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은부드러워 Oct 15. 2019

큐레이션이 브랜드가 될 수 있을까

큐레이팅을 통해 나름의 브랜드를 만들어낸 이야기

한 권의 서점


지난 주말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자 서촌에 다녀왔습니다. 경복궁 서쪽에 자리한 서촌 거리는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북촌과 달리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고 좁은 골목길로 이어져있는 구석구석에 아늑한 한옥 기와를 바라보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경험을 하곤 하죠.


서촌의 끝자락에 위치한 한 권의 서점을 방문했습니다. 지난 7월에 오픈한 한 권의 서점은 1달에 1권의 책만 전시하고 판매하는 꽤 대범한(?) 서점입니다. 자신만의 유니크한 관점을 지향하는 독립서점이 많아지는 가운데, 그 끝판의 모습을 보여준 서점이랄까요. 단 한 권의 책만 큐레이션 하여 다루는 이 서점의 패기에 많은 고객이 (기대반 걱정반) 서점의 이모저모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왜. 서점은 한 권의 책만 다루게 되었을까? 작은 서점을 둘러보며 다양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봤을 때 가장 큰 이유는 무수히 많은 책을 쉽게 접하고 구매할 수 있는 현시대의 상황 때문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힘없는 오프라인이 대응했던 의미심장한 전략이 역설적으로 과감한 축소였습니다.


의미 있는 선별. 즉 큐레이션을 통해 고객을 매장으로 끌어오는 일은 사실 서점뿐만 아닌 전반적인 산업에서 벌어지는 공통된 흐름입니다. 서점, 카페, 펍, 잡지 등 오프라인 매장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비즈니스에서 근래 들어 유난히 축소의 전략을 고집하는 이유는 양으로써 도저히 온라인과 경쟁할 수 없다는 준엄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뭐든 큐레이션 하면 비즈니스가 된다.


지금과 같이 정보가 무분별하게 넘쳐나는 사회에선 '제대로 된 것에 대한 구별'이 자체적으로 하나의 큰 비즈니스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업계에서 유행하는 큐레이팅, 에디팅, 편집, 셀렉팅, 제안 등 대부분의 단어는 다수의 것에서 의미 있는 특정 부분을 골라내는 일이라는 점에 그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산업군에서 정보와 제품이 넘쳐나는 현상은 동일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품과 정보의 공급과잉은 어느 업계도 비켜나갈 수 없는 엄연한 흐름입니다. 그런 과잉의 흐름 속에서 소비자에게 적재적소의 가치 있는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반대로 소비자 입장에서 역시 만족스러운 구매를 경험 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죠.


무분별한 제품의 홍수 속에 되려 가치가 빛났던 것은 '제대로 된 것'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제품들입니다. 블루보틀, 인텔리젠시아, 프릳츠, 어니언 등 커피업계가 스페셜티 기반의 브랜드로 재편된 것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맥을 같이 합니다. 딱딱한 국내 맥주업계에 크래프트 수제맥주 바람이 불어온 것 역시 제대로 된 것에 대한 소비자들의 갈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품의 홍수 속에 제대로 된 것에 대한 희망의 흐름을 타고 나온 블루보틀


'많을수록 좋다.'라는 다다익선 적 사고는 이제는 구시대적 발상입니다. 무수히 많은 브랜드, 음악, 음식. 등 정보와 선택지가 많아진 지금의 상황에서는 제품의 분별없는 추가가 아닌 센스 넘치는 선별을 통해 더 큰 비즈니스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제품의 컬렉션이 갖고 있는 의미 있는 세부를 선별하고 추출하는 큐레이션은 분명 비즈니스 관점에서 중요한 수익 모델입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제품의 과감한 선별은 곧 제거된 제품이 가져올 수 있는 수익의 상실과 동일한 말입니다. 과감하고 비약적인 축소를 통해 정서적인 공간과 메시지를 다듬어 낼 수 있지만 그 과감한 행보가 결과적으로 수익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이 아닐테죠.


