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들을 보며
(2022 아르코창작기금선정작)
여러 예술 장르 중 그림과 시는 유독 가깝게 느껴진다. 시는 그림이라고 했던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던 당나라 시인 소식(蘇軾)의 혜안을 모르더라도 그림과 시는 그 근원이 닮았음을 누구나 쉽게 이해한다. 하여 나는 그림을 자주 본다. 그림을 잘 볼 줄 알아서가 아니라, 그림은 희한하게 아무 말 없이도 내 마음을 되비쳐 주기 때문이다. 온갖 표현을 끌어와도 설명할 수 없던 마음을 하나의 이미지가 정확히 말해 줄 때가 있다. 이 순간 내가 사로잡힌 그림이 무엇인지 가만히 따져 보면 가장 깊은 곳의 내가 보인다. 나조차 알지 못했던 나를 만날 때가 있다.
삶과 운명에 무릎이 절로 꺾이던 때에 나는 프리다 칼로와 여러 해를 함께했다. 프리다 칼로 그녀의 철심이 나를 관통했을 때, 내가 얼마나 큰 열정과 불안을 동시에 앓고 있는지 그녀의 그림은 분명히 알게 해 주었다. 내 어둠을 그녀의 더 무거운 삶과 그림으로 덮지 않았다면 나는 더 긴 밤을 아프게 지내야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빈센트 반 고흐와 베르트 모리조, 에드워드 호퍼로 이어지던 유난한 내 관심을 따라가 보면 시절마다 매달려 있던 나의 아픈 마음들이 무엇인지가 보인다. 그림은 내게 다른 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삶의 온갖 경험과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가르쳐 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은 문학과 함께 나의 도피처이자 안내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림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냈던 사람들, 다양한 형식과 개성으로 남겨진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내 눈길을 가장 오래 붙잡는 것은 자화상들이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했던 나르시스의 자기애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지 알고 싶은 절절한 물음에서 시작되는 그림이 바로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니 나를 그린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늘 보는 거울이지만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를 응시하는 팽팽한 눈빛을 정직하게 견뎌야 할 테니, 자화상은 화가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기만의 언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에곤 실레의 괴팍한 모습이나, 상식을 깨는 달리의 자화상, 자신의 그림 속에서 마침내 별이 된 고흐의 자화상이 사진처럼 정확하지 않아도 우리는 화가의 자의식과 자기 고백이 얼마나 깊이 투영되어 있는지를 금방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해에는 여성 화가들의 자화상만을 모아서 보고 또 보곤 했다. 거창하게 페미니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 예술가로 살다 간 그녀들의 삶이 그림 속에 남아 나를 위로해서였다. 시대와 환경과 운명이 달랐어도 그 다름 속에서 여성과 예술가라는 조건의 삶을 살아 내는 모습은 무척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닮음을 발견하는 일은 용기와 힘이 되었다.
미술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벗은 몸과 임신한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긴 파울라 베커의 그림들은 부드러운 선에도 불구하고 서늘하고 강렬했다. 불룩한 배를 가리지 않고 두 손으로 가만히 감싸 안은 채 젖가슴까지 다 드러낸 자화상은 불편한 시선을 용납하지 않을 만큼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여성이 스스로 누드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바라는 관능의 모습을 지우고 임신한 몸을 그림으로써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겨우 서른한 해를 뜨겁게 살다 간 한 여성의 삶이 그림으로만 남아 내게 많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가없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욕망이 사그라지는 느낌은 누구의 위안과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런가 하면 얼굴에 그늘이 짙게 내려앉은 무표정의 나혜석과 푸른 방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있는 중년의 살찐 수잔 발라동까지. 사적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경험까지도 기꺼이 공유하고자 하는 그녀들과 긴 시간을 나누다 보니 친구 같은 느낌도 들었다. 수십 명의 자화상들은 모두 다른 시대, 다른 인종,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자신을 내보이는 단호함과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을 이러한 방식과 모습으로 보여 주기로 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자신을 어떻게 상상해 왔는가. 자화상을 마주하면 이런 질문들이 저절로 떠올랐고, 다정함으로 바라보면 그녀들의 어떤 대답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이 어쩌면 사랑받기보다 이해받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존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면서도 거울 앞에서 고개 돌리지 않았던 화가들의 치열함과 솔직함. 사람의 생에 촘촘하게 박힌 슬픔이나 결핍 같은 것이 드러난 자화상들. 그것들을 마주하면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와서 다시 아프게 살고 싶어진다. 결국 자화상을 통해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은 내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불안한 나, 사랑하는 나, 세속적인 나, 나약한 나, 꿈꾸는 나, 실패하고 좌절한 나, 슬픔의 나와 모호한 나…
자화상에 대한 각별함이 이러하니 자화상만을 모아 놓은 나의 파일이 자꾸 그 두께를 키우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자화상들이 쌓여 가는 만큼 나는 누구의 인생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게 고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 간다. 혹시 아는가. 언젠가는 나도 거울 앞에서 내 자화상을 그리고 있을지. 사십 년 전, 이십 년 전, 오 년 전,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나를 다 담은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릴 수 있을까. 부디 생의 난폭한 열정과 여러 가지 모순까지도 받아들인 자화상이 되면 좋겠다. 백여 장의 자화상을 그렸던 렘브란트의 마지막 자화상처럼, 끝내는 울음보다는 허탈한 웃음이라도 엷은 미소가 그려지길 언제나 바란다. 삶이 무감각한 회색빛일 때, 슬프지만 울고 싶지는 않을 때, 나는 자화상들을 본다. (이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