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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 Nov 15. 2024

1화. 각성

"미세표정이 보이기 시작한 날, 내 세상이 달라졌다"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특히 상담심리학 수업에서 '미세표정'을 배울 때마다 더욱 그랬다. 사람은 감정을 숨기려 해도 0.04초에서 0.5초 사이에 진짜 감정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것.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심리학과 4학년 강민우인 나조차, 실전에서 미세표정을 읽어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날도 평소처럼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지막 학기, 학점을 위해서라도 이서연 교수님의 '인간심리와 행동분석' 강의는 놓칠 수 없었다.


"자, 오늘은 폴 에크먼의 FACS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서연 교수님이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넘겼다. Facial Action Coding System. 표정의 모든 움직임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이었다.


"인간의 얼굴은 43개의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이 만드는 조합은 무려 만 가지가 넘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진정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찌르르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마치 누군가가 뇌 속에 전기를 통한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미세표정은 0.04초에서 0.5초 사이에 나타나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교수님의 얼굴 위로 연한 황금빛이 번졌다. 마치 물감이 퍼져나가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실시간으로 수치가 보였다. '열정(82%)', 그리고 그 아래로 '즐거움(65%)'.


황금빛은 곧 회색빛으로 변해갔다. 내 혼란스러운 표정을 발견한 걸까? 교수님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지는 게 보였다. 0.3초. 그 짧은 순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강민우 학생, 괜찮나요?"


걱정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그 얼굴 위로 번지는 건 걱정(연한 파랑, 45%)과 함께 섞인 날카로운 호기심(밝은 초록, 55%)이었다. 감정에 정확한 수치가 보인다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네... 죄송합니다. 잠시 어지러워서..."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의 얼굴에서도 각양각색의 감정이 보였다.


중간고사를 앞둔 2학년 후배의 얼굴에선 짙은 파랑(불안, 82%)이 소용돌이쳤다. "선배, 시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니까요..."


소개팅 약속이 잡혔다며 들뜬 친구의 얼굴엔 반짝이는 황금빛(기대, 95%)이 가득했다. "이번엔 진짜 대박일 것 같아!"


과제 제출에 쫓기는 학생의 얼굴엔 탁한 녹색(스트레스, 78%)이 번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을 열었다.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거울 속 내 얼굴 위로는 검은 보라색(공포, 89%)이 소용돌이쳤다. 이게 꿈이길 바랐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 얼굴을 씻었지만, 감정의 색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정하려 심호흡을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이서연 교수님이었다.


"강민우 학생, 내 연구실로 와요. 학생과 할 이야기가 있어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수화기 너머로도 그 얼굴 위에 피어오르는 진한 회색(심각함, 92%)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걸까? 교수님도 내가 겪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걸까?


연구실로 가는 길, 복도를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이 보였다. 연인과 다투고 있는 여학생의 얼굴에선 진한 빨강(분노, 88%)과 짙은 파랑(슬픔, 75%)이 번갈아 나타났다. 졸업 논문 발표를 끝낸 선배의 얼굴엔 옅은 황금빛(안도, 62%)이 감돌았다.


문득 깨달았다. 이 능력으로 나는 사람들의 진짜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말로는 표현하지 않는, 때론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수한 감정들을.


하지만 그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이서연 교수님의 연구실 앞에 섰다. 문 너머에서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렸다.


"또 한 명이 각성했습니다."

"자연적 각성인가?"

"네,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각성'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 말고도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걸까? 노크를 하려는 순간,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강민우 학생."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문을 열자 이서연 교수님과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얼굴에서는 진한 회색(경계, 88%)이 번졌다.


"박 교수님은 이만 가보시죠."


중년 남자가 나가며 던진 시선. 그의 얼굴에서 회색이 검은 보라(불안, 75%)로 변했다. 


이제 연구실에는 나와 이서연 교수님만 남았다. 교수님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복잡했다. 연한 황금빛(기대, 48%)과 진한 회색(긴장, 52%)이 교차했다.


"앉으세요."


의자에 앉자 교수님이 서랍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20년 전쯤으로 보이는 흑백사진이었다. 젊은 시절의 교수님과 누군가가 함께 찍은 사진.


"그 분은 나의 스승이었어요. 그리고..." 교수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처럼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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