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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얀 Apr 06. 2024

기꺼운 광인(狂人)의 삶

PART II. Identity 에서 Mission 까지

출판을 통해 돈 버는 데 목적이 없다. 마니피캇 출판사는 ‘나만의 사유의 공방’이란 정의를 두고 설립한 출판사다. 작가가 독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광대가 된다. 출판사들은 어떻게 하면 '잘 팔리는 책'을 낼 수 있을까만을 고민한다. 그런 게 싫었다. 지금 내 서재에 꽂힌 책들 중에는 독자의 눈치를 보거나 잘 팔리도록 기획된 책은 한권도 없다.

 

책은 ebook이 아닌 종이책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ebook의 필요성도 충분히 존중은 한다. 그래서 내 책도 ebook으로도 동시 출간했지만 역시 책은 넘겨보는 맛이 있어야 하고, 언제든 줄 치고 메모하며 그때 그때 생각을 남겨둬야 한다.


나에게 책은 머리맡이나 화장실에서나 대중교통 속에서나 사우나에서나 어디에서나 쉽게 펴볼 수 있어야 했다. 때문에 휴대가 불편한 두껍고 큰 판형의 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유발 하라리’의 책은 챕터별로 잘라서 따로 붙여 갖고 다닌 적도 있다. 책은 머릿속에 들어와 필터링을 거쳐 마음에 남겨지는 것이다. 한 손에 책을 구겨 접어 보는 건 기본이고 번뜩이는 문장들은 줄 치고 순간의 날 것 그대로의 통찰은 바로 휘갈겨 메모한다. 책이 좋을수록 흔적은 격렬하다.


첫번째 책과 두번째 책은 이런 나의 취향을 십분 반영했다. 주머니에 편하게 넣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게 하려는 취지에서 소책자 형태의 판형을 채택했다. 흔한 띠지나 추천사도 없다. 거추장스럽다 여겨지는건 다 떼어냈다. 책 뒷 표지에 ISBN 마저 없앴다가 교보 문고에서 뒷 표지에 ISBN이 없으면 아예 취급을 안한다 해서 부랴부랴 라벨지를 다시 붙여 재입고 시킨 웃픈 에피소드도 있었다.


책을 두권 직접 내보니 1쇄, 1천부 찍는데 이것 저것 다 포함해서 대략 300만원 정도의 원가가 소요됐다. 서점에서 떼어가는 40% ~ 50% 금액을 감안하면 1만 5천원 정가 기준 350부 정도 팔려야 원가를 뽑는 셈이다. 첫번째 책 <백년병원>은 호기롭게 배본사도 없이 1만원에 냈다가 서점에서 그렇게나 많이 떼어가는 줄 모르고 팔면 팔수록 손해를 봤다.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두번째 책 <태초의 의사들>은 첫번째 책 2배의 원고를 쓰고 배본사를 잘 찾아 계약하고 나름 적당한 가격이라 생각하며 1만 5천원에 냈다. 하지만 서점 MD들에게 책이 작은데 이렇게 비싸면 안 팔린다는 힐난을 가는 곳마다 들었다. 다행히 뭔가 배우러 다닐 때는 자존심을 두고 다니는 편이라 멘탈은 괜챦았지만 왜 잘 팔리지도 않는 역사책을 내냐는 은근한 핀잔까지 들을 땐 서점도 ‘잘 팔리는’, ‘돈이 되는 것’에만 꽂혀 있구나 싶어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3개월만에 2권의 책을 내고 이런 저런 시행 착오를 거치며 출판 시장의 매커니즘을 빠르게 파악했다. 연봉 1천 6백만원에 사회 생활을 시작해 16년 동안 직장을 12번이나 바꾸고 직종도 자유롭게 넘나 들어가며 마침내 2억 8천만원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다. 흙에서 태어나 스스로 등록금을 벌어 내던 흙 먹고 자라던 아이가 “Why not?” 정신으로 일구어낸 나름 놀라운 성취다.


연봉 많이 받으면 좋을 것 같지만 스타트업 세계에서는 돈 만큼이나 해고에 관한 리스크가 크다. 짧은 기간에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즉결 처형’ 당한다. 프로야구로 따지면 시즌 내내 홈런도 치고, 수비에서도 날아다니면서 본인을 증명 해야하는 서글픈 용병인 셈이다. 뿐만 아니다. 엄청 많이 받으면 엄청 많이 떼인다. 나라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이다. 왜 의사들이 Net 기준으로 본인들의 처우 협상을 하는 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net profit : 당기순이익을 의미하는 회계용어다. 이것 저것 다 떼고 난 순익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의사 들은 처우 협상할 때 net 기준으로 월에 실제로 얼마를 받는가를 기준으로 협상한다. 세금은 아예 병원에서 내주는 개념이며 본인들의 연봉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관행이다.


