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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은 Jun 18. 2021

490~520일: 싫은 일을 덜 하는 삶을 위해

콜센터를 나가다

회사에 퇴사 통보를 하고 마지막 나흘간의 근무가 시작됐다. 실적에 대한 압박은 사라졌지만, 전화를 아예 받지 않을 수 없는 노릇. 다른 직무와 달리 콜센터 상담은 금세 다른 인력으로 대체할 수 있기에, 인수인계도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한 건의 문의라도 더 받는 쪽이 회사가 원하는 바다.


나흘, 사흘, 이틀, 그리고 마지막 하루.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죽은 듯 업무를 했다. 내가 퇴사를 앞두고 있든 말든,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고성을 내는 고객, 상담 내용과 관계없는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고객, 외국인은 믿을 수 없다며 일본인을 바꾸라는 고객 등 수화기 너머의 인간군상은 여전히 다채로웠다. 다만, 예전과 달리 무례한 사람에게는 조금 더 강경한 태도로, 무난하거나 상냥한 사람에게는 조금 더 정성스러운 태도로 상담할 배짱은 있었다.


최후의 한 통은 무언가 뜻깊은 내용이기를 바랐다. 예를 들어, 고객의 곤란한 상황을 멋지게 해결해 감사 인사를 받는다거나 우연히 한국인과 연결된다거나 하는. 하지만 퇴근 10분 전에 들어온 전화는 평범한 취소 문의였고, 호텔에 이메일 한통을 보낸 뒤 싱겁게 마무리됐다. 그리고는 업무 종료.


수고했어요.
(お疲れさまでした)


마지막 근무임을 안 동료의 한 마디가 마음을 간지럽혔다. 퇴사 소식을 들은 다른 많은 직원들로부터도 예상치 못한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그러고 보면 일본 콜센터에서 520일은, 업무가 고단해서인지 지금껏 거쳐온 여느 직장보다도 깊고 따뜻한 동료애를 나눈 시간이었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은 매니저와 선배에게 따로 감사의 메일을 보낸 뒤 노트북을 닫았다. 기기를 반납하고 사무실을 나서자, 이제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카모메 식당>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マサコ 「いいわね。やりたいことをやっていらして」
마사코 "좋아 보여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시는 게."

サチエ 「やりたくないことはやらないだけなんです」
사치에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에요"


어쩌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삶이 더 동화 같을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원치 않는 일을 감내하며 살아가므로. 가령,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를 악물고 출근하는 가장이나, 꿈을 이루기 위해 험한 아르바이트를 마다하지 않는 청년처럼 말이다.  


나 역시 당장 글을 쓰고 여행만 다니거나, 1인 출판사를 차릴 생각은 없다. 앞으로도 하기 싫은 일을 모조리 거부하며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육체와 정신이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의 일이라면, 살짝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세상에 스트레스 없는 직장, 고민 없는 삶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업무가 콜센터보다 편하다 한 들, 인간관계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고, 낯선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일단 해보지 않고서 판단할 수 없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그만이다.


우선 지금은, 하기 싫은 일 하나를 내 삶에서 지워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한다.


일본어 콜센터 표현:

他にご不明な点はございませんか。
(호까니 고후메이나텐와 고자이마셍까)

다른 궁금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대표 이미지: Photo by K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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