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라는 학교에서 재수강을 하다
나 잘난 맛에 살던 스무 살 무렵, 나는 학교에서 배운 학문이란 세상에서 결코 쓸모없는 것들이라 여겼다. 과연 수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화학실험을 한다고 꿈을 좇는데, 성공을 하는데, 사랑을 얻는데, 잘 노는 데에 도움이 되기나 할까. 먼지 폴폴 날리는 책더미 속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는 결코 찾을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대학에 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자퇴를 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이 아닌 세상에서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었다.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났다.
배낭 하나와 함께 유럽으로 떠났다. 하지만 낯선 세상에 홀로 남겨져보니 그 잘난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였는지 알게 되었다. 지하철 표 하나 살 줄 몰랐다. 지도를 들고도 하염없이 길을 잃었다. 어느 날엔 체크카드도 잃어버렸다. 이어 여권도 잃어버렸다. 그 잘난 맛에 살던 놈은 실은 바보 머저리였던 것이다. 오만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세상은 관대했다. 사람들은 손 내밀어 주었다. 낯선 세상의 규칙을 알려주었고, 올바른 길을 알려주었으며,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아주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녔다. 칠판과 책 속에 빼곡하게 적힌 것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몸소 부딪히며 세상에서 배우는 것들은 빠르게 이해가 되었다. 세상을 또다시 단정 지어버렸다. 학창 시절 동안 배운 지식은 세상살이에 결코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며, 오직 몸소 겪은 경험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환희마저 느꼈다. 나는 지금 캠퍼스에서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워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그래, 닥치는 대로 경험해보자.
뮌헨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도 이렇다 할 계획 없이 무작정 거릴 거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이키 상점을 지나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나는 신발을 신고 거울을 보고 있었다. 신발은 일명 ‘카마인’이라 불리는 ‘에어조던 6’ 신발이었다. 하지만 살 수 없었다. 나이키는 이 신발을 다른 신발인 ‘에어조던 17’과 묶어서 패키지로 발매했던 것이다. 낱개로는 결코 살 수 없었고, 패키지의 가격이 무려 30만 원이 넘었다.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그렇다고 카마인을 갖기 위해 억지로 에어조던 17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직원이 뭘 망설이냐고 물었다. 패키지가 아닌 단지 카마인만을 갖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직원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나랑 같이 이거 사자.” 그의 제안은 함께 패키지를 사서 신발을 하나씩 나눠 가지자는 것이었다. 나와는 달리 그가 원하는 것은 에어조던 17 뿐이었다. 거절할 게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발매도 되지 않아 정가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었으며, 막상 웃돈을 준다 해도 구하기 힘들었다. 이게 무슨 횡재란 말인가. 나는 반 값을 내고 카마인을 얻었다. 우리는 부절(符節)을 나누듯 신발을 한 켤레씩 나누고, 패키지의 신발 박스도 반으로 잘랐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신발을 여행 중에 얻다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그날은 뮌헨을 떠나 스위스로 가는 날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싸려는데 해답이 보이질 않았다. 챙겨 온 것은 60L의 배낭 하나. 늦가을이라 옷가지도 많았다. 배낭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배낭 절반만 한 신발 박스를 결코 넣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박스를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이키 신발은 중고거래를 할 때에 박스의 유무로 몇만 원이 왔다 갔다 했으니 말이다. 더 고민하다가는 기차를 놓칠 것 같았다.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큼지막한 쇼핑백을 들었다. 기차역으로 향하며 쇼윈도를 바라보았다. 내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전에는 스스로를 ‘배낭여행자’라고 지칭할 수 있다며 자부심을 느껴왔었다. 배낭여행자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배낭 하나에 자신의 간소한 짐을 짊어지고 세상 곳곳을 자유로이 탐험하는 여행자이다. 여럿이서 함께 머무는 숙소에서 잠을 청하고, 낯선 친구들과 동행하며, 가벼움을 동력 삼아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배낭여행자에게 커다란 쇼핑백이 웬 말이란 말인가.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자괴감에 빠졌다. 행여나 여비가 모자랄까 끼니를 대충 때우던 나였다. 신발값이면 고급스러운 식당에 가서 분위기를 만끽하며 느긋한 식사를 해도 됐을 터였다. 부담이 되어 보지 못했던 오캐스트라나 뮤지컬 공연을 좋은 자리에서 볼 수도 있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신발은 오히려 애물단지에 불과할 뿐이었다. 열차에서는 행여나 두고 내릴까, 호스텔에서는 누가 훔쳐가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 세워야만 했다. 여행에 새 신발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왜 나는 바보 멍청이일까.
내가 멍청한 까닭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오만으로 인해 크나큰 착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학문은 불필요하다고 일찍이 단정지었던 것이다. 세상의 한 측면이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산출된 것이 바로 학문이고 지식이었다. 이것을 참된 지식으로 여기지 못했던 것은, 단지 배움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세상은 이미 내게 많은 것을 가르치려 했지만 나는 배우지 않았다. 잘 익혀서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보고 사고했어야 했거늘, 오만했던 탓에 그러지 못했다.
문득, 학창 시절의 수학 시간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필요충분조건’에 대해 열정적으로 수업을 했다. 두 명제 사이의 논리적 귀결을 파악하는 이것을, 치기에 가득 찼던 나는 고작 말장난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논리학이었다. 그때 겸손한 마음으로 지식을 배웠더라면 아마 카마인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지혜로운 배낭여행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충분한지 논리적으로 헤아릴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아, 어리석은 배낭여행자여.
그래도 일은 이미 벌어진 법, 나는 ‘필요하지 않은’ 박스를 버리고 ‘애물단지가 된’ 신발만을 배낭에 구겨 넣었다. 기차에 몸을 싣고 차창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어쩌면 지난날 배움을 게을리 했던 탓에, 세상에서 비싼 값을 치르며 재수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서글퍼하지는 말자. 모르면 다시 배우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세상이라는 학교에 얼마나 많은 재수강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럼에도 여정이 즐거웠던 까닭은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