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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진 Apr 07. 2023

오늘도 원석을 다듬으며


원석(原石) ― 정진규

     

사람들은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을 자신의 쓰레기라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줍는 거지 사랑하는 거지 몇 해 전 집을 옮길 때만 해도 그들의 짐짝이 제일 많았다 그대로 아주 조심스레 소중스레 데리고 와선 제자리에 앉혔다 와서 보시면 안다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원석(原石)들이 바로 그들임을 어이하여 모르실까 나는 그것을 믿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나는 슬픔 부자(富者) 외로움 부자(富者) 아픔의 어두움의 부자(富者) 살림이 넉넉하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나는 이 시를 여고에 갓 입학했을 무렵에 읽었다. 시를 쫓아다니던 문학소녀도 아니었고 집에 제대로 된 시집 한 권 없었던 내가 어떻게 이 시를 읽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춘향이가 그네를 뛰다 사랑을 시작하고 줄리엣은 로미오의 세레나데를 몰래 듣던 그 나이에, 나는 이 시를 읽고 속울음을 멈췄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유난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기질을 가진 시골 계집애에게 ‘마음’이라는 단어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했는데, 실은 정반대였으니 그 간극은 나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어째서 내 마음은 봄꽃을 피우는 햇살처럼 반짝이며 빛나지 않고 비 오기 전의 하늘처럼 무겁고 흐린지. 고요하지만 불타는 심장은 왜 그렇게 먼 곳만을 꿈꾸는지. 열 명이나 되는 가족들 속에서 외롭다고 하면 죄를 짓는 것 같아 참고 있던 말은 얼마나 나를 찔렀는지. 이 모든 어둔 마음을 가졌다는 게 나는 정말 힘들어서 바꿀 수 있었다면 나의 무엇이든 주고 바꾸고 싶을 정도였다. 그럴 때 나는 이 시를 읽었던 것이다. 아니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이 시가 내게로 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까지 내게 이보다 더 따뜻한 위로는 없었으므로 아기가 엄마의 자장가를 듣듯 매일매일 이 시를 읽으며 한없는 안도를 느꼈다.


    시인은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슬픔과 외로움과 아픔과 어두움 같은 것들’은 마음의 쓰레기라 여겨 버리려고만 한다고.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해묵어 세월 흐르면 반짝이는 별이 되는 보석이 되는 원석(原石)들’임을 알라고 힘주어 얘기한다. 자신은 그것들을 줍는 걸인이라서 슬픔의 부자가 되었다고까지 고백한다. 이 말대로라면 나는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은 어둠과 외로움의 부자였으니 은총의 순간과 다름없었다. 원석이 이토록 가득한 창고가 내 마음이라면 나는 두고두고 이것들을 원하는 대로 다듬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머리끝이 곤두선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된 날. 이처럼 어린 내 생각을 한순간에 바꿔준 시인의 목소리에 나는 박수를 치거나 마당으로 내려가 폴짝폴짝 뛰었거나 책을 꼭 껴안고 키스를 퍼부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이 시를 읽을 때면 처음 읽던 그날의 쿵쾅거리던 내 심장이 느껴지는 듯하니까. 시인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해서 내 마음에 이렇게 딱 맞는 처방을 내려주었는지 놀랍기만 했었으니까.


    뜻밖에 다가온 한 편의 시는 이윽고 나를 시의 길로 이끌었다. 변변한 도서관 하나 없었던 시절에 나이 많은 주인아저씨의 눈치를 받으면서도 로터리 옆에 있던 작은 서점을 자주 드나들었다. 「원석」이 실린 정진규 시인의 시집을 읽고 싶었으나 끝내 구하지 못했어도, 시골 서점의 조그만 가판대 위까지 점령했던 이해인, 서정윤, 유안진의 시집들은 내 책꽂이까지 데려 올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이라는 것에 어떤 색이 입혀지든 괜찮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을 지날 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때 나는 시의 힘을 경험했고 이후로는 그 힘에 자주 나를 맡기곤 했다. 시가 우리의 내면에 직접 이야기하는 때가 생기면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우리에겐 마음을 만져줄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한데 내게 그것은 ‘시’일 때가 점점 많아지게 된 것이다. 오늘도 나는 마음 속 원석들 중 하나를 다듬는다. 끝내 시가 되지 않아도 어떤 빛깔이 나올까 기대하는 손길과 시간만으로도 내게는 이미 보석과 같으므로.  (이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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