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아이돌

by 이월

책을 자주 읽는 요즘, 나는 ‘읽는 사람’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는데 마땅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연휴와 책> 에피소드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했지만, 좋아함의 깊이를 또 나누자면 생각이 늘어지는 것이다. 의문이 생기면 만족할 만한 답을 찾아서 정리해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책이라는 분야에서 나의 위치를 어디로 집어넣어야 하는지 요리조리 재고 있다.


자주 가는 독립 서점의 사장님에게 '책 많이 읽으시죠?’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아이고, 그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손사래를 쳤었다. 중학교 동창 친구는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백 권이 훌쩍 넘는 독서량을 채우고, 대학교 동창 친구는 책을 망설임 없이 팍팍 구매한다. 나는 그렇게 다독가도 아니고 책을 살 때마다 수십 번을 고민하다가 안 사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독서인이라 당당히 말할 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독서인의 기준이 뭘까. 읽은 책의 권수가 평균치보다 많으면 독서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도 되는 걸까. 30대 성인 연간 종합 독서량은 3.9권이라고 한다. 그럼 나는 얼마나 읽을까. 6월부터 완독한 책을 표시해 보기로 했다. 읽은 책 표지 사진을 찍어서 소감과 함께 SNS에 올리는 분들이 많지만, 새로운 SNS 계정을 만들기 싫고 글을 쓰는 것도 부담이 되어서 그 방법은 포기하고 내가 재미있어 할 다른 방법을 찾았다. 5cm 정사각형의 작은 수채화용 노트에 읽은 책의 표지를 그려 넣고 완독한 날짜와 작가명을 적는 것이다.


평소에 아무 책이나 잡아서 읽는 터라, 작가의 이름과 글을 매치하지 않았다. 쓰는 이의 노고도, 출판사의 분주함도 모르는 채 이야기만 소비한 것이다. 작가의 이름을 적는 것, 몇 초면 끝나는 이 행동이 내가 읽은 글자 종이들의 주인을 찾게 되기를, 더불어 멋들어진 외국 작가의 이름 한둘 정도는 알게 돼서 지성인처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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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안 되었는데 벌써 5장이 채워졌다. 금방 읽을 수 있는 얇은 동화책 한 권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제법 되었다. 평균 독서량 3.9권. 이미 그 평균을 넘어갔다. 이 정도면 읽는 사람 타이틀을 달아도 되는 것 아닐까 싶겠지만, 6월에 갑자기 벌어진 이벤트일 수도 있으니 다음 달, 그다음 달은 0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을 많이 읽을 리 없어. 평균보다 많이 읽었더라도 이건 이번 달의 요행인 거야. 보이는 기록에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이것을 겪은 적이 있다.


HOT, GOD, 동방신기, 보아, 샤이니, 소녀시대. 누구든 한 번쯤 팬이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어떤 가수의 팬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빛나던 아이돌의 시대, 2000년대. 그 시기를 십 대로 보낸 나는 정말 놀랍게도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하나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30대가 돼서 입덕한* 가수가 생기고, 처음 만난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곤란했던 경험이 있다. 내가 좋아한 가수는 얼굴로 상위권을 차지하는 외모도 아니었고,** 평소 내가 좋아하는 보컬 스타일도 아니었으며, 그동안 생각한 ‘아이돌은 20대’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30대의 가수였다. 그렇기에 내가 왜 이 사람의 영상을 계속 보고 있는지, 왜 마음이 기쁜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영상 재생 시간, 관련 검색어가 모두 한 아이돌의 팬임을 증명하는 듯이 또렷했지만, 이 정도는 팬이 아니라 그냥 재미있는 영상을 보는 것뿐이라는는 생각을 했던 때가 생각났다.


