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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 May 03. 2021

소설을 쓴다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레지스탕스』3쇄에 부치는 글 #1

사실 나의 첫 장편소설 『레지스탕스』의 1쇄에는 작가의 말이 없었다. 그런데 3쇄 발간을 맞이해 두 편의 작가의 말을 실었다.「레지스탕스를 떠나보내며」와 「광야에서」가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말을 통해 '레지스탕스'의 본질과 근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 읽어보면 치기가 여실히 느껴지지만 그만큼 진지함이 담겨있는 증거라고 볼 수 있겠다. 아직 레지스탕스를 읽지 않은 독자분들에게도 이 작품이 어떤 소설인지 어렴풋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 첫 번째 작가의 말





레지스탕스를 떠나보내며


소설을 쓴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예민하기 그지없던 스무 살 무렵, 내게 가장 큰 화두로 다가왔던 것은 가치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삶을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좇으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마주하는 낯선 이들의 가치관을 모조리 나의 가치관으로 삼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같이 나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의문이 들었다. 내게 맞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고자 문학의 세계에 문을 두드렸다.


홀로 국어사전과 옥편을 들고 생소한 세계를 헤매는데 이십 대의 청춘을 다 바쳤다. 하지만 그토록 갈구했던 것은 찾지 못했으니, 그곳은 아름다운 메타포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메타포라는 것은 한 문학 작품, 아니 한 작가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기에 본질적으로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탄탈로스처럼 메타포의 향연 속에서도 메타포의 갈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심 하나, 나 또한 자신만의 아름다운 메타포 창조하고 향유하리라. 소설을 쓰리라. 순수한 창조에의 열망, 그것만이 내가 그토록 원하던 ‘답’이라고 확신했다. 답을 찾았다는 희열, 나는 그 감정에 도취되고 말았다.


한데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동년배 그 누구보다 다독을 했다고 자부했던 나였지만,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누구에게서도 글 쓰는 방법과 기교를 배우지 못했다. 그저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기 위해 이제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작품들을 병적으로 탐닉할 뿐이었다. 죽어 아무 말 없는 이들의 활자화된 메타포들이 나의 스승이요, 경구요, 지침이었다. 첫 문장을 쓰기까지 이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자신만만하게 세상에 떠나보낸 습작들은 차가운 냉대, 그리고 조소와 함께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너무나 아팠다. 두려움 하나, 문학은 선택받은 이들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두려움 둘, 나는 그저 인용문으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닐까.



더욱 지독한 메타포를 창조해내리라. 두려움 속에서 비장한 각오로 레지스탕스를 구상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나는 지난 이십 대를 열병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현세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괴리되었다. 가족보다, 사랑보다, 우정보다 문학적 열망만이 이 세상 가장 지고한 것이라고 자부했다. 작가가 되지 못할 것이란 불안, 그저 치기에 불과할지도 모를 창조에의 열망, 나의 문학세계가 그저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렇게 나는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글을 써나갔다. 문학이 결코 문학 전공자나 문단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무(無)가 되리라.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레지스탕스를 쓰는 내내 목적의식은 뜨거웠고 뚜렷했다. 괴테처럼 일찍이 영혼이 늙어버린 이들은 배겨내지 못할 소설을 써내는 것. 젊은이들을 미혹의 세계로 이끄는 소설을 써내는 것. 호기롭게 완성된 원고를 출판사로 보냈다. 보내고 또 보냈다. 되돌아온 건 정중한 거절뿐. 늘어나는 건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 뿐이었다. 어느 누구에게 조언도, 피드백도 받지 못해 홀로 진단하고 처방했다. 몇 번이고 레지스탕스를 수술대에 올려 손봐야만 했다. 수술실이 나의 유일한 거처였다. 그렇게 어언 사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수술은 끝났고, 차가운 수술대 위에는 본질적인 레지스탕스만이 남아있다.


출산의 시간-그렇다면 그동안의 시간은 산고였던 것일까-이다. 또다시 온갖 미사여구로 레지스탕스를 포장할 수도 있겠다. 영혼이 늙은 이들은 배겨내지 못할 소설이라느니, 젊은이들을 미혹하는 소설이라느니 하며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솔직해져 보려고 한다. 내가 레지스탕스를 쓴 것은 다름 아니다. 그저 이십 대의 어느 날 길을 잃었고, 이정표가 필요했다. 나만이 소유하고 의지할 수 있는 지독하고 아름다운 메타포가 필요했다. 그래서 소설을 썼을 뿐이다. 나 자신을 위하여... 이제, 탯줄을 자를 시간이다. 안녕, 나의 미숙하고 지독했던 젊은 날의 문학적 치기와 창조에의 열망이여. 앞으로도 문학을 한다면, 나의 문학 세계는 이 레지스탕스에 뿌리내려 있으리라.




-2017년 어느 여름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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