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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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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Jan 04. 2021

나의 모스크바

모스크바의 다리 위에서 가르침을 얻다.

나를 매혹했던 모스크바의 다리.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드디어 종착지인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드디어 마음속 깊이 동경하던 러시아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사실 열차가 출발했던 블라디보스토크도 러시아였으니 이미 오래전부터 러시아 땅 위에 있었다. 하지만 동방 러시아는 내가 동경하던 러시아와는 어딘가 달랐다. 내게 러시아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정서로 가득 찬 세계였다. 동방 러시아에서는 동경했던 이들의 정서를 전혀 체감할 수 없었다. 러시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동양적이었다. 오히려 내가 잠시 살았던 중국의 정서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열차에서 내려 들이마신 어두운 새벽 공기. 모스크바의 대기에서부터 진정한 러시아의 정서의 향취가 느껴졌다. 나는 잔뜩 흥분했다. 내가 왔음을 모스크바에 알리고 싶었다. 택시 기사에게도, 호스텔 직원에게도, 식당 종업원에게도 말했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너무 좋아해요. 언젠가 그런 소설을 쓸 거예요." "저는 차이코프스키의 현악 4중주 1번 2악장을 너무 좋아해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5번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나의 정서를 맞장구 쳐주는 이는 만나보지 못했다. 이상했다. 모든 모스크바 사람들이 러시아 적인 정수를 알고 있는 나를 좋아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이상한 놈이나 다름없었다. 다짜고짜 만나는 러시아 사람마다 붙잡고 20세기 러시아의 예술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외국을 여행하며 많이 들었던 질문들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 마찬가지였다. 특히 여자들은 잔뜩 흥분한 채 이렇게 물었다. "엑소 아세요?" "슈퍼 주니어 좋아해요?" "저 이민호 알아요!" 그들과는 접점이 없었기에 대화는 금세 어긋나고 말았다. 한국인이라고 한국 대중문화를 모두 좋아하는 건 아닌데! 왜 그걸 모르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바로 내가 러시아 사람들에게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모스크바에 잔뜩 취해 있었다. 도스토예스프키를 다시 읽었고, 귀에 꼽은 이어폰에서는 라흐마니노프가 흘러나왔으며,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호두까기 인형을 만나보았다. 이 도취는 착각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 자신이 러시아와 긴밀하게 호흡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사실 혼자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류가 좋아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느끼는 당혹이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동경한 한류는 사실 한국의 전부가 아니라, 그저 한국의 현상 중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여행도 20세기 러시아 문화 덕후의 러시아 방문과 다름없었다.


모스크바는 좋았지만 외로웠다. 한 세기나 지난 정서에 도취된 상태로는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스크바 강을 한 바퀴 도는 유람선에 올라탔다. 바에 테이블을 잡고 홀로 와인을 마시며 소설을 썼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탑승객 모두들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폰을 빼고 노트북을 덮었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모스크바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모스크바에 깊이 동화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디에도 섞이지 못한 채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어딘가에, 누군가에 섞이고 싶었다. 그때 창 밖으로 신기한 광경이 들어왔다. 다리 위의 아치 구조물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유람선의 갑판으로 나가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아슬아슬하게 다리 구조물 정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젊은이들! 저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모스크바에서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마린스키 극장에 함께 앉은 관객들과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저들에게 다가가 보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유람선이 선착장에 멈추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강변을 따라 나를 매혹한 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람선이 지나온 반대 방향의 길이었다. "이 다리는 아니었는데..." "이것도 아니었고..."  몇 개의 다리를 지나쳤을까, 한 시간 정도 걷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작 다리 위에 서니 가슴이 떨렸다. 아치 구조물의 꼭대기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지만, 그들에게로 다가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리 옆으로는 세찬 물결이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자칫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그대로 강으로 추락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올라가고 싶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나는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것들을 가방 안에 넣곤 가방끈을 질끈 고쳐멨다. 침을 꿀꺽 삼치곤 아치형 구조물을 오르기 시작했다. 옆을 바라보니 바로 낭떠러지였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세를 낮췄다. 보다 안전하게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하늘로 뻗어있는 외나무다리를 걷는 것만 같았다.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모스크바까지 와서 강에 빠져 죽으면 어떡하지. 만일 헤엄쳐서 살아남아도 노트북에 든 소설들을 어떡하지. 벌써 등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이봐 힘내!" 저 멀리서 누군가 외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구조물 위에 앉아있는 한 사내가 나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다 왔어. 겁먹지 마!" "다리가 후들거려 못 가겠어." 그러자 사내가 일어서 아주 편안한 걸음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숨을 크기 쉬고 생각을 바꿔봐. 너는 평지를 걷는 중이야." 


드디어 그의 안내를 따라 정상에 도착했다. "자, 여기 앉아." 그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털어주며 말했다. "고마워." 나는 자리에 앉아 땀을 닦으며 말했다. "자. 선물." 그는 가방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병뚜껑을 따 내게 건넸다. 그와 건배를 했다. "모스크바에는 왜 온 거야?" 사내가 물었다. 이번에는 동경하는 20세기 러시아의 예술가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 보고 싶었거든. 전혀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었어. 그래서 여기도 올라온 거고." 그는 나의 여행 이야기를 재미있게 경청해주었다. "그럼 너는 여기 왜 올라 온 거야?"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나는 여기를 좋아해. 여기에서는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거든." 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모스크바 야경을 좌에서 우로 쭉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하늘에서 바라보는 듯한 한 여름밤의 모스크바는 정말 아름다웠다.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게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맥주도 꿀맛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싹 녹는 기분이었다. "너는 행운의 여행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여행객들은 여행 책자만 보며 모스크바를 구경하잖아. 크렘린 궁에 가고, 레닌 묘를 보고, 마린스키에 가고, 유람선을 타고. 또 거기서 기념사진을 찍고. 하지만 이곳은 그 어떤 가이드 책자에도 없어. 이게 진짜 모스크바야."


그의 한 마디는 마린스키에서 큰돈을 지불하고 보았던 호두까기 인형보다 가슴속 깊은 울림을 남겼다. 마린스키의 감동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미 증발한 지 오래였지만, 다리 위에서-이제는 이름도 까먹은-사내가 준 울림은 여전히 내게 메아리치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그것은 '진짜 모스크바'적인 정수였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니! 그의 가르침은 내겐 동경하는 러시아 예술가의 반열에 오를 만한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날의 모스크바를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다. 문학에 취해 진짜 세상과 호흡하고 있지 못하다. 오늘도 나는 다리를 찾아다닌다. 내게 번뜩이는 가르침을 선사해 줄 미지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는 그런 다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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