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사랑의 정의 속에서 내게 맞는 사랑이란
모두들 거창하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을 모두 이해했다는 듯이. 예로부터 그래왔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제자와 친구들을 모아놓고 에로스, 즉 사랑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한다. 그는 영혼의 결핍을 채우고 지고한 아름다움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소크라테스가 사랑을 잘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또 아니었다. 사랑에 통달했던 소크라테스는 오늘날까지 악처로 알려진 크산티페에게 온갖 수모를 겪으며 결혼생활을 했다. 가장과 남편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단테 역시 사랑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냈다. 아니 보다 거창하게 사랑의 유형 자체를 만들어냈다. 젊은 시절 그는 단 한번 마주친 베아트리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요절하고 만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평생 사랑했고, 상상 속에서 신격화를 하기에 이른다. 이윽고 그녀는 단테의 일생일대의 역작 『신곡』의 영감이 되어 「천국편」에 등장하기까지 한다. 단 한번 마주치고 요절한 그녀는 단테 안에서 뮤즈가 된 것이었다. 무의식의 심리학자 융은 그의 사랑이야말로 인간의 자아를 실현시키는 숭고한 ‘베아트리체 적’ 사랑이라 정의했다. 하지만 단테는 그녀와 손을 잡아보기는 커녕 말 한번 섞어본 적도 없었다.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사랑에 대해 그럴듯하게 이야기했지만 정작 사랑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랑과 정욕을 초인 사상의 도구 정도로 여기던 니체는 이윽고 여성 혐오의 극치에 이르렸지만, 사실 그는 여자와 이렇다 할 사랑을 해본 적 없었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슷한 유형의 사람에 대해 묘사한다. 평생 여자라곤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랑이라고는 ‘주님에 대한 사랑’뿐이라 여기던 그리스 정교회의 어느 수도승은 지천명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 여자를 보자 소년처럼 가슴이 쿵쾅대 어쩔 줄 몰라한다.
모두들 사랑 앞에서 갈피를 잡지도 못하면서, 사랑에 대한 담론과 정의만 만들어낸 셈이다. 폐해는 여기서 생겨난다. 누군가는 그런 사랑에 대한 담론과 정의를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비단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숱한 멜로드라마와 영화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노트북>, <어바웃 타임>, <비포어 선라이즈>, <도깨비>, <가장 보통의 연애> 등등... 모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미디어가 전해주는 사랑을 곧이곧대로 인식하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나타난다. 얼마 전 여사친 한 명이 내게 사랑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여태껏 많은 남자를 만나왔지만 일생동안 이렇다 할,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드라마랑 영화를 너무 많이 봤던 거 아냐?” 나의 말에 그녀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사랑을 그저 미디어를 통해서만 배웠던 거지. 그래서 오직 그것들만이 사랑다운 사랑이라고 믿어버린 거고. 그래서 연애를 해도 그런 생각이 든 게 아닐까?” 그녀는 손뼉까지 치며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미디어로 인식한 사랑이 본인만의 사랑을 비현실적이고 불안한 사랑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사랑에 대한 담론 내지 정의는 사실 누군가의 논리정연한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여태껏 사랑을 하나의 담론과 정의로만 배워왔다. 한때는 단테처럼 베아트리체적 사랑을 꿈꾸었고, 피츠 제럴드의 개츠비처럼 사랑하고 싶었으며,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속 주인공 핍 같은 사랑을 꿈꾸었다. 사랑을 글로 배운 것이었다. 그래서 연애를 할 때면 적잖이 당황하곤 했다. 내가 아는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사랑하는 그녀가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데이지가 아니라, 에스텔러가 아니라 슬펐다. 드라마와 영화가 주는 사랑의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친구처럼, 사랑이 사랑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고 주저했다. 사랑한단 말을 하고도 이게 사랑이 맞나 혼돈스러웠고, 그동안 알던 사랑과 너무나 달라 사랑한단 말을 자린고비처럼 아꼈다. 사랑을 곁에 있는 연인이 아닌 미지의 연인과 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그래서 이별도 제법 견딜만한 기다림의 과정이라 여겼다. 하지만 거듭되는 이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 어떤 사랑에 대한 담론도, 그 어떤 멜로 영화보다도 더 사랑에 가까운 것은 그저 나의 사랑일 뿐이었다는 것을.
애석하게도 나는 예감하고 있다. 소설 같은, 영화 같은, 드라마 같은 사랑은 내 생애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은 충분히 그것을 입증하고도 남았다. 그래도 사랑의 경험이 있으니 더 나은 사랑을, 더 좋은 사랑을 하지 않겠느냐고? 아니,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귀납적인 결론을 도출해낸다지만, 사랑의 경험이 풍부하다한들 결코 사랑을 잘할 수 없다. ‘잘 하는 것’과 ‘잘 아는 것’은 별개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의 경험이 쌓여 사랑을 ‘잘 알게’ 되면 사랑에 대해 담론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사랑에 대한 말들은 많다. 옆집 아저씨부터 동네 형들에 이르기까지 늘 젠체하며 말한다. “야, 사랑은 말이다...” “야 인마, 여자는 말이야...” 그들의 말을 믿어서 좋았던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별과 시련을 극복하는데 일시적인 효과가 있긴 했고, 부킹과 술자리에서는 잠깐 즐거웠을지는 몰라도. 그리고 의심해야 할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인기 멜로드라마의 작가가 과연 자신의 작품처럼 사랑을 할까. 어쩌면 그건 그의 사랑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나는 또다시 나만의 사랑을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간 해왔던 것처럼 어색하게 다가갈 것이고, 몇 번이고 주저할 것이며, 무조건적으로 헌신했다가도 찌질하게 계산할 것이며, 모든 걸 다 이해했다가도 말도 안 되는 걸로 마음 상할 것이며, 차갑게 매정해졌다가도 구차하게 매달릴 것이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는 사랑의 환상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내게 맞는 사랑이, 내게 어울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에. 숱한 사랑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