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까지 포함하면 무려 4일을 쉴 수 있는 5월의 연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날에 서울의 어딜 가자니 바글바글한 인파에 치일 걱정이 덥석 들고, 그렇다고 근교로 나오려 해도 게으른 내 손가락에 기차표는 이미 문을 꾹 닫아걸었다. 맑은 오월의 긴 연휴를 집에서 보낼 수 없다는 비장함에 친구와 뚜벅이로 서울 산책을 하기로 했다.
친구가 가보고 싶었다던 광진교 8번 라운지를 첫 번째 목적지로 정했다. 라운지는 한강 다리 아래에 벌집처럼 달려있었고, 독서를 위한 공간 같았다. 깔끔한 시설, 조용한 음악, 통창에는 한강이 앞뒤로 뻗어 흐르고 있었다. 물가로 시선을 쭉 보내면 롯데타워까지 보이는 시원한 풍경이 펼쳐져서 우와 소리가 절로 나게 했다.
라운지에 놓인 책장을 쓱 훑어보았지만, 손 가는 게 없어서 근래 e북으로 읽고 있던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한 챕터 정도 읽고 라운지를 나섰다. 풍경 좋고 깨끗한 시설이라서 오래 머무를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일어나게 된 것은 그곳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운지가 다리 한가운데 있어서 화장실이 있을 법한 건물은 걸어서 제법 가야 했고 그나마 가까운 곳은 다리 위에 있는 간이 화장실이었다.
다리 위에 있는 화장실에 도착했을 때, 내부가 깨끗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며 문손잡이를 돌렸다. 예상과 달리 새로 지은 듯이 하얀색의 화장실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고 제법 크게 난 창문이 한강을 담고 있었다. 이곳을 담당하는 사람이 제시간이 되면 다리 한가운데까지 와서 화장실 곳곳을 살펴보며 청소하는 수고로움을 성실히 하고 있음이 표가 났다. 친구는 화장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동안 한강의 거센 바람을 맞아야 했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서 문어 다리 마냥 포닥거리고 있었다. 친구에게 ‘완전 호텔 화장실이야, 에어컨도 있어! 한강뷰 화장실!’이라며 놀이 기구를 타고 온 어린이처럼 방방 댔고, 친구는 대박이네! 라며 반응해 주며 화장실의 멋짐만큼 다리 위에 부는 바람도 장난 아니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강바람을 맞으며 두 마리의 문어가 되었다.
다리 위를 걸으면 한강공원에서 피크닉을 하는 사람들이 내려다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아주 작아 보였는데, 알록달록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작은 사람들이 큰 나무의 그림자에 기대어 돗자리를 펴낸 모습을 보니 어느 기념품 가게에서 팔고 있을 엽서 속 모습 같았다. 비록 다리 위는 바람이 거세지만, 오월의 날씨는 맑았고 한강 공원 잔디에는 아이들과 강아지가 있으며, 사이좋은 노부부까지 보였다. 만들어낸 듯한 평화가 발 아래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손톱보다 작아진 사람들 모두가 조금의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았다. 개인의 삶에서 고된 일과 뾰족한 생각들에 붙잡혀있다가 잠시 빠져나온 쉼인 걸 알지만, 그렇게 보였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주에서 온 두 마리의 문어 외계인이 지구를 바라보는 듯이 구경하던 나와 친구는 우리도 엽서 안으로 들어가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나마 계획했던 이후의 일정이 흐리멍덩해지고 ‘우리도, 우리도’라며 피크닉 대열에 끼고 싶은 마음을 동동 띄우며 돗자리를 대여했다. 치킨과 떡볶이까지 두 손 가득 잡아 들어서 제법 든든히 한강 피크닉 구성품을 갖췄다. 신난 마음으로 한강공원으로 성큼히 걸어가 햇빛과 그늘이 적당하고 한강과 나무들이 다 보이는 명소를 찾으러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쯤이 좋겠다고 생각한 곳에 자리 잡고 떡볶이와 치킨을 야금야금 먹는데, 세찬 바람이 심술 난 목소리로 ‘자리 치우소!’라며 물건들을 돗자리 밖으로 휙휙 내다 버렸다. 이날 바람이 얼마나 강했는지 세워둔 콜라 캔이 염력을 맞은 듯 스멀스멀 걸어 다니고 같이 서 있던 500L 생수병이 픽 쓰러졌다. 치킨을 먹어갈수록 담아낸 포장 상자가 가벼워지는 통에 바람에 손으로 붙잡고 먹어야 했다. 심보가 대단한 자리 주인에게 ‘그만 좀 해라. 이제 일어난다.’라며 짐을 정리하는 중에도 바람은 훅훅 불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발로 꾹 눌러 잡았던 쓰레기가 어느새 빠져나가서 휭하니 달리기 선수가 되어 실종되고, 손바닥보다 크던 떡볶이 컵이 순간이동을 하여 모습을 감췄다. 급히 운동화를 구겨 신고 콩콩 뛰어가 가져오려 했는데 바람 따라 어디까지 간 것인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떡볶이 컵이 날아가면서 후드득 떨어졌을 떡볶이 국물조차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태풍 같은 바람 속에 우왕좌왕 바삐 자리 정리를 할 때, 머리에서는 어느 날엔가 봤던 뉴스가 떠올랐다. 한강에서 놀고 쓰레기를 두고 가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을 지적하는 화면이었고 나도 혀를 찼더랬다. 그랬던 내가 한강 쓰레기 민폐의 주역이 될 줄 알았겠나. 누굴 향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으로 연거푸 미안함을 전하고, 바람에 펄럭이는 돗자리를 겨우 정리하여 자리를 이동했다.
한강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엽서 같다고 느꼈던 잔디밭으로 향했다. 이날 한강공원의 날씨가 드세서 물멍을 하고 싶어서 물가로 가면 거센 바람을 맞아야 했고, 그나마 바람을 막아주는 가로수 나무 뒤로 자리를 잡으면 한강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었지만 결국 한강뷰를 포기하기로 했다. 한강뷰를 포기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강가 근처로 자리를 잡았다가 바람에 푸닥거리며 다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보며 방금 전 우리의 모습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라운지에서 읽던 e북을 다시 읽는데 강바람을 맞고 있으니 제법 체력 소모가 커서 실내로 이동하기로 했다.
<인덱스 숍> 서점으로 들어갔다. 독립 서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넓은 공간 덕분에 책꽂이에 책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지 않고, 표지를 뽐낼 수 있도록 예쁘게 누워있었다. 넓은 책갈피같이 생긴 종이에 손 글씨로 적은 메모들이 책마다 끼워져있었다.
아침부터 움직여서 피곤하고 강바람에 체력도 탈탈 털려서 서점에 도착하면 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할 생각이었지만, 책을 보자 신이 나서 에너지가 벌떡였다. 예의상 주문한 아이스 음료를 테이블에 가져다 놓고 컵 표면에 방글방글 물방울이 가득 맺힐 때까지 궁둥이 한번 붙이지 않고 책 구경을 했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그냥 구경만 하는데도 책 한 권에도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책 표지를 구경하고, 서점 주인이 적어놓은 메모를 구경하고, 마음에 들면 속내를 열어보고 살까 말까 고민하고, 익숙한 책은 반가워하고, 관심 분야의 책이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으면 기쁜 마음이 들었다. 친구가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리에 오지 않는 나를 찾으러 책 사이로 들어왔다가 책 구경에 빠진 내 모습을 몰래 사진으로 찍었다며 보여줬는데 엽사*라고 불러도 될 만큼 우스운 표정이었다. 뒷짐 진 채로 목이 꺾여 배꼽 만치에 놓인 책을 내려다보면서 놀란 듯이 눈이 커지고 입은 꾹 다물고 웃고 있었다. 무슨 책을 이토록 격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인덱스 숍>에서 앉아 있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책을 한 권도 사지 않았다. 신나게 책방을 돌아다녔다면 응당 책 한 권 값은 지불하고 나와야 했던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엽기사진의 준말
독서를 텍스트힙이라고 부른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 요즘 1020 세대가 그만큼 읽기를 낯설어하는구나 하고 놀랐지만, 과연 나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독서하고 서점을 가는 하루로 연휴를 채웠음에도 책 한 권 사지 않은 행동에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발이 빠졌다. 책의 분위기만을 소비하여 ‘텍스트힙’ 한 하루를 보낸 건 아닐까.
책을 읽으면 읽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까지 생각을 하나 싶기도 해서 왜 이런 질문의 답을 찾고 있는지 생각을 해보니 십 년도 더 된 대학교 1학년생일 때 한 장면이 떠올랐다. 책 읽는 나를 보며 어떠한 척을 한다며 손가락질하던 동기가 있었다. 또 다른 동기는 내가 신성한 일을 하는 듯이 말도 못 걸고 조심스럽게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남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다독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 정도로 깊이 있는 책을 읽고 있던 것도 아닌데, 독서한다고 무슨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왜 나를 유난 떠는 사람으로 지목했을까.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일인 걸까. 뉴스나 다큐멘터리 등 영상으로 지식을 접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왜 독서는 영상보다 한 수 위의 행위인 것처럼 말하는 걸까.
그들이 보기에 내가 책 읽는 다른종의 인류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북 휴먼 카테고리를 붙이고 다닐 정도로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책보다 예능 보는 시간이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멋들어진 외국 작가 이름을 막히지 않고 쭉쭉 나열할 수 있다던가, 독서 모임을 가지며 폭넓은 독서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니.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인지도 검열하게 되는 책 사이에 껴서 썸타는 사람. 너 걔(책)랑 사귀냐고 놀리면 오래된 친구 사이일 뿐이라며 쿨하게 대답해야지. 소꿉친구였다가 나중에 썸타는 관계로 발전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니 그건 또 새로운 기대가 된다.
잘 모르지만 좋아합니다.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