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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진 Apr 07. 2023

새에게 잘못한 일


    한파가 이어지던 날, 베란다 바깥에 묶여 있는 에어컨 실외기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부리로 톡톡 실외기를 쪼는 작은 소리가 들려서 멀찍이 떨어진 채 거실에서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그날따라 햇볕이 오래 나온 덕에 실외기에 쌓였던 눈이 녹아 물이 조금 고여 있었고, 작은 새는 마침 그것을 먹고 있었다. 목이 몹시 말랐던지 한참을 쪼아 먹었다. 아침 이슬도 얼어붙는 한겨울 속이니 물을 구할 데가 없었을 것이다. 물이 고일만한 곳은 다 얼었을 테고 놀이터 웅덩이의 얼음도 작은 부리로 깰 수 없을 만큼 단단했을 거니까. 용케 물을 찾았구나 싶어서 기특하기도 하고 다행스런 마음이 들었다. 얼마 지나자 갈증이 좀 진정 되었던지 포르르 가볍게 날아가는 모습이 짠하게 이뻤다.


    새가 날아간 뒤 나는 쪼르르 베란다로 달려가서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았다. 그대로인 듯싶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새가 다시 올까 싶어 물을 조금 가져다 부어놓았다. 빨래를 널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내 눈은 베란다에 꽂혀 있었다. 왜 안 오지, 또 와서 먹으면 좋을 텐데, 자꾸자꾸 와도 되는데 … 마치 애인을 기다리듯 새를 기다리는데, 오후의 볕이 기울 무렵 반가운 기척이 들렸다. 역시 작은 새 한 마리가 아까 그 자리에서 또 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싶은데 카메라 소리에 놀랄까봐 없는 척 보고만 있었다. 잠시 뒤, 새는 다시 허공으로 날아가고 나는 또 베란다로 달려가 보았다. 실외기에 쌓인 먼지와 낙엽 부스러기가 섞인 물이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는 깊이가 얕은 종이컵에 물을 담아서 갖다 놓았다. 새가 깨끗하고 맑은 물을 마음껏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즐거웠다. 그러나 그 뒤로 새는 오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물을 갈아 놓았지만 일주일 뒤에도 열흘 뒤에도 다시는 오지 않았다. 뭔가 버림받은 듯한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혼자만의 작은 기다림이 이유 없는 섭섭함으로 바뀌었다가 그 마저도 사라지고 난 뒤, 우연히 실외기를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적당한 거리인 게 누군가에게는 위협적인 거리가 되는 것처럼, 새를 향한 나의 조그만 관심이 새에게는 무서운 시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저 물을 마음껏 먹길 바랐는데 그건 나의 욕심일 뿐이고 자연은 그렇게 작은 손길에도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새에게 갑자기 생긴 종이컵은 위험하게 느껴졌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새에게 나는 쥐구멍을 지키는 고양이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알아차리는데도 며칠이 걸렸다.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시선은 이처럼 일방적이고 이기적일 때가 많은 것이다. 기나긴 시간 동안 알아챌 수 없는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오직 딱 한 번 등장한 종(種)은 인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그뿐인가. 우리가 더는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나비 한 마리가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인간이라는 피의 무게를 벗고 자연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에게 잘못을 하고서야 인간이 만든 도시의 소음 때문에 새들의 지저귐이 달라지고 있다는 어느 과학자의 경고가 새삼스레 중요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새는 나에게 예언하는 듯한 날갯짓으로 신호를 보냈겠구나 하는 뒤늦은 생각도 들었다. 다만 어리석은 내 눈과 마음이 알지 못했을 뿐.


    그 후 여러 날,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에 오지 않는 작은 새 대신 클로드 모네의 ‘까치’를 보며 지냈다. 모네가 그린 그 풍경은 오로지 까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했다. 햇살이 내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따라가면 그 햇살을 오롯이 혼자 받고 있는 까치 한 마리가 있다. 그것이 이 그림의 전부지만, 큰 눈이 내린 조용한 마을 풍경 속에 평화롭게 앉아 있는 까치를 떠올리는 일은 내가 새에게 보내는 작은 기도와 같았다. 아무도 눈길을 보내지 않는 곳에서 햇살을 받으며 깃털을 말리고 폭폭하게 쌓인 눈을 먹으며 목을 축이기를. 흰 눈을 밟은 새의 작은 발자국이 첫 발자국이 되고 그 위에 또 흰 눈이 덮여 발자국이 지워지는 곳에서 두려움 없이 긴 겨울을 지냈으면 하고 바랐다.


    모네가 까치를 위해 만들어준 평화로움을 보다보니 문득 이 도시에 사는 일이 폭설 속에 갇힌 것보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우리도 타인의 시선과 욕망을 견제하며 물을 구하고 먹이를 찾고 잠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새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굴절시키지 않고 사는 날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그러다 베란다에 찾아 온 새에게 불쑥 내밀어진 종이컵처럼 어쩌면 내게 베풀어진 호의였을 텐데도 나는 또 그것을 무슨 덫이나 함정처럼 얼마나 많이 오해했을까 궁금해졌다.


    모든 것이 빠르고 무심하게 스쳐가는 일상에서 우연히 날아 온 새 한 마리가 한참을 내 머릿속에서 살다가 결국 글 속에 둥지를 지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을 받아들여 자신의 괄호 속에 넣는 일처럼 내게는 사소하지만 각별한 시선을 만들어주는 사건이 되었다. 그 새 한 마리로부터 시작된 생각들로 나의 찬웃음을 조금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멍든 꽃잎과 죽은 곤충들을 덮었던 눈이 녹고 머잖아 봄꽃이 가득한 나무 밑을 지날 때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일 것 같다. 물론 아무리 쳐다보고 들여다보아도 내가 찾는 그 새를 결코 알아볼 수 없을 테지만, 앞으로는 내내 비바람을 무사히 잘 넘기고 짐승과 자동차의 사나운 운명을 만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떠돌이 뭉게구름이 흐르고 햇살이 딱 적당한 각도로 비춰주듯, 새에게도 나에게도 평범해서 다행한 날들만 많았으면 한다.  (이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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