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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죄할 수 없는 이유

일본은 어째서 우리에게 제대로 사죄하지 않는 것일까.

by 이우

그들이 사죄할 수 없는 이유



- 일본은 어째서 우리에게 제대로 사죄하지 않는 것일까

- 언제나 독일의 사죄와 비교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일본

- 일본의 정신체계를 헤아려보자

-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정신개조를 시도한 일본

-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사죄를 받을 수 없는 것일까





군함도. 일본 땅에는 우리의 슬픈 역사가 어찌 이토록 많은 것일까. ©2016, leewoo





우리 민족에게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하나 있다. 너무 깊이 베여서 도저히 나을 기미도 없이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게 유전된다. 상처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강제 수탈, 강제 징용, 강제 노동, 위안부… 빼앗기고, 능욕당하고, 치욕스러운 상처들… 모두 우리가 주권을 상실했던 일제 시대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의 상처를 여전히 간직한 우리는 계속해서 통증을 호소한다. 아프다고, 상처 입었다고, 도무지 아물지 않는다고. 이것은 칭얼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숨길 수 없는 것일 뿐이다. 이미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처는 결코 깨끗이 아물지 않는다. 나아지더라도 깊은 흉터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선혈과 진물이 낭자한 상처보다는 흉터가 낫지 않겠는가. 이 상처가 흉터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가해자가 정중한 사죄를 하는 것이다. 그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사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언제나 목적어를 뭉뚱그려 말하거나, 사죄의 이유를 애매모호하게 밝혀왔다. 가령 일본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상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함.' 이것이 끝이었다.



언제나 서면을 통한, 담화를 통한 사죄의 메시지였다.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수상은 1995년 8월 15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각국, 특히 아시아 제국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 이에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하겠습니다." 얼핏 보면 사죄 같지만 사죄의 대상을 '아시아'라고 불특정 짓고 있다. 그래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수상은 1988년 10월 8일, 한국을 특정하여 "식민지 지배를 통해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던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진심의 사죄"를 표한다고 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 ©2016, leewoo
여전히 많은 일본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다. ©2016, leewoo





문제는 바로 이런 소극적인 사과 방식에 있었다. 국가 사이의 서면 교환, 정부 사이의 입장 표명, 지도자 사이의 견해 표명이 전부였다. 때문에 상처를 깊이 간직한 당사자들에게 그들의 사죄는 결코 와닿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늘 모순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식민지 문제에 대해 사죄를 하면서도, 야스쿠니 신사에 정부 각료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참배를 해왔다. 야스쿠니는 우리나라로 치면 현충원에 종교적인 색채를 더한 곳이다. 우리가 애통해하는 것은 여기에 2차 대전의 A급 전범의 혼령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죄는 빈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전후 일본의 사죄 방식은 독일의 그것과 비교되곤 한다.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에 한 남자가 꽃을 바치고 무릎을 꿇었다. 당시 독일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였다. 2005년, 호르스터 쾰러 독일 대통령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의 범죄를 깊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 했다. 2015년 5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종전 70주년 기념하여 '역사에는 결말이 없다'며 자신들의 과오를 절대 잊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또한 같은 해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방문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희생자들을 위해,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 이(과오)를 기억하겠다"




2015년 5월 3일, 다하우 수용소를 방문해 헌화하고 사죄하는 메르켈 총리. ©AP Photo/Matthias Schrader




일본은 왜 ‘독일처럼’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일까. 말하지 않으니 헤아려볼 수밖에 없다. 사실 문제는 애석하게도 우리 정부에게도 있다. 사실 대한민국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식민지 문제를 급히 청산했다. 한일협정의 관련 협정 중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한일 양국은 식민지 문제에 대한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무리 짓는 것과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초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여기에 날인했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위 조문을 근거로 개인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끝났음을 주장한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러한 속이 빈 협정을 받아들여왔다. 명분보다 실리를 챙긴 것이다. 하지만 같은 2차 대전의 피해국인 이스라엘은 우리와 달랐다. 이스라엘은 전쟁 동안 생긴 그들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고자 했다.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사실상 납치)해 이스라엘로 데려와 법정에 세운다. 그리고 재판 과정을 공개하는 것도 모자라 전 세계에 송출한다. 아이히만은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스라엘처럼 강단 있는 외교적 결단을 내릴 만큼의 강대국이 아닌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예루살렘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AFP/GETTY IMAGES





하지만 일본이 다만 이런 이유만으로 ‘독일처럼’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정신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룩한 유일무이한 국가이다. 물론 전통이 근대화의 물결에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세계화의 조류에 맞춰 자신들의 전통을 조율했다. 국가제도와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손봤다. 여기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국가관이자 신앙세계 그리고 사상의 핵심적인 축을 담당하게 된 ‘신도(神道)’이다.



사실 신도가 일본의 정신세계에 파고든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국교는 불교였다. 그들의 정신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바로 근왕주의자들이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일본을 통치하던 지도자는 천황이 아닌 쇼군이었다. 천황은 불가침의 영역이었지만 사실상 쇼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근왕주의자들은 일본이 새로운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다시금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천황을 다시금 국가의 정점에 올려놓고자 한 것이다. 젊은 지식인들은 쇼군 타도를 외치지 않았다. 그들이 주창한 것은 바로 신도의 부활이었다.