*입덕: 어떤 분야나 사람을 열성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함

**지금은 차은우보다 더 좋아합니다.


팬까지는 아닙니다 라는 포지션을 유지하던 때.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상태로 내 하루의 시간을 뺏어가는 가수를 보면서 생긴 의문투성이의 마음이 ‘팬이 되었습니다’로 정리되기까지 생각을 제법 해야 했다. 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데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시기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5 서울국제도서전>을 다녀왔다. 그곳에서는 읽는 사람들이 다들 책 앞에서 서서 좋아하는 작가 이야기를 하고, 요즘 어떤 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게 되는 게 이 책을 읽어서라면서 친구에게 보여주고, 말간 웃음꽃을 피운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덩그러니 있는 듯했다. 이 책을 쓴 작가가 그동안 어떤 책을 냈는지도 모르고, 해당 출판사의 특징이 뭔지도 모르며 유명 작가 이름을 막히지 않고 나열할 수 있는 지식도 없다. 관심 있는 가수가 그동안 어떤 노래를 발매했는지, 작사에 참여한 것인지, 가수의 사진만 봐도 몇 년도 사진이며 어떤 활동을 했을 당시 찍힌 사진인지를 알아채는 능력이 없는 뉴비처럼.*


*뉴비: 새내기.


이렇게 비교하고 보니 나는 책의 팬이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아이돌 팬의 경우에는 이 과정 다음으로는 콘서트 선예매를 위한 팬클럽 가입을 하며, 콘서트 티켓팅에 성공했다면 응원 봉을 마련하는 순서로 흘러간다. 그렇게 콘서트를 보러 가면 자연스럽게 오프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고, 같은 가수의 팬들을 직접 만나 교류하는 날이 된다. 이날,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친절과 다정함을 느낄 수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진다.


*오프라인 활동. 인터넷상으로의 교류 외에 실제로 사람을 만나는 일.


처음 보는 사람이 건넨 간식, 물품보관소 거리가 멀어 곤란한 뚜벅이 팬에게 자신의 차 트렁크를 내어주는 친절. 콘서트 입장하려면 몇 시간이 남았는데 주인도 모르게 켜져 있는 응원 봉을 보고, 건전지가 닳아버릴까 봐 걱정되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알려주는 동료애 같은 것들을 마주친다.


책이라는 아이돌에 입덕한 나의 첫 오프활동은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는 것이었다. 인파가 많아서 부딪힐 때면 서로에게 미안하다 사과하며 물의 흐름처럼 다툼없이 지나가려던 사람들, 아동도서 출판사 부스에서 아이들이 알록달록 동화책을 어정쩡하게 보고 있자 편하게 앉아서 보라며 다정한 자리를 내어주는 직원. 정신없이 바쁜 계산원에게 천천히 해도 괜찮다며 다정한 목소리를 건네는 손님 그리고 전시장을 가득 채운 종이 냄새.


작년 뉴스에서는 <서울국제도서전>에 많은 인파가 몰려서 엄청났다고 보도했으며, 다녀온 친구는 사고가 안 나고 무사히 끝난 게 신기할 정도로 위험했다고 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책을 가끔 보는 인간이었던 나는 그랬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특정 가수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멜론 차트에 곡이 있어서 가끔 노래를 듣기는 했던, 그런 정도의 거리감으로 작년 <서울국제도서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고가 안 난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유의 마찰 없이 유하게 지나가고 싶어 하는 특성 덕일 것 같다.


책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사면 직접 들고 오는 수고로움도 없을 텐데 왜 다들 행사에 가는 걸까. 텍스트힙이 유행이라서 그런가 했다. 도서전, 그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포근한 이불과 같은 마음과 오랜만에 만난 각기 다른 출판사 직원들의 동료애, 좋아하는 것이 가득해서 행복한 사람들의 설레는 발걸음을 몰랐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 좋아하는가. 그것은 책에 대한 소비나 독서량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입덕을 해버린 반증이었다.


아이돌 덕질 평균 수명은 1년 반에서 2년 정도라고 한다. 책의 입덕 평균 수명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즉, 내가 얼마나 책을 오랫동안 가까이 둘지 모르겠다. 솔직히 요즘도 일 때문에 바쁜데 책을 읽고 있을 때마다 ‘이럴 때가 아닌데’하고 마음이 콕콕 찔려온다. 할일이 많아서 책이랑 멀어져야 하는데, 왜 도서관에 다녀와서는 대출 반납 일자까지 다 읽어야 하는 미션을 만들었는가. 왜 도서전에서 책을 산 것을 친구에게 자랑해서 먼저 읽고 빌려주겠다는 말을 해버려서 마음이 조급해졌는가.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는 것에 문제가 생겼는데 베실베실 웃고 있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제정신은 아닌 듯하고, 이건 오타쿠의 웃음이 틀림없다. 아, 망했다. 체념하고 속독의 기술을 익힐 궁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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