회사 생활을 한번 시작하면 열심히는 했지만 재미있게 한 적은 없었다. 늘 내 배역에 충실했다. 그 배역에 너무 충실해서 상처 받은 친구들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 점을 대표들은 좋아했다. 개성 강한 악역은 주연을 돋보이게 해주는 법이다.


난 장르를 가리지 않는 베테랑 악역 전문 연기자였다. 무대 가장 끝 뒷자리, 연출석에 앉아 무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요소들을 조화롭게 다뤘던 경험은 모든 일에 항상 ‘Bird eye’적으로 조망하는 감각을 훈련시켜줬고, 회심의 체험과 수도원에서의 수련 생활은 사람을 깊이 있게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일깨워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의 경험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임원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늘 칼에 피를 묻혀야 하는 배역을 연기하다 보니 늘 내 영혼이 갈려 들어갔다. 퇴근 시간이면 운전석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때까지 쓰고 있던 가면과 빌런 의상을 벗어두고 ‘온전한 나’로 돌아왔다.


내 소비 패턴은 연봉에 맞춰져 있었다. 어느 순간엔 연봉이 족쇄가 되어 나를 옥죄어 왔다. 언제 부턴가 내가 삶을 누리는 게 아니라 돈이 내 삶을 누렸다. 월급 링겔만 계속 고용량으로 바꾸었을 뿐 난 내 ‘이름’으로 살지 못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과 직업 윤리는 있던 터라 내 기준에 불의하다 싶은 일에는 세번까지 참다가 상소했다. 원래 상소는 목을 걸고 올리는 것이고, 결과가 바뀌길 크게 기대하지 않는 법이다. 상소는 임금을 고발하고, 임금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행위다. 설령 결과가 바뀐다 한들 임금은 한번 들이댄 신하를 곁에 두지 않는다.


마지막 회사 생활을 정리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무슨 책이야’ 라면서 접어뒀던 (하지만 늘 꿈꿔왔던) Mission을 끄집어 냈다. 오래 숙성시킨 묵은지 이제 꺼낼 때가 됐다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정돈한 내 본연의 Identity를 취합하고, 지역민들에게 추앙 받는 백년병원의 Mission을 세운 뒤 지난 3개월 동안 낮밤 없던 발자크처럼 기꺼운 광인(狂人)의 삶을 살았다. ‘why not’ 정신으로 사업자를 내고 출판사를 차리고 책 2권을 쓰고 내고 여기 저기에 광인의 선포를 했다. 살아온 나름의 날들을 통틀어 요즘처럼 살맛 나는 날들이 없었다. 예전처럼 시간에 끌려가는 삶이 아닌 내 시간의 주인이 된 삶이었다.

마침내 온전한 나로 숨을 쉬고, 온전한 내 이름으로 살고, 온전한 나의 삶이 시작됐다. 하루 하루 주말과 공휴일만을 기다리던 크로노스의 죽은 시간 속에서 마침내 충만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건너간 것이다.


당연히 온 우주가 나서서 반대했다. 어머님은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 한다는 협박의 장톡을 날렸고, 가까운 지인들은 진지하게 괜챦은지 안부를 물었고, 먼 지인들은 상투적으로 격려했다. 마음의 벗들은 진심으로 축복해줬을 뿐만 아니라 손수 의사들과 미팅을 잡아주기까지 했다.


원래 이 책은 <백년병원> 1챕터, Hospital Identity의 심화 버전으로 <Nism>이라는 제목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전문 서적으로 구상했다. 브랜딩 시장이 워낙 망가져 있다보니, Identity build-up 과정을 로고, 심볼 만들기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책 한권 정도로 깊이있게 바로잡아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Identity와 Mission이라는 주제를 다루면 인간 본성의 깊은 요소들을 두루 건드릴 수 밖에 없어 마침 서점에 만연해 있는 ‘자기계발 지옥’을 혁파하기에도 알맞았다.


