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개진 사랑이라도 좋으니

by 이진영

나는 눈이 좋지 않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밝고 선명한 세상만을 보고 산다. 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이런 내 삶은 나를 냉소적으로 만드는 데 한 축을 담당했다. 세상에는 믿을 것 하나 없고, 벗겨 보면 다 똑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이런 나도 새벽에는 꽤 말랑해진다. 안경 없이 본 세상은 낮과는 전혀 다르다. 새벽의 가전제품들은 조용하게 빛난다. 그 길목에서, 한껏 뭉개지고 커진 빛을 만난다. 번지고 겹쳐진 불빛은 분명 아름답다. 그러나 눈을 찡그리면 빛은 본래의 몸집을 드러낸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본 빛의 본질은 작고 초라하다.


새벽의 나는 나도 모르는 환상을 가진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크고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들. 그러나 그것은 왜곡된 이미지일 뿐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고, 미약한 빛만이 외로이 빛난다. 나만큼 그들도 외로울 것이다. 품에 와락 안긴 사랑이 저를 향한 것이 아니어서. 손에 쥔 사랑이 알고 보니 허상이어서. 사랑한다고 외칠 땐 언제고 팽 돌아서버려서.


그러나 나는 사랑을 멈출 수 없다. 사랑은 내게 구원이자 숨 쉴 틈이다. 사랑해야만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환상에 기반한 사랑을 한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번져버린 그들일지라도.


오늘도 나는 대상 없는 사랑을 뿜어 내고, 그들은 그 사랑을 삼키지 못한다. 나는 사랑함에도 사랑할 자격 없는 사람인가. 스치듯 이런 생각을 안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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