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팬 [上]

by 이월


"이,이건! 육성호씨의..머리카락 인가요?"


탈색된 녹색 머리카락이 김유나의 손가락 끝에 매달려있었다.


"이게 보였어요?"


"느낌이 이상해서 다시 봤더니 이게 보였어요.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미주의 한이 있었나 봐요."


김유나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동식 오빠, 최근에 냉장고 안 열어봤다고 하셨죠?"


"네? 아. 네. 그랬죠."


"분명 오빠 집 냉장고에도 있을지 몰라요! 같이 가봐요."


'우리 집 냉장고에도 시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도 되는 걸까? 우리 집에 있는 시체는 누가 가져다 둔 게 아니라 갑자기 생겨난 건데.’


육성호가 소미주를 죽인 살인범일지는 몰라도 자기 집에 직접 가져다 두지는 않았다는 것을 동식만이 알고 있었다.


"우리 오빠 이제 잘 풀리려고 하는데. 나쁜 놈."


혼잣말인 듯 내뱉은 김유나의 말이 동식의 억울함과 불안함을 알아주는 듯해서인지 동식의 코끝이 시려왔다. 김유나는 육성호의 머리카락을 다시 봉지 안에 조심히 넣어놨다.


'그래. 증거가 나왔잖아. 육성호가 범인인 거야.'


고민하던 동식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김유나를 따라나섰다. 동식이 문을 열어주자 척척 걸어 들어가던 김유나는 동식의 냉장고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오빠는 보지 말고계세요. 제가 열어볼게요."


"아니, 제가 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아까도 그렇게 힘들어했잖아요."


"아니에요! 한번 봤으니 괜찮아요! 오빠 멘탈에 타격 와서 앞으로 활동하는데 트라우마 생기면 어떡해요. 다른 곳 보고 계세요. 냉장고 보기만 해 봐요, 나 진짜 화내요!"


자신보다 훨씬 작은 김유나의 단호함이 동식에게는 무섭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말대로 안 하면 끝없는 실랑이를 벌일 것 같아서 한발 물러났다. 김유나는 기어코 동식의 몸을 돌린 후 강한 콧김으로 숨을 한번 내뱉고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와 냉동실 두 칸 모두 일회용 통과 검정 비닐들이 버려진 쓰레기처럼 끼어있었다.


"오빠. 여기 보진 말고 대답만 해주세요. 혹시 배달 음식 자주 드세요? 비닐봉지들 원래 있던 거예요?"

"아뇨, 없던 거예요."


동식은 김유나가 비닐봉지를 꺼내서 시체 조각을 확인하기 전에 재빨리 김유나의 허리를 잡아 들어서 냉장고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오빠!"


"괜찮아요. 유나 씨에게 여기까지 양보했으니깐 이제 내가 확인해 볼게요."


동식이 웃어 보이자, 김유나는 주도권을 뺏긴 듯 물러났다. 냉장고 안은 어제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식은 처음 본다는 듯이 하나씩 밖으로 꺼내놓았다. 부엌 테이블에 까만 비닐봉지들과 일회용 통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이것도.”


동식의 엄마도 친구들도 준 게 아니라던 밑반찬이 담겨 있던 반찬통도 함께 꺼냈다. 냉장고 안은 생수 등 몇 가지 식품을 제외하면 텅 빈 것과 다름없어 깔끔해졌고. 가려져 있던 냉장고 내부의 조명도 밝은 빛을 되찾았다. 김유나는 꺼내진 반찬통을 향해 다급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반찬통은 제 거예요. 세트로 샀던 거랑 똑같이 생겼어요.”


“유나 씨네 집에 있던 거랑 똑같은 일회용 통도 있네요.”


동식은 까만 통에 흰색 뚜껑으로 된 일회용 반찬통을 열고 그 안에 검정비닐 봉지 매듭을 풀어서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김유나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조금만 열어서 일그러진 피부 덩어리를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동식의 표정을 본 김유나는 통 안을 직접 보지 않아도 그 안에 친구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김유나는 결심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옮겨요."


"네? 이걸 어디로요."


"우리 집 냉장고에요. 아니다. 세탁실에 김치냉장고 있어요. 거기 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그럼 안되죠. 신고해야죠!"


토막 시체들 안에서 또다시 육성호의 흔적이 남아있으리라 믿음을 가진 동식은 이제 그만 신고하고 끝내고 싶었다.


"신고할 거예요. 하지만 오빠는 상관없는 일인 거예요. 알겠죠?"


"아…."


김유나는 동식의 정면에 서서 그의 양팔을 붙잡고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성호 오빠, 아니 그놈이 헤어진 보복으로 우리 집에 제 친구 시체를 넣어놨다. 그게 다인 거예요."


"그래도 될까요? 우리 집에서도 시체가 나왔는데…."


"사실, 오빠랑은 정말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동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의 증거가 나왔고, 자신은 관련 없다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겼다. 짧고 길었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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