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마토보의 쿠족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생명을 구하는 것 밖에 없다고 믿어요. 누군가가 살해되면 그들은 일 년 동안 애도한 다음에 ‘물에 빠진 자에 대한 재판’이라는 마지막 의식을 치러요. 강가에서 밤새 잔치를 벌이지요. 새벽녘에 살인자를 배에 태워요. 그리고 그를 강으로 끌고 가서 물에 빠뜨려요. 그는 묶여 있어서 헤엄칠 수 없어요. 이때 유가족은 선택을 해야 해요. 그가 빠져 죽게 놔두든지, 아니면 강으로 헤엄쳐 들어가 그를 구해주든지. 만일 살인자가 익사하게 둔다면 정의는 실현되겠지만 유가족은 여생을 슬픔으로 보낼 거라고 쿠족은 믿어요. 하지만 그들이 살인자의 생명을 구해준다면, 삶이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면 바로 그 행위가 그들의 슬픔을 거둬가요.”
「인터프리터 The Interpreter」라는 영화 속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그 영화를 직접 보진 못했고, 어느 책에선가 읽다가 가슴이 찌르르해져서 다시 내 수첩 속에 담아 놓았다. 쿠족의 재판 방식을 읽고 나서 나도 이런 재판을 상상해 본 일이 있다. 화가 나고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상상 속에서 물에 빠뜨려 보았다. 그리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죄책감과 애원과 슬픔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점점 더 가라앉는 것을 머릿속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가 분노했던 것만큼 통쾌할 거란 기대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일었다. 분노보다 더 쓰라린 괴로움과 생명 자체에 대한 연민이 가슴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때, 알았다. 물속의 사람에게 위선의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전히 용서도 선의도 자비도 없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조금 깨달았다.
사람을 미워할 때 우리는 엄청난 기운을 소모하게 되므로 증오는 가장 먼저 나를 아프게 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살인자를 살려주면, 그 행위로 인해 내 슬픔에는 치유의 싹이 튼다는 그들의 믿음을 나도 의심하지 않는다. 복수가 복수로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막으면서 용서를 가르치고, 동시에 자기의 분노와 슬픔을 자신의 손으로 그치게 하는 그들의 지혜가 조금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 방식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제 강물 속에 빠뜨리는 구체적인 장면을 그리지 않아도 이미 경험한 그 느낌들이 금방 되살아나서 훨씬 쉽게 마음이 가벼워진다. 시간이 더 한참 지난 뒤에는 생각 속에서였지만 내가 물에 빠뜨렸던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생기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세상은 언제나 정의롭지 않아서 작은 일의 성취도 공정하지 않고 힘들겠지만, 누군가를 매번 강물에 빠뜨리며 살고 싶지도 않고 또 내가 물에 빠져 재판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게다가 세상사람 모두가 물에 빠진 죄인을 구해주는 마음을 가졌다고 믿을 수도 없으니 삶은 어떻게 해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사람과 행위를 분리할 수 있는 만큼의 지혜로움이 생기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내 영혼도 미움과 증오를 덜 품게 될 테니 그만큼만이라도 더 자유로워지지 않겠는가. (이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