브랜드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Identity라는 철학적으로 깊게 숙고해줘야 하는 개념을 훌쩍 건너 띄어 버리는 걸 볼 때마다 갑갑했다. 가장 중요한 단계를 스킵해버리고 네이밍 아이데이션 한번 보여주고 컨셉과 더불어 최종 결과물 보여주는 쪽에 집중하다보니 Brand Identity 구축 작업이 그냥 네이밍, 로고, 심볼 만들어주는 디자인 작업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브랜딩 시장은 크몽이나 라우드소싱, 또는 ai 서비스를 이용해 적게는 5만원에서 많게는 50만원 안에서 쉽게 해결해버리는 골목 시장이 되어 버렸다. 한번 떠올려보라 ‘제일기획’처럼 랜드마킹으로 지정할 수 있는 특별한 브랜딩 기업이 떠오르는가? 브랜딩 한다는 회사들은 폼 잡다가 이미 예전에 다 굶어 죽었고 그나마 시대 변화 추세에 맞춰 디지털 장르를 결합해 광고 회사로 변신한 회사들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브랜딩은 한 기업의 (또는 한 개인의) 경영 철학이 내재된 최상위 개념이자 경영 전략의 철학적 뿌리다. 그 하위 요소에 제품 개발, 디자인, 마케팅 등이 두루 자리한다. 잡스나 머스크 같이 각자의 Personal Identity와 Mission을 명쾌하게 구축한 이들이 주로 브랜딩 경영을 했다. 실리콘 밸리를 표준으로 보고 자란 최근의 MZ 경영자들은 대부분 브랜딩 경영을 한다. 브랜딩 전략을 다루려면 기본적으로 Corporate Identity에 맞게 경영 기술과 경영 전략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Brand Identity에 맞게 추진 전략을 짜고 액션 블록을 기획할 줄 알아야 한다. 흔히 말하는 CI나 BI는 이와 같은 경영 전략의 텍스트를 시각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어떤 브랜드 책에서도 다루지 않은 내용이라 혹자는 경기 일으킬지도 모르겠지만 진정하라. 마케팅이나 브랜드의 학문적 뿌리는 대단히 얕다. 특히 이 분야는 '수학의 정석' 같은 정답이 존재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후속 챕터를 풀어나가면서 당신이 브랜드에 대해 갖고 있는 착각과 환상을 하나씩 깨주겠다.


Identity 구축 과정은 휘뚜루마뚜루 쉽게 건너 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 Identity 때문에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가출해서 율도국을 세웠고 미소년으로 예쁘게 자라던 헤라클레스는 갖은 고생을 겪으며 12개의 과업을 완수했으며 왕족으로 잘 살고 있던 모세는 동족을 위한 살인까지 저지르며 온 민족을 끌고 나와 40년동안 광야에서 헤매이며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먹다 죽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신화나 역사 속 이야기들이라 다소 멀게 느껴지는가? 그럼 나에게로 돌아와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왜 어린 시절에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면 사실일리 없다면서 세상이 떠나가듯이 울어 댔을까? 너무 모질게 혼이 난 날엔 어쩌면 엄마나 아빠가 실제 엄마나 아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진지한 나의 Identity에 대한 음모론을 일기장에 적어가며 혼자 심각해 했을까? 학교에서 처음 혈액형을 검사하던 날, 부모님의 혈액형과 나의 혈액형의 연관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Identity를 분석하곤 했을까? 수많은 위인 전기들을 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 삶 안에서 스스로의 Identity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왔고, Identity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끝에 그에게 주어진 삶의 Mission을 발견하고, 마침내 삶의 Mission을 완수하고는 밝게 빛나며 그들만의 ‘Human Brand’를 만들고 소멸해 갔다. 


신으로부터 Mission을 부여 받은 성인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과연 그들이 처음부터 천사 같이 태어나 거룩하게 살아왔던 것 같나? 쓰레기 같이 살다가 성인으로 변모한 회심의 성인들 중 가장 대표적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온갖 이단은 두루 섭렵해가며 그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의 속을 자글 자글하게 썪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여성 편력에 색(色)을 얼마나 밝혔던지 후에 하느님의 강렬한 영적 체험마저 색(色)을 넣어 묘사한 찬미시를 써 바쳤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 성 아우구스티노 -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우심이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함께 아니 있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 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고백록 제 10권 제 27장)





지금 내가

당신 앞에

커피를 내리며 앉아있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당황하며

명함을 꺼내려는

당신의 손을 만류하고,

두번째 커핏 물을 내리며

다시 한번 묻는다.


“전, 당신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

 당신은 누구신가요? "


.

.

.

.

.

.

.

.


번민 135ml에 Identity를 오랫동안 끓여내다보면

잘 우려낸 Mission을 추출해낼 수 있다.


먼저 나를 제대로 알아야 계발이라도 할 수 있다.

Identity 토대 없이 목적만 추구하는 삶을 살다보면
언젠간 한없이 공허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빈 껍데기로 목적만 추구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Identity 없는 Mission

난 이것을 육(肉)의 미션이라고 정의 한다.


철학 없는 교육

철학 없는 정치

철학 없는 경영

철학 없는 언론

철학 없는 외교

철학 없는 공부

철학 없는 부(富)

철학 없는 사랑

철학 없는 관계

철학 없는 만남


이렇게 육(肉)의 미션이 넘쳐나면

세상엔 '공허와 허무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 본 원고는 세번째 출간 예정작인 <Mission, 카이로스의 시간>의 초고입니다. <Mission, 카이로스의 시간><백년병원> 챕터 1의 심화 버전으로 기획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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