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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Jun 21. 2021

잊을 수 없는 고객

콜센터 상담원이 잊지 못하는 고객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치가 떨릴 만큼 지독한 진상이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감동을 안겨 준 천사 거나.


다만, 내 경우 진상 고객의 폭언은 처음부터 흘려듣기도 하고, 멘탈 보호를 위해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없다. 또, 대부분의 컴플레인 전화는 고객이 원하는 바가 경제적 보상인지, 진심 어린 사과와 개선책인지, 아니면 단순히 '떠받들어짐'인지 파악해서, 그에 맞게 안내하면 심각한 상황으로는 번지지 않는다. 물론 내가 악마 같은 사람을 운 좋게 피해왔는지도 모르지만.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콜센터 상담원에 대한 처우가 조금은 개선되어, 고객이 지속적으로 욕설이나 성희롱을 하면, 상담원이 통화를 강제로 종료하게 만드는 추세라고 들었다. 내가 다닌 일본 콜센터에서도 고객이 욕을 하면,  번의 경고 후에 전화를 끊을  있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본에는 우리나라만큼 화려하고 풍부한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기능은  번도 써보지 못했다. 1  남짓되는 근속 기간 동안 들어본 가장 심한 말은 ' 바보 아냐(お前バカじゃないの)?'였으니. 대신, 상담원 대답은 듣지도 않은  1시간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며 화만 내는 사람은 있었다. 그럴 때는 다른 고객의 전화가 밀리므로, 상사의 지시로 먼저 종료하곤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만난 최악의 진상은 누구였어요?'라고 묻는다면, 정말 기억이 안 나서 대답할 수가 없다. 굳이 떠올려 보자면, 본인 확인 절차가 불만이었는지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한 글자씩 정성껏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알려주던 젊은 남성(목 아프겠다 싶었다)과 외국인이랑은 할 말이 없으니 일본인을 바꾸라던 인종 차별 주의자 정도일까.  


대신 팍팍한 콜센터 생활에 작은 위로를 준 두 명의 고객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첫 번째는, 비즈니스 출장으로 호텔을 예약한 점잖은 중년의 일본인 남성 분. 오버부킹으로 인해 예약한 객실에서 머물 수 없는 퍽 난감한 상황이었다. 항공사처럼 호텔도 취소 고객을 고려해 관행적으로 수용 인원보다 조금 더 많은 예약을 받아 둔다. 드문 경우지만, 만실로 인해 호텔에서 이미 확정된 예약을 거부하는 경우, 가까운 다른 호텔로 안내하거나 전액 환불 조치를 한 뒤 소정의 보상금을 제공한다.


하지만 후속 조치와 상관없이, 여행사를 믿고 예약한 고객으로서는 황당하기 마련. 내가 담당한 남성 고객도 미팅 장소 등을 고려해 숙소를 정했기에, '이런 법이 어딨느냐'라며 한참 동안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게 십여 분 간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를 반복하다 보니,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한 마디 말로 나를 웃음 짓게 했다.


아가씨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너무 뭐라고 해서 미안해요.


콜센터에서 일하면서 고객이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두 번째는 채팅으로 상담한 젊은 커리어우먼. 회사 이름으로 영수증을 발급해 달라는 비교적 간단한 문의였다. 회사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자, 아래와 같이 답변이 왔다.


"회사이름은OOO

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이없게도 영수증 이름 칸에 '회사이름은OOO'라고 붙여 넣은 뒤 발송해버렸다(참고로, 일본어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OOO'로 수정해 재발급한 뒤, 고객님께 죄송하다고 사과드렸다. 그랬더니 생각지도 못한 그분의 답변.


아니에요. 제가 알아보기 어렵게 써서 죄송해요.

 

그 후 채팅은 바로 종료되었다.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다른 문의를 처리하는 사이, 동료 직원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아까 그 고객이 실수로 채팅방을 나가는 바람에 예은 씨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대요. 다음 채팅이 저한테 왔는데, 대신 전해달라고 하시네요."


내 잘못을 따뜻하게 감싸주실 뿐 아니라 당연한 일에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여성분. 그분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오히려 내가 배웠다.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에는 생각보다 큰 수고가 들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무심코 건넨 배려 섞인 한 마디가 그 사람의 하루, 혹은 몇 년을 지탱할 수 있음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일본어 콜센터 표현:

心より感謝申し上げます。
(코코로요리 칸샤 모우시아게마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표 이미지: Photo by Warren Wong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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