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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진 Apr 07. 2023

울어라, 기타여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다는 건 충직한 애인이 없는 것처럼 좀 슬픈 일이다. 내 경우가 그렇다. 음악적 감각이 무딘 탓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울 때의 경험도 한 몫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건반을 잘못 누르면 순식간에 손등을 때리는 학원선생님의 막대기가 피아노를 두렵게 만들어 버렸다. 맞지 않으려고 긴장할수록 손가락은 더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여서 손등에 붉은 줄이 몇 개씩 생긴 채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피아노 학원 앞에서 들어가길 망설였던 기억이 무수하고 선명하다. 그때 <소녀의 기도>를 연주하고픈 열한 살의 내 갈망이 그토록 크지 않았더라면 바이엘도 마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피아노 학원 앞에서 우연히 들은 그 멜로디에 마음을 뺏겨서 일 년간의 아픔을 참아냈던 것이다. 마침내 <소녀의 기도>를 더듬거리며 치게 되었을 때 망설임 없이 학원을 그만두었고 그 이후로 우리 집 피아노 뚜껑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피아노와 멀어지고 이십여 년이 지나 나를 다시 끌어당긴 악기는 클래식 기타였다. 기타는 피아노와 달리 품에 폭 안기는 다정함도 좋았고 어깨에 메고 어디든 함께 갈 수 있는 가벼움도 맘에 들었다. 몇 번째이든 새 시집이 나오면 좋은 사람들과 모여 앉아 시를 읽고 기타 연주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기타와 함께 엄청난 꿈을 꾸면서 기타교본을 사고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몇 달을 연습했다. 그러나 손끝의 통증이 굳은살로 조금씩 변해가도 <로망스>를 연주하는 게 히말라야 등정만큼이나 험난하다는 사실만 깊이 깨달았을 뿐이다. 계절이 다시 바뀌고 바람 소리보다 드물게 기타 소리가 들리다가 결국 오른손 손톱을 짧게 자르고 말았다. 그 뒤로도 여러 번 다시 연습을 시도했지만 약한 의지와 부족한 음악적 재능을 탓하며 번번이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기타가 싫어진 건 아니다. 오히려 기타를 향한 안타까움과 기타 소리에 대한 애정은 더 커졌다. 바이올린처럼 날카롭지도 않고 첼로처럼 처연하게 울지도 않는 그 묵묵한 소리에 내 마음을 담고 싶은 열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청소를 하다 간혹 구석에 서 있는 기타를 꺼내보곤 한다. 먼지를 털어내고 빈 집에서 홀로 기타 줄을 튕기면 맞춰지지 않은 음에서도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리가 잦아들면 또 한 줄 튕겨본다. 온 집에 조용히 퍼져나가는 잔향은 외로움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그리움을 데려다준다. 내게서 잊힌 것들을 다 불러줄 것만 같아서 기타를 자꾸 튕겨본다.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조셉 디캠프의 <기타 연주자>라는 그림도 떠오른다.


     너무 젊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여인이 어깨를 다 드러낸 드레스를 입고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그 그림에 마음이 묶였었다. 꼭 다문 입매와 아래로 내린 시선은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악보도 없는 걸 보면 아주 익숙하고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는 듯했다. 저렇게 고요한 자세로, 빈 방에서 홀로 기타를 안은 채 생각이 과거로 흘러간다면, 그건 대개 사랑의 시절일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함께 할 수 없는 두 영혼을 기타소리로 불러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아름답고 아픈 몇 개의 추억이 기타 줄에 하나씩 튕겨 음악이 되는 시간. 마음이 스스로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감정과 가라앉히지 못하는 그리움을 기타는 알아주고 세상에 들려준다. 아무도 듣지 않아도 저절로 흘러갈 소리들이 방을 채워 공기의 밀도를 높여준다. 그러니 어둡고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기타소리가 들리면 “내 몸의 전부가 어둠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것 같다고 했던 기형도 시인의 말은 얼마나 옳은가.


    숨소리도 죽이고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음악이 들린다. 나뭇가지 하나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심장 소리를 메트로놈 삼아 누군가 기타를 연주한다. 먼 옛날의 그가 연주하는 음악인지, 먼 훗날의 내가 연주하는 음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나를 감싼다. 기타소리는 빈 방의 시간을 물들이고, 물들인 시간을 모아 다시 기억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마음에서 생각이 비워지고 눈에 보이는 어둠과 눈에 보이지 않는 슬픔이 모두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상상속의 내 기타는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이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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