하고 약간 걱정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워낙 좁은 섬이고 하니 외지 사람들은 당연히 눈에 띄겠지. 그런 사람들이 한둘인가 뭐.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섬 이곳저곳 다니다 보니 키 작은 그 사람이 하나의 화젯거리였다. 흑산도 바로 옆 동북쪽에 있는 대둔도의 한 교회 목사라고 하는데, 그 작은 키에도 남들에게 기죽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대둔도뿐만 아니라 가거도에도 한두 달에 한번은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더군다나 신학대 들어가자마자부터 대둔도에 가서 교회를 이끌었으며, 그때도 가거도에 와서 많은 일을 했던 모양이다. 그 작은 키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기 할 일은 다 한다는 것이다.
도현은 생각했다.
인희가 이 섬에서 몇 년간 지냈던 것 같다. 그러면 당연히 그 목사와 만나지 않았을까. 주민이 몇백 명 되지도 않는 조그만 섬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외지에서 온 예쁘장한 소녀라면 사람들 눈에 금방 띄었을 텐데, 당시 전도사였다면 혹 전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접근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가능성이 아주 많은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만일에, 만일에……. 인희와 그 목사가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인희는 지금까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기와 함께.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생활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받으려 할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래, 이 가능성을 쫓아가 보자. 혹시라도 인희가 자신의 힘든 상황에 도움을 얻고자 그 목사에게 어떤 형태로든 연락할 수도 있을 테니까.
편지 같은 형태로라도.
도현은 대둔도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교회를 찾아가 보자. 일단은 무조건 가보는 거다.
도현은 서둘러 가거도를 빠져나가 흑산도로 갔다. 그곳에서 대둔도는 배로 잠깐이었다. 배편도 많았고. 그곳에서 교회를 찾아보았더니 섬 양쪽 끝에 하나씩 있었다. 어느 곳이 그 목사 교회인지 모르겠지만 목사의 성이 정씨였으니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찾았다. 그 교회.
아담하고 깨끗했다. 그러나 여기저기 수리해야 할 데가 많아 보였다.
도현은 혹 우편물 온 것은 없는지 교회 앞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목사가 가거도로 간 사이에는 편지가 오지 않았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치웠겠지.
교회 근처를 너무 서성거리면 의심받을 것 같아 도현은 얼른 대둔도를 떠났다.
그 이후 도현은 여름방학에만 무려 여덟 번이나 대둔도에 갔다. 도현은 관광객인 양 그 교회 앞을 무관심한 듯 지나쳤다. 혹 우편물이 교회 앞에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곁눈으로 살펴보면서. 한번은 우체부가 그 교회에서 편지를 문틈으로 꽂아넣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서 도현은 가까이 가지 못했다.
평소에는 그 목사가 섬 여기저기 다니며 전도와 심방을 하기 위해 교회를 자주 비우는 것 같았다. 목사의 집은 교회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2학기가 시작된 뒤에도 주말마다 도현은 대둔도로 갔다. 물론 사람들 눈에 익지 않게 하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다.
9월말, 도현은 또다시 대둔도로 향했다. 집에는 각종 변명을 다 해서 이제 더 이상 통할 변명이 없을 듯한데도 집에서는 알면서도 속아주는 듯 넘어가 주었다. 대둔도에 도착해서 도현은 별 기대도 하지 않고 그 교회 앞을 무심한 듯 지나며 현관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 편지 몇 통이 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문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도현은 가슴을 콩닥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급히 그리로 가서 편지들을 뒤집어 보았다. 세 번째 편지 뒤에 써 있는 이름을 보았다.
성현 엄마 올림
헉! 숨이 막혔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쪽 멀리에서 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도현은 그 편지를 집어들지 못하고 주소만 눈으로 사진 찍었다.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 2××-3.
4
도현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빠한테 알려야 하나? 성현을 찾았다는 사실을.
갈등이 심했다.
도현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인희를 찾는 것인가, 성현을 찾는 것인가?
그와 동시에 슬며시 피어나는 죄책감.
도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빠에게 알리는 일은 조금 늦추자. 조금만 참자. 도현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도현은 수업도 빠진 채 양평동 그 주소지 근처를 배회했다. 우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머릿속에 그린 그대로 예쁜 어린애. 대여섯 살은 족히 되었을 사내아이. 너무 귀엽고 제 엄마 쏙 빼닮은 모습. 아빠보다는 엄마 닮았다.
도현은 인희도 확인했다. 성현을 집에서 데리고 나오고 들어가고, 그밖에 여러 일로 그 집을 드나드는 모습. 옷이나 머리 모습은 소탈했지만 여전히 곱고 예뻤다. 20대 중반의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고,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얼굴에 그늘이 진 느낌이었다.
모든 게 확실해졌다.
이제는 어떻게 한다……?
도현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갈등했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속으로 감추어둔 것, 그것은 꺼내놓지 못하고 겉으로만 돌았다. 숨이 막혔다.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가슴도 마구 방망이질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속 한 구석에서 누군가가 속삭이는 듯했다.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계속 들려오는 소리…….
도현은 해곶으로 한번 더 가보자고 했다. 그런 다음 결정하자.
해곶. 그 입구에서 도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에는 무엇을 하러 왔는가? 자신이 이제부터 하려는 일에 대한 당위성,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함은 아닌가? 해곶에서 도현이 찾을 것은 사실 없었다.
해곶을 처음 찾았을 때 느꼈던 음울하고도 음산했던 분위기. 그러나 두 번 더 찾아가면서 그 느낌은 많이 밝아졌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찾아오니 해곶의 분위기가 아니라 도현의 마음이 음울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름철 무더위도 아닌데 숨이 탁탁 막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도현은 몸을 돌렸다.
도망가자!
도현은 정신없이 뛰었다. 10월 중순의 가을하늘은 청명하고 공기는 맑았으나 도현은 지금 지독하게도 어두운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도현은 집에 돌아가서도 며칠 밤을 또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도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인희의 주소를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 해곶 할머니가 준 편지봉투를 꺼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자.
도현은 주소 종이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 뒤 자동인형처럼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어느 곳엔가 가서 우체통에 살며시 밀어넣었다. 마치 벌레 잡아 집어넣은 봉투 쓰레기통에 버리듯.
도현은 그 이후 며칠 동안 심한 몸살을 앓았다. 꿈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열이 많이 올라가서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에는 물론 가지 못했고.
하숙집 주인이 도현의 상태를 보고 서울 집에 연락을 했다.
아빠가 한달음에 내려왔다. 도현의 열이 너무 높아 병원에 입원시켰다.
도현은 울고 싶었다. 자백하고 싶었다. 무서웠다. 말을 하면 살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순간들을 무슨 힘으로 버텼을까? 악심?
도현은 대학을 휴학하고 서울 집으로 올라갔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