두 권의 서점, 세 권의 서점은 안됐던 걸까요? '한 권의 서점'이란 타이틀이 정서적으로 고객에게 더 깊은 울림을 줄 순 있겠지만, 한 권의 책을 통해 얼마만큼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결국 지나친 선별은 비즈니스 관점에서 되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큐레이션을 통해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생존하기 위해선 나름의 컬렉션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규모이거나 다른 여타의 경쟁사가 넘볼 수 없을 만큼의 기획력을 통해 차별화된 '브랜드'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5층 규모로 이뤄진 사운즈 한남의 스틸북스는 수익과 큐레이션의 접점을 찾아냈다.



큐레이션이 비즈니스가 되려면


큐레이션을 통해 산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례는 꽤 오래전부터 이어 내려온 검증된 비즈니스입니다. 올리브영은 뷰티 제품의 큐레이션을 통해 토탈뷰티 숍을 만들어냈고, ABC마트는 몇몇 신발 브랜드의 큐레이션을 통해 대표적인 슈즈 웨어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올리브영과 ABC마트는 큐레이션을 통해 '브랜드'가 된 대표적인 케이스였습니다. 큐레이팅 된 제품이 아닌 큐레이션을 한 브랜드가 주목받기 시작한 대표적인 사례였죠. 올리브영과 ABC마트는 "규모"에 초점을 맞춰 큐레이션 한 사업모델이었습니다. 매장 안에 얼마나 많은 브랜드와 제품을 담느냐가 관건이었죠. 그 만큼 수익은 확실히 보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 제품 자체가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상황에서 규모에 초점이 맞춰진 큐레이션은 더 이상 큰 의미를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더구나 양에 초점이 맞춰진 큐레이션 모델은 카피가 쉽다는 것이 단점인데 아니나 다를까 그 후 많은 경쟁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났죠. 큐레이션 1.0의 종말이었습니다.


큐레이션 1.0의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제품을 담느냐가 중요했다.


큐레이션 2.0


규모의 초점에 맞춰진 큐레이션의 방향성에 벗어나 큐레이션 2.0으로 버전 업되어 나온 해법은 '편집'이었습니다. 기존 큐레이션이 좋은 재료의 풍부한 컬렉션을 모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이제는 그 싱싱한 재료를 갖고 어떤 소스로 어떻게 요리하고 어떤 접시에 담을 것인가? 즉 다른 무엇과 어떻게 조합하고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편집의 기획'은 큐레이션 기업이 브랜드가 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여겨집니다. 한 권의 서점 예를 다시들어보까요. 한 권의 서점이 이 달의 책으로 커피 관련 책을 선정했다고 가정해보면, 책에서 언급 된 고급원두, 책에 나온 카페로 이루어진 여행투어, 근처 카페와 콜라보한 커피 한 잔을 동시에 진열하고 판매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책이 아닌 책에 담긴 콘텐츠를 큐레이션 하면 보다 더 다양한 수익 모델을 만들수 있는 것이죠. 큐레이션의 관점을 보다 넓게 해석해서 제품을 편집하면 또 다른 비즈니스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입체적인 편집의 기획을 통해 한 권의 서점이 경험 설계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실력을 인정받는다면 결코 다른 서점이 넘볼 수 없는 '브랜드' 될 수 있습니다. 결국 큐레이션 2.0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유연한 편집 사고방식과 기획력입니다. 큐레이션이 브랜드가 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죠.


잡지는 꼭 잡지끼리 배치될 필요가 없다.



남성 전용 럭셔리 온라인 이커머스, MR.Porter.


미스터 포터는 2011년 시작한 영국의 남성 전문 온라인 샵입니다. 기존 온라인 샵이 다루는 중저가 제품에서 탈피하여 고가의 럭셔리 패션을 큐레이션하는 이커머스로 알려져 있죠. 라인업은 구찌, 발렌시아가, 톰포드의 하이엔드 패션부터, 폴로, 나이키 등 콘템포러리 중저가 라인까지 넓은 범주를 포괄합니다. 그럼에도 미스터 포터의 포지션은 럭셔리 온라인 샵 입니다.


