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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Mar 09. 2020

나의 근원

인쇄소에서 만들었던 나의 첫 책에 대하여

우연히 창고를 정리하다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칠 년 전, 스물여섯 살 때 처음으로 인쇄한 나의 책이었다. 캠퍼스 학생회관에 자리 잡은 제본소에 유에스비를 들고 찾아갔다. 사장님께 원고를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사장님은 두 시간 후에 찾으러 오라고 했지만,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감격스러운 출산의 과정을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프린터는 원고지 2000장 분량의 종이를 쉼 없이 토해냈다. 사장님은 초조하게 기다리는 내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게 소설이라고? 직접 쓴 거야? 이렇게 쓰는 데 얼마나 걸렸어? 소설가가 될 거라고? 어떤 내용인데? 조립자는 무슨 뜻이야?

지금 인쇄되고 있는 게 일 년 동안 밤을 지새운 원고이며, 소설가가 되기 위해 캠퍼스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소설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당시는 문학적 자양분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던 시절이라 나의 견해가 전무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소설의 원형이 되는 작가들과 사상들을 언급하지 않고 소설에 대해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사장님과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얼버무렸다.

한 권의 책으로 엮인 첫 장편소설. 표지 디자인도 사장님이 일 분만에 뚝딱 만들어 주신 거였지만 마음에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조립자를 가장 좋아하는 책들 사이에 꽂아두고 그 문학적 계보를 가늠해보았다. 진짜 책으로 출간되어 서점에서 마주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두근대는 상상도 했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똑같은 책을 다시 한 권 인쇄했고, 출판사(문학동네였는지, 창비였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둘 중 한 곳)로 보냈다.

머지않아 인정받는 소설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상상에 제대로 잠도 못 잤다. 한 달 즈음 지나 연락이 왔다. ‘귀하의 소중한 원고를 검토해보았지만 당사의 방향과 많이 달라...’ 상투적인 거절 멘트였다. 이 정도면 어느 반열에 올랐고 문학상도 탈 수 있을 거라 자만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냉정했다. 부푼 가슴은 쉽게 터져버렸고, 나는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왜 거절받은 것일까 몇 날 며칠을 수없이 자문해보았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 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했다. 하지만 부정보다는 인정을 해보면 어떨까... 거절당한 게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깔고 책을 다시 펼쳐보았다. 형편없었다. 또다시 읽으니 견딜 수가 없었다. 고작 일 년 동안 쓴 게 이거였다는 사실에 서글펐다. 대작들과 함께 꽂혀있던 책은 이제 창고로 처박혔다. 반드시 이것보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훌륭한 소설을 쓸 것.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구상에 착수한 게 레지스탕스였다.



3쇄를 맞이한 장편소설 <<레지스탕스>>



그로부터 칠 년. 그간 잊고 살았던 책을 펼쳐보았다. 형편없지만 뜨거웠고 터무니없었지만 순수했다. 투박했지만 그런대로 조악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게 다였다. 지금도 책장에 꽂아두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조립자. 그래서 앞으로도 영원히 창고에 자리 잡고 있을 조립자. 창고에 처박혀있던 그 시절로부터 나는 얼마나 나아간 것일까. 그 위치가 어찌 되었던 나의 출발점은 영원히 창고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 아팠던 그 시절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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