신도는 쉽게 말하면 만물에 다양한 신이 깃들여있다는 일본의 다신교적 종교관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불교였다. 불교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 해탈이나 내세에서의 행복, 즉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종교이다. 내세를 지향하는 불교는 현실을 체념하게 한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불교는 언제나 정치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허나 체념하는 마음가짐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근왕주의자들은 불교를 비판하며 신도의 부활을 주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민속신앙, 전통종교, 그리고 관습 정도로 취급되던 신도는 민중들 사이에서 점점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국가의 정신개조를 시도한 것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안치된 신사, 구노잔 도쇼구(久能山東照宮). ©2016, leewoo
신사를 방문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적어 이렇게 매단다. ©2016, leewoo




근왕주의자들은 신도를 체계화하고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신도의 중심에 조상과 구국 영웅을 숭배하도록 했고, 그 숭배의 정점에 천황을 올려두었다. 사실 쇼군이 통치하는 막부시대가 시작되며 열을 올린 것은 신도의 억압과 불교의 부흥이었다. 천황의 정치적 정당성은 바로 신도에서 나오기 때문이었다. 이제 신도의 부활과 함께 일본의 정신세계는 점차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마침내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룩한다. 쇼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천황은 다시 신도를 등에 업고 국정의 무대에 등장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근대화이기 이전에 천황권의 부활이었다.




부흥기를 맞았지만, 메이지 유신과 함께 억압되기 시작한 불교. ©2016, leewoo




신도의 보편화와 함께 일본은 재구성되었다. 모든 일본인들이 신도를 믿었고, 그 정점에 자리 잡은 천황을 해와 달처럼 태초부터 있어온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받아들였다. 더불어 천황은 일본과 불가분의 존재가 되었다. 일본인들의 무의식의 정점에 자리 잡은 천황은 의식적으로도 공고한 뒷받침을 받게 된다. 정치체제가 영국을 모방한 입헌군주제로 개편된 것이었다. 이제 일본인에게 천황은 무의식적으로 보나 의식적으로 보나 고귀하고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 일본인들의 애국심, 자긍심, 정체성은 신도와 함께 자연스럽게 천황과 직결되었다.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의 행보는 천명이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양 강대국을 모방하던 일본은 주변 약소국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한다.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온 일본이 힘을 합쳤다. 식민지 정책의 모든 전략들이 천황의 신성 아래 정당화되었다. 반인륜적 행위도 천명이었기에 합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한반도도 유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이 조선인들의 정신개조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정신에 신도를 깊이 뿌리내리고자 했다. 한반도 전역에 신사를 짓는가 하면, 신사 참배와 천황이 사는 방향으로 고개 숙여 예를 표하는 궁성요배를 강요했다. 신도가 곧 일본인의 정체성이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일본 황실의 문장이자, 사실상 일본의 국장이 된 국화. 야스쿠니의 상징이기도 하다. ©2016, leewoo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은 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에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고 발표한다. 포츠담 선언은 미국, 영국, 중국이 2차 대전 종전 직전 일본에게 항복을 권고했던 회담이었다. 사실상 무조건 항복이었지만, 천황은 불가피한 ‘포츠담 선언의 수락’이라고 완곡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실로 짐은 일본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진심 어린 바람에서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을 뿐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더욱이 적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탄을 새로이 사용해 무고한 생명을 무시로 빼앗기 시작했으니 그 피해가 실로 어디까지 갈지 헤아릴 수 없구나.”



이어 천황은 말했다.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명심하고 신령스러운 땅의 불멸을 항시 믿으며 세세손손 한 가족으로 지내라. 장래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라. 정직하고 고결한 품성을 도야하며 굳은 의지로 밀고 나가 제국의 영광을 드높이고 진보하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지어다.” 이것은 패전 선언이 아니었다. 정의를 실현하려던 일본은 비참한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는 취지의 연설이었다. 과연 2차 대전의 피해는 누구의 탓이었을까. 천황이었을까? 하지만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묻거나 비판을 한 인사는 정치적 사회적인 테러를 당했다. 일본은 여전히 일본이었던 것이다.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의 연설을 들으며 오열하는 일본인들. ©wikipidia




때문에 일본은 독일의 행보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전후 자신들의 과오, 즉 나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시인하고 속죄하고자 했다. 일본은 그토록 하지 못하는 것을 독일은 어째서 할 수 있는 것일까. 일본과 비교하자면 나치즘은 뿌리 깊은 정신적 신앙적 영역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니체적 허무주의의 유산을 이어받아 과거의 일체를 부정하는 공시적이며 단선적인 시대의 산물이었다.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극단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었던 광기 어린 국가적 행보였다. 이성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었기에 극악무도했지만, 정신을 차리고는 이성적으로 속죄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독일처럼 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과오가 신앙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면 자신들의 신성한 정체성이자 자긍심에 오명을, 나아가서는 국가의 정체성과 정당성에 커다란 오점을 남길 수 있다. 일본이 전시에 행했던 것들은 이성마저 사로잡은, 믿음을 넘어선 맹신에 가까운 신앙에 의한 것이었다. 신앙의 정점에 있는 천황의 이름 아래, 천황의 영광을 위하여 행했던 것이다. 그들의 신도는 지금까지도 그들의 주된 종교관이며 정체성에 뿌리 깊게 이어져있다.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에는 민족적 조상의 얼이 모셔져 있으며, 천황은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다.



깊은 상처를 남긴 그들을 헤아려보고 싶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그토록 하지 않으니 헤아려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니, 이해해보려 시도한 것이다. 이제 조금이나마 그들을 헤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영 사죄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일본은 소녀상을 세우고, 사죄를 촉구하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도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해보려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위안부의 비극적 삶을 그린 영화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스틸 컷.











*다음 화에서는 '그럼에도 사죄를 하는 일본인들을 통해' 한일문제의 해결점을 모색한 <사죄할 수 없는 이유에도 불구하고>를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 메이지 유신과 신도, 그리고 신도에 대한 종교적인 정보는 다음 단행본을 참고하였습니다.

• 마리우스 B.잰슨,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2015,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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