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신부는 경기도 비봉으로 향했다. 택시를 탔다. 그 길, 도시가 변한 것 이상으로 도로도 시골도 변했다. 고속도로, 아파트, 빌딩, 상가……. 별천지였다. 마치 미래도시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환열이 잠든 천주교 묘지. 이름이 바뀌었다. 추모공원. 더 긴 이름으로는 천주교서울대교구비봉103위성인추모공원. 입구에 있는 선돌 모양의 비석에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천주교서울대교구’는 두 줄의 작은 글자로, ‘비봉’은 큰 글자, 그 밑에 조그맣게 ‘103위’, 그리고 그 아래로 크게 ‘성인추모공원’.
조금 더 올라가자 사무실이 나왔다. 그리고 사무실 옆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길 입구에 ‘구원의 길’이라는 현판이 서 있었다. 그 위쪽으로는 여기저기에 여러 장식과 대리석상들이 세워져 있었고.
문 신부는 납골당인 추모관이나 사무실로 가서 환열의 묘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은 포기했다.
문 신부는 환열의 묘를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환열을 보기 위해 온 것이다.
장대비 쏟아지는 저녁 어스름에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찾았던 그 음울한 날, 그날 휘준은 두 번째로 그 묘를 찾아왔었다. 환열이 땅에 묻히던 날에서 반년이 지난 뒤. 휘준은 자신은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한 병 윗도리 안에 감춰넣고서 허청허청 걸어 올라왔었다. 휘준이 피우지 못하는 담배도 한 갑 샀었고. 떼를 제대로 입히지도 못하고 돌보지도 않아 늦가을 처량 맞은 소낙비로 패이고 쓸려나가고 있는 흙을 파서 소주와 담배를 그 속에 깊숙이 밀어넣고 흙을 다졌다. 그리고 복수, 그 말을 입에 올렸었다.
복수…….
근 반세기가 지난 지금, 경관 좋게 꾸며진 추모공원 앞에 서서 문 신부는 환열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둥근, 이목구비 없는 둥그런 보름달 같은 허여멀건한 원만 둥실 떠오를 뿐이었다.
여러 번 시도했다. 그래도 환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문 신부는 이곳에 올 때 막연한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란스러웠다.
이곳에 왜 온 것일까?
혹 겨울 햇살 화창한 하늘 아래에 서서 반세기의 세월 동안 품어온 그 모든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하느님의 자비로 덮으려 한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억울하게 스러진 생명을 잊어도 되는 것인가?
내가 용서하면 모두에게서 용서되는 것인가?
환열은? 그 못난 놈은 용서했을까?
문 신부는 아무런 대답도 얻지 못한 채 뒤돌아섰다.
하나는 실패했다.
교회를 떠나기 위해 정리해야 할 세 가지. 그 중 하나는 해답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패한 것이다.
문 신부는 김포의 장릉으로 갔다. 그 근처에 공원묘지가 있고, 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문중 선산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묻혔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묘를 만들어서. 아버지는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유신정권 끝날 때까지 국회의원을 했으니까. 문 신부는 선산에 가보지 않았으나 묘에 대한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정계에서 나온 뒤 지방에 내려가서 경영난에 허덕이는 고등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수완이 좋았는지 인맥이 좋았는지 그 학교를 지방의 명문고로 만들었다고 한다. 일류대학 많이 보내는 학교. 지금은 뒤늦게 얻은 후처의 자식들이 운영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경찰 고위직으로 퇴직했다. 선친께서 물려준 약간의 땅과 집. 그것이 불어난 것일까? 재산관리를 잘한 덕일까?
문 신부는 고개를 흔들었다.
장릉 공원묘지 역시 이름이 바뀌었다. 김포공원법인묘지.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문 신부와는 상관없는 곳이니까.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선산이 있어야 할 곳에 어마어마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복덕방. 이것도 이름이 바뀌었다. 부동산중개소. 차라리 복과 덕을 가져다주는 방이 더 좋았는데……. 아무튼 부동산중개소에서도 선산의 가족묘가 어디로 옮겨졌는지 모른다고 했다.
문 신부는 문중사무실에 찾아가 볼까 생각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도 실패했다.
아버지와 화해? 돌아가신 분과 화해하겠다고 이곳에 찾아온 것일까?