미스터 포터가 럭셔리로 인식되는 큰 이유는 포터만의 차별화된 편집 능력입니다. "새로운 문물에 열려있는 클래식한 영국 신사" 포터가 주장하는 그들의 고객 이미지인데, 큐레이션 방향은 줄곧 그 이미지에 적합한 제품을 선별하는 쪽으로만 진행되죠. 포터 사이트에는 400 여개 이상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지만 선별되는 제품과 고객에게 보여지는 제품은 한정적입니다. 포터다움을 설명할 수 없는 제품은 후 순위로 밀리게 되죠.


폴로의 니트가 되었든 나이키의 스니커즈가 되었든 혹은 톰포드의 슈트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 제품이 미스터 포터가 제시한 신사의 이미지에 부합하는지 입니다. 톰포드라는 럭셔리 브랜드의 입점보다 톰보드의 어떤 제품을 큐레이션 하여 미스터 포터 다움을 채웠는가가 중요합니다. 제품과 브랜드를 파는 것이 아닌 스타일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죠. 자연스럽게 그 스타일 자체는 포터만의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것입니다.


미스터포터의 이미지에 맞는 브랜드를 셀렉하는 것이 포터만의 기획능력이다.


미스터 포터는 '포터 다운 스타일'을 설정하기 위해 자체 신문제작, 잡지, 룩북, 영화 등 고객과의 다양한 접점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 노력했습니다. 그중 영화 킹스맨에서의 연출은 그 이미지를 정확히 구현해낸 계기가 되었죠. 맵시 좋은 정장을 빼입은 콜린퍼스의 몽타주에서 진정한 미스터 포터를 발견할 수 있다는 묘한 메시지는 강력하게 고객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미스터 포터가 온라인 샵에 입점해 있는 다른 럭셔리 혹은 컨템퍼러리 브랜드보다 부각되는 이유는 나름의 맥락을 만들어 놓고 그에 맞는 제품을 큐레이션 했기 때문입니다. 종이 콘텐츠, 영화, 에디토리얼 등 고객과의 최대치의 접점에서 포터만이 다룰수 있는 이미지와 정보를 교류하면서 고객에게 나름의 프리미엄을 심어준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큐레이션이 브랜드가 된 베스트 케이스였습니다.


미스터포터는 신문, 잡지, 영화, 광고 등을 통해 포터만의 신사다움을 만들어냈다.



큐레이션, 브랜드가 되다.


특정 기업이 제품 큐레이션을 통해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선택된 제품과 브랜드가 아닌 큐레이션의 주체가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되려면 나름의 관점과 편집의 방향이 유니크한 역량으로 인식되어야 하겠죠.


미스터 포터가 나름의 관점과 스타일을 제시하려 했던 노력의 모두는 자신이 '브랜드'가 되어야만 결과적으로 고객이 나이키 스니커즈를 미스터 포터라는 사이트 안에서 구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소비자가 굳이 다른 곳에서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을 특정 사이트나 장소에서 구매한다고 결심한다면 분명 그 안에는 그만의 특별하고 유니크한 무언가가 묻어져 있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브랜드만의 정서적 효용이겠죠.


 브랜드가 된다는 말은 나름의 차별화된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큐레이션 자체가 하나의 의도를 지닐 수 있지만 그것 자체만으로 브랜드만의 관점과 메시지를 전달하기엔 역부족일 수 있습니다. 나름의 재해석과 재구축의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비로소 완전한 큐레이션 브랜드가 될 수 있습니다. 제품이 아닌 스타일을 큐레이션 하는 것. 책이 아닌 경험을 큐레이션 하는 것. 한 층위 더 깊은 부분을 짚는 큐레이션을 통해 업종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씬이 연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전 08화 뭉치지 않으면 브랜드는 죽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