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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진 Apr 07. 2023

칠판 이야기


    어떤 사물은 평생을 함께 하기도 하고, 어떤 사물은 특정한 시기에만 우리의 삶에 깊은 관계를 맺었다가 사라진다. 그 중에서 매일매일 학교에서 만나던 사물들은 학교를 떠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칠판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사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나간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까만 칠판이 떠오른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책상과 딱딱한 나무의자, 미색의 낡은 커튼이 하늘거리던 작은 창문도 교실의 풍경을 만드는데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까만 칠판이 없으면 교실 풍경은 완성되지 못한 느낌이 든다. 그곳에서 늘 정면으로 마주했던 칠판이야말로 학창시절의 표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칠판 앞으로 불려나가는 일은 언제나 피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였다. 그것이 수학시간이라면 정말 반드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싶은 일이었다. 칠판에 적힌 문제를 풀다가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게 좋은 사람이 있겠는가. 연습장에선 풀리던 문제도 칠판에서는 안 풀리는 마법이라니. 그뿐이 아니다. 가창시험을 보던 음악시간의 칠판은 내게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으로 남아 있다. 노래를 유독 못하는 탓에 평소보다 몇 곱절의 부끄러움이 나를 옭아매어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던 때. 서너 번의 반주에도 얼음처럼 서 있는 나에게 음악선생님은 뒤돌아서서 칠판을 보고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어쨌거나 시험이었으므로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친구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칠판을 마주하니 그날따라 칠판은 검은 호수처럼 깊고 넓어 보였다. 나를 빨아들일 듯한 깊은 흑색의 문 같기도 했다. 선생님의 배려와 생각과는 달리 표정까지 자세히 보이진 않아도 내 모습을 분명하게 비쳐주는 칠판 앞에서 나는 더 용기를 잃고 말았다. 이것이 인생의 마지막 가창시험이라고 나에게 주문을 걸며, 간신히 시험을 마쳤다. 칠판 앞에서.


    학창시절 선생님이 계시는 칠판 앞에 서는 일은 내게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바라보는 칠판은 한없이 크고 어두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어깨를 붙이고 서로 밀치며 칠판에 우리만의 이야기를 적을 때, 그때의 칠판은 무엇이든 다 받아주는 다정한 얼굴이 된다. 어쩌다 일찍 등교한 날이거나 친구들이 다 돌아간 뒤 남게 되었을 때, 빈 교실에 혼자 있는 일이 생기면 나는 꼭 칠판 앞으로 나가 뭔가를 쓰곤 했다. 보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썼다가 지우곤 했다. 분필통에 남은 부러진 색분필들로 선생님처럼 별표도 쳐가며 커다란 일기장인 듯 마음을 적었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나는 겨우 혼자서만 낙서인 듯 속엣 말을 풀어놓았지만, 때로 용기 있는 친구들은 칠판에 사랑을 고백하는 일도 있었다. 누군가 붉은 하트 안에 좋아하는 남학생의 이름을 적어 놓는 사건이 생기면 매번 반 전체를 술렁이게 하는 즐거움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자신의 이름은 숨긴 그 고백의 주인공이 누군지 칠판은 알고 있었겠지만 우리는 끝내 모른 채 지나가곤 했다.


    내일 준비물, 시험 시간표, 청소 당번, 혹은 자습시간 떠든 사람 이름 등등. 온갖 것이 적히는 칠판은 대부분 수업 시간을 위해 쓰이지만, 칠판이 더욱 생기 있을 때는 아이들의 다양한 글씨들로 빼곡해졌을 때일지 모른다. 희한하게도 칠판은 자꾸 무언가를 쓰라고 부르는 것 같아서 선생님이 안계시면 자석에 끌리듯 칠판 앞으로 끌려 나가게 되는 것도 칠판의 힘이다. 선생님들은 매번 칠판에 낙서하지 말라는 훈계를 하지만, 그것은 작은 돌멩이가 일으키는 파문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수학 선생님께 불려나가는 칠판 앞은 어느 때보다 두려운 것이었지만, 우리들끼리 다닥다닥 붙어선 칠판은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었으니까. 한 가지 모습의 칠판이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하여 어느 시인은 칠판의 소용이란 살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이라고까지 했을 터이다.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들, 지치고 외로운 가슴과 무슨 말이든 쏟아내고 싶은 사춘기의 분노 같은 것들을 나도 친구들과 함께 많이도 적었었다.


    이제는 아득해진 학창시절,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내려앉던 작은 벤치와 그곳에서 점심시간이면 선생님 몰래 꺼내보던 만화책, 그리고 웃음소리, 떠드는 소리가 멈추지 않던 교실에 다시 가고 싶어진다. 그곳의 칠판 앞에 서면 기억에서 사라진 이름들이 다시 되살아날 것만 같다. 무엇보다 그때의 나를, 칠판에 미래의 꿈을 원 없이 적었던 나를 조용히 만나보고 싶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바라던 모습인지 물어보고, 칠판 앞에서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도 이제는 제법 견디노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음 속 칠판 앞에 서서.  (이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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