아니다. 아버지가 한 짓을 알려주려 한 것이다. 어쩌면 휘준은 유신정부와 투쟁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것인지도 모른다. 휘준은 아버지 돈으로 성장하고 누리고 미국까지 가서 공부했다. 그런데 반기라니?
흔히 말하는 이율배반의 극치가 바로 휘준 자신이 아니던가.
사실 휘준이 신부가 된 것에는 아버지에게 보여주려 한 목적도 있었다. 아버지 돈의 위력이 더 이상은 휘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그 목적은 성공한 것일까?
어제까지는 성공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아니다.
물론 오늘 이후라도 아버지 돈에는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휘준은 스스로 선택한 길을 끝까지 이겨내지 못하고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승리도 아니지만, 휘준의 승리도 아니다.
하지만 여하튼 휘준은 실패한 것이다.
문 신부는 꽃집으로 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다발을 샀다.
이제 수유동으로 가야 한다.
세 번째 계획.
꽃다발을 주는 것.
- 저를 모르시죠?
- 어제 알게 됐어요.
- …….
- 생각이 났거든요. 제과점에 오셨던 분.
- …….
- 소문 들었어요. 그 제과점 앞에서 있었던 일.
- …….
- 데모하시다 그렇게 됐다고…….
- …….
- 그런데 어떻게……?
- 그날 죽었어야 하는데…….
- …….
- 미안합니다. 이런 말 해서.
- 아녜요, 아녜요…….
- 참,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 …….
- 오래된 이야기인데……, 버스정류장에서 어떤 남자분하고 같이 내렸었는데…….
- …….
- 아, 쓸데없는 말을 했군요, 제가. 죄송합니다.
- 죽었어요.
- 아, 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 자살했어요.
- ……?
- 많이 싸웠거든요.
- …….
- …….
- 아니, 왜…….?
- 신부님 때문에…….
- …….
- 죄송해요. 이런 말 해서.
- 왜……?
- 그 제과점 앞에서 있었던 일을 그 사람이 알고 많이 힘들어했어요.
- …….
- 비관했거든요. 신부님하고 자신을 비교하면서.
- …….
- …….
- 이런 말 죄송합니다만, 그 뒤 결혼하셨습니까?
- …….
여자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자와 이러한 대화를 나눈 뒤 문 신부는 성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기도실로 향했다.
그 밤 한잠도 자지 못했다.
새벽녘에 문 신부는 한 가지를 결정했다.
여자에게 청혼하기로.
휘준은 수유동 ‘추억의 길’ 앞에 섰다. 자신의 손에 쥔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사람들도 쳐다보겠지.
가슴이 뛰었다.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 같았다.
휘준은 성큼성큼 걸었다.
제과점 문을 열려는 순간, 휘준은 꽃다발을 놓치고 말았다.
그 남자가 생각난 것이다. 휘준 때문에 비관한 그 사람.
휘준 때문에 죽은 남자……. [끝]
(시조 해설)
천만리 머나먼길해 고은님 여희옵고
내마맘 둘데업셔 냇가에 안자시니
져물도 내만갓하여 우러밤길 녜놋다
왕방연(王邦衍, 생몰연대 미상) | 단종이 1457년(세조 3년)에 영월로 유배될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호송한 뒤 지은 시. 그 이후 또다시 사약도 가지고 가서 차마 내밀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이 일 후에 왕방연은한밤에 한 시냇가 언덕에 앉아 슬피 울면서 이 노래를 지었다. 그 뒤 1617년 문신(文臣)인 김지남(金指南, 1600~1650)이라는 선비가 금강을 지나다 아낙들이 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듣고 단가(短歌)로 지었다고 한다. 영조 때 가인(歌人) 김천택(金天澤)이 엮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이 시가 실려 있다. 《청구영언》은 고시조집으로, 《해동가요(海東歌謠)》 및 《가곡원류(歌曲源流)》와 함께 3대 가집으로 알려져 있다.
청초 우거진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은 어듸두고 백골만 무쳣난이
잔잡아 권할이업스니 그를슬허 하노라
임제(林悌, 1549~87) | 선조 때 시인. 과거에 급제하여 평안도 정6품 무관 평사(評事)로 부임할 때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면서 이 시를 지었으나, 이로 인해 임지에 가보지도 못한 채 관직을 삭탈당하고 선비사회에서 배척받았다. 그 뒤 명산을 찾으며 시문을 즐기다 37세에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