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올바르게 산다는 것

by 이영진

이번 수필 춘추 봄 호에 실린 제 글 입니다. 평소 존경하던 차일혁 총경에 대한 글입니다. 읽어 봐 주십시요.


올바르게 산다는 것


이영진


문화를 잃으면 마음을 잃고, 마음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 차일혁 총경이 한 말이다.


1951년 5월, 한국전쟁 중 빨치산 근거지로 변한 지리산 화엄사를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고, 제 18 전투경찰대대장 차일혁은 항명했다. 화엄사의 출입문 문짝만 떼어 불태웠다. “절을 태우는 것은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 년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그는 명령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으면서 까지 부하와 동료들을 설득하여 장성 백양사, 고창 선운사, 덕유산의 많은 사찰을 지켜냈다.


차일혁은 1920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학생들 앞에서 조선인 교사를 연행해 가던 일본 순사를 구타하여, 수배령이 내려졌다. 이름도 바꾸고 피해 다니다 결국 중국으로 건너가 평생 스승으로 모시던 지강 김성수 선생을 만나 조국애를 깨우치고, 그의 추천으로 중앙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조선의용대로 참여, 많은 항일 유격전에 참여하였다. 해방이 되어 돌아온 조국은 악명 높은 일본 경찰들이 미군정의 보호 아래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세 명의 일본인 악질 경찰을 저격하고 전주로 내려가 이름도 바꾸고 숨어 지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격대를 결성해 북한 인민군과 싸웠고, 경찰로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6년 동안의 전투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51년, 빨치산 2,500명이 칠보발전소를 포위 총공격을 펼쳤을 때, 75명의 병력으로 끝까지 지켜냈다. 칠보 발전소는 남한 유일의 수력 발전소였다.


1953년 9월에는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고, 그 부대를 섬멸하였다. 남부군 사령관이자 ‘공화국의 영웅’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 창경원에서 전시되었지만 그 이후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어가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이현상의 숙부조차도 ‘나라의 역적’이라며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이 말을 듣고 그가 과감히 나섰다. 이현상의 시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53년 10월 8일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차일혁에 의해 화장되었다. 스님을 불러 독경을 하고, 극락왕생을 빌었다. 화장 후 남은 뼈는 모아서 자신의 철모에 넣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빻아서 그 재는 정중하게 섬진강 강물에 뿌려 주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자신의 권총으로 조총(弔銃) 세 발을 쏘아 마지막까지 예(禮)를 다했다. 이에 대해 다른 지휘관들이 비난하자 “죽은 뒤에도 빨치산이고 좌익입니까? 공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 줍시다.”하고 쏘아 붙였다.


그런가 하면 동족 간에 총부리를 맞대야 하는 혈투 속에서도 민족애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 귀순을 유도해서 많은 빨치산의 목숨을 살렸다. 그가 작성한 귀순 전단을 보면,


‘빨치산 간부 및 전사들에게! 그대들의 귀여운 자녀와 다정한 아내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입산한 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작년 겨울 무서운 추위에 그대들 손발은 얼어 터지고, 심신은 지쳐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는 빨치산 전사, 간부 여러분. 이제 우리 경찰과 군인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단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권고하니 따뜻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시오. 매일 밤 그대들 친지가 있는 부락에 내려와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하는 것이 그대들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도 달뜨는 저녁, 꽃피는 아침, 깊은 산중 고요한 가운데서 한줄기 눈물을 흘렸을 때도 있었을 것이오. …(중략)… 우리는 같은 민족 한 형제로 언제부터 우리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알았단 말입니까.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형제의 품에 안기시오. …(중략)…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는 데도 나의 충고를 무시한다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오. 어서 빨리 그대 지휘관들의 허위에서 벗어나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시오. - 제 18 전투경찰대대장 차일혁’


그는 1951년 10월 첫 패배를 당했다. 무주 구천동 심곡리 주민들의 거짓 정보로 많은 부하를 잃고 전투에 패했지만, 곧 전열을 재정비해 작전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고,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도 모두 회수했다. 전우들의 시신을 보고 흥분한 부하들이 빨치산과 내통한 사람들을 골라내고, 마을을 불태워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빨치산과 토벌 군경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짓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부하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합동 장례식을 치러주고 그 마을을 떠났다. 자신을 쏘아 왼팔에 관통상을 입힌 공비가 투항하여 끌려왔을 때도 모두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그를 훈계한 후 그냥 풀어 주었다. 또, 부역자 중 쓸 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대원으로 삼았다. 그들이 배신하면 어쩌겠냐는 윗사람의 반대에 자신이 그들의 신원 보증서를 쓰고 자신의 부대에 편입시키겠다고 했다. 그의 행동에 상관은 껄껄 웃으며 ‘빨치산 토벌 부대가 빨치산 부대가 되겠구먼.’하며, 그의 용기를 받아들여 주었다. 적으로 적을 제압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이었다. 평소에도 ‘빨치산은 빨치산이 가장 잘 안다.’면서 이들을 아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총상을 입고 잡혀온 포로 중 말투가 일반 공비가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어 차일혁이 그를 직접 면담했다. 계속 죽여 달라는 그 공비에게 권총을 건네며, 스스로 죽든가 나를 쏘라고 하였다. 다들 놀라는 순간 포로는 권총을 들었다가 힘없이 내려놓으며 그대로 실신했다. 연대 의무대에 있던 경성제대 출신의 경사가 달려와 이 사람은 ‘경성제대 의대를 졸업한 이형련’이며 고향 친구이니 제발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신상을 조사해 보니 빨치산에서도 높은 간부였다. 하지만, 이미 파상풍이 온몸에 퍼지고,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가망이 없었다. 빨리 고향에 있는 그의 부인을 불러오라 하고,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그에게 수혈을 해 줬다. 수혈을 받고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만 3년 만에 부인과의 상봉이 이루어지고, 차일혁의 피로 생명을 연장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차일혁은 그에게 파상풍으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이제 전쟁을 끝내야 한다, 내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위치를 찍을 테니 맞으면 고개만 끄덕여 달라고 하였다. 이곳저곳을 지적하다 지리산 빗점골을 찍으니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재차 지도상의 빗점골을 가리키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통해 이현상이 평단원으로 강등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차일혁에게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현상의 거처를 알려주고 떠났다. 이현상의 사살 소식이 알려지며 빨치산 조직은 급격히 해체되었고, 기나긴 토벌 작전이 끝났다. 그리고 지리산에 평화가 찾아왔다.


오랫동안 존경해 오던 한 인물에 대한 조사와 그의 행적이다. 아직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이 나라. 그 누구보다 더 험준한 세월을 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온 차일혁 총경. 그의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봐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일제 식민지 시대 태어나 나라도 없이 살다가 조국 광복을 위해 타국에서 싸웠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는 아직도 조국에서 활개 치는 악질 일본 경찰들을 총으로 쏘았다. 6번이나 이름을 바꾸며 숨어 살아야만 했던 그의 험난한 삶. 사상의 차이로 서로 죽고 죽이는 어리석은 전쟁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비록 적이었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끌어안으며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한 대한민국 경찰의 표상. 그분과 그 시대를 겪은 많은 분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의 안락함이 있지 않을까? 험난한 세월 속에서도 정의로움을 잃지 않고 살아오신 모든 분께 존경과 위로의 마음을 올린다.


차일혁 총경! 그는 지금 대전 현충원에 부하들과 함께 영원히 잠들어 있다.


2022년 봄호 <수필춘추> 수록 작품